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1:25:49

마크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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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승부로 인한 공동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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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크 커
(Mark Kerr)
생년월일 1968년 12월 21일 ([age(1968-12-21)]세)
오하이오 주 톨리도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종합격투기 전적 27전 15승 11패 1무효
4KO, 7SUB, 2판정, 2실격
6KO, 3SUB, 2판정
체격 188cm / 113kg / 198cm
그래플링 전적 14전 13승 1패
링네임 The Smashing Machine
주요 타이틀 1992 NCAA Division I All-American
WVC 3 헤비급 토너먼트 우승
UFC 14 헤비급 토너먼트 우승
UFC 15 헤비급 토너먼트 우승
1999 ADCC -99kg 금메달
2000 ADCC -99kg 금메달
2000 ADCC 무제한급 금메달
2001 ADCC 슈퍼파이트 챔피언[1]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전적3. 커리어
3.1. 전성기3.2. 몰락
4. 파이팅 스타일5. 기타
5.1. 약물복용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전 종합격투기 선수.

2. 전적

※ 종합격투기

※ 그래플링

3. 커리어

3.1. 전성기

마크 콜먼, 랜디 커투어, 커트 앵글 등과 동시대의 레슬러였던 커는 콜먼의 대학교 후배였다. 졸업 이후 레슬링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 커는 콜먼의 추천으로 MMA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97년 1월 WVC 3에 출전한 커는 거구의 레슬러인 폴 베얼랜스를 G&P로 김장을 하며 자신의 존재를 격투계에 알렸다. 2차전 상대인 시드니 곤잘레스 프레이타스는 커의 공격을 견디다 못해 링 밖으로 도망치며 실격패를 당했고, 결승전에서 만난 파비오 구르젤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경기내용을 보이며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파일:external/pds22.egloos.com/e0066657_4d9df2ab73a5f.gif

1997년 7월에는 UFC 14에서도 모티 혼슈타인과 댄 보비쉬를 연파하고 우승을 차지한다. 150kg에 육박하는 보비쉬를 태클로 쓰러뜨리고 턱으롤 눈을 비벼내 탭을 받아냈다.

파일:/pds/201104/08/57/e0066657_4d9dfba05fcaa.jpg

1997년 10월의 UFC 15에서도 그렉 스콧을 니킥으로, 드웨인 케이슨을 태클에 이은 리어네이키드 초크로 각각 쓰러뜨리고 UFC 토너먼트 2연패의 주인공이 된다.

파일:/pds/201104/08/57/e0066657_4d9df2bc52c16.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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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커는 콜먼과 함께 UFC를 떠나 일본Pride로 둥지를 옮긴다. PRIDE에서도 승리를 거듭하여 1998년 3월의 PRIDE 2에서부터 1999년 7월의 PRIDE 6에 이르기까지 타카다 노부히코, 페드로 오타비오 등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둔다. PRIDE에서도 펼친 맹활약에 일본의 팬들은 그에게 '영장류 최강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 때까지 전적이 11전 11승으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3.2. 몰락

커는 21세기 이후 은퇴할 때까지 단 4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의 몰락은 1999년 9월 PRIDE 7에서 이고르 보브찬친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보브찬친은 커의 그래플링에 고전하면서도 스탠딩에서 위협적인 펀치를 날리며 응전했고 바디킥 캐치에 이어 오버핸드 라이트를 정통으로 꽂아넣으며 커를 다운시켰다. 커는 다시금 보브찬친을 그라운드로 끌고 들어갔지만 오히려 상위를 빼앗기고 노스사우스에서 4점 니킥을 얻어맞고 실신하고 만다. 하지만 당시 신설된 룰에 의해 그라운드 니킥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기결과는 무효로 처리되었다.

패배는 면했으나 커의 입장에서도 그다지 유리한 경기내용은 아니었다. 경기 직후에는 보브찬친의 승리가 선언되기도 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패배나 다름없는 압박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시합 이후 안면타격에 공포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약물복용에 의한 부작용으로 훈련 중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엔센 이노우에와의 대전이 취소되기까지 했다.

2000년 1월 병상에서 회복한 커는 PRIDE 2000 무차별급 그랑프리 출전권을 두고 엔센과의 결전에 임한다. 시작부터 강력한 태클로 엔센의 타격을 효과적으로 봉인했고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만장일치로 판정승, 그랑프리 출전권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2000년 5월의 그랑프리 본선에서 후지타 카즈유키에게 패하며 1회전 탈락을 하고 말았다. 초반 그라운드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급격히 체력을 소모했고 여기에 타격공포증세를 보이며 무기력하게 판정패하고 만다. 후지타 카즈유키에게 패배한 이후 마크 커는 급하락세를 타고만다.

