<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고령 박씨 |
출생 | 1928년 1월 6일 |
경기도 이천군 율면 월포리[1] | |
사망 | 2021년 3월 20일 (향년 93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6묘역 |
학력 | 경희대학교 대학원 (생물학 / 석사)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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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2004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2. 생애
박기하는 1928년 1월 6일 경기도 이천군(현 이천시) 율면 월포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41년 11월에 박영순(朴英淳) 등 14명의 소년들이 1939년경에 조직한 황취소년단(荒鷲少年團)에 참여하여 회계로 활동했다. 황취소년단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밭을 개간하고 채소를 가꿨으며, 1942년 2월 하순경 장호원 읍내 곳곳에 붙인 <한국독립과 민족단결>을 촉구하는 벽보를 붙였다가 발각되었다. 또한 이들은 유인물을 우편으로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발송했다. 그 내용은 일제가 곧 패망하니 한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이며, 한민족의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더욱이 버스에 붙은 항일격문은 서울 등 대도시로 퍼져 사태가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일로 1942년 3월 초순에 동료들과 함께 장호원주재소 유치장으로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뒤이어 이천경찰서로 이송된 뒤 1942년 10월 박영순, 곽태현(郭泰鉉) 등과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으로 송치되어 40여 일 동안 다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이후 기소유예로 출옥한 뒤 형사들의 감시를 받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해방 후 경희대학교 대학원 생물학과에서 식물학 전공으로 수학하다가 1960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2], 이후 안성농업전문대학 원예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은퇴한 뒤에는 용인시 수지구에 거주하였고, 2004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2021년 3월 20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1] 인근의 고당리와 함께 고령 박씨 집성촌이다.[2] 석사 학위 논문 : 韓國産 참나무類의 解剖學的 硏究(한국산 참나무류의 해부학적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