2000년 12월에는 보브찬친과의 리매치에서 패배했고, 2001년 7월에는 히스 헤링에게 그라운드 니킥으로 졌다. 2004년 2월에는 야마모토 요시히사에게 셀프 DDT승을 헌납하며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2006년 11월에 다시 복귀했으나 모스타파 알투르크 등에게 패배하는 등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2] 특히 2009년 8월 M-1에서는 킹 모에게 25초만에 넉아웃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킹 모와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상태.

4. 파이팅 스타일

각종 그래플링 대회 수상이 말해주듯 뛰어난 기량을 가진 레슬러이다. 레슬링 스킬은 말할 것도 없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시무시한 피지컬을 보유하고 있었다. 별명 중 하나가 타이탄인 것도 있어서 팬들의 그의 근육을 '티타늄 갑옷'이라고 불렀다.

가장 큰 약점은 스탠딩 타격. 원래 타격기량이 좋지 못했고 보브찬친에게 얻어맞은 이후로는 공포증까지 생겨버렸다. 바스 루턴과 훈련하는 등 커도 나름대로 타격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정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진 못했다. 그라운드에서도 박치기, 그라운드 니킥, 눈찌르기[3] 등 무기가 많이 줄면서 효과적인 공격루트가 죄다 차단된 탓도 있다.

약물을 끊은 이후로는 체력이나 근력이 많이 떨어졌다는 평이다.

5. 기타

콜먼의 대학 후배로 MMA에 진출한 계기도 콜먼의 추천이었다. 레슬링부에 함께 있었는데 커의 말로는 자신이 콜먼보다 테크닉은 낫다고 한다. 물론 기술이 승리를 보장하진 않는다고도 덧붙였지만.

90년대 후반의 위상은 대단했다. 60억분의 1의 사나이70억분의 1의 사나이란 별명의 프로토타입인 영장류 최강의 사나이가 그를 소개하는 수식어였다. 90년대 초반의 호이스 그레이시나 00년대의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 UFC에서 콜먼의 뒤를 이어 무지막지한 G&P로 명성을 떨쳤으며 PRIDE에서는 '영장류 최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북의 최종병기' 이고르 보브찬친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전적은 1패 1무효로 라이벌이라기보단 어째 상성관계 정도로 보인다. 1무효 조차도 시마다 유지의 삽질 때문이었다는 걸 따지자면 사실상 2패.

PRIDE 27의 야마모토 요시히사와의 경기에서는 테이크다운을 시도하다가 링바닥에 머리를 찧고 기절하고 말았다.[4] 커는 '태클을 하려다 실수했다'라고 말했고 야마모토는 '난 DDT를 걸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DDT 그립도 안 잡혀서 빼박 커의 말이 맞는 거다.[5][6]

2009년의 킹 모전 이후로는 은퇴한 상태이며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시작한지 불과 7개월만에 이달의 세일즈맨에 올랐는데, 격투기로 쌓아놓은 유명세의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그는 대인 친화력이 강한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5.1. 약물복용

그의 도핑 스캔들은 종합격투기 선수들의 약물복용 실태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약물과 관계된 그의 입장은 그의 격투기 커리어를 다룬 영화 '스매싱 머신'에 잘 나타나 있다.
"사실은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이 다 망가져 있었다."
엔센과의 경기를 앞두고 쓰러진 커는 한때 의식불명에 이르기까지 했다. 훗날 향정신제, 진통제를 과다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강도높은 훈련을 소화하고 상대의 타격에 더 잘 버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정말 무식한 방법인데 진통제의 다량 복용은 심장 및 기타 내장기관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대개의 경우 호르몬제보다 훨씬 위험하기 때문에 00년대 이후에는 차라리 스테로이드를 맞을지언정 거의 쓰지 않는 방법이다.

진통제를 쓰는 경우는 대개 만성적인 관절부상에 의한 통증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7] 이 경우는 '본 실력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본 실력을 제대로 내기 위해' 복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의 인식이나 처벌의 강도는 조금 너그러운 편이다. 물론 권장할 일은 아니다.

마크 커의 경우는 심각해서, 약물을 계속 복용했을 경우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고, 약물을 끓을때 역시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다. 즉 뭘해도 죽기 일보직전인 위험선에서 해메이고 있었다는 소리. 단, 약물복용을 지속했다면 '분명히'죽는 상황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었다. 매 경기 때마다 심리적인 부담을 줄이고자 향정신성 약물에도 손을 댔고[8], 여기에 각종 호르몬제까지 사용했으니... 그가 약물을 끊고 재활에 나선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엔센과의 싸움에서는 약물을 쓰지 않고 승리하는 등 커 자신도 재활을 위해 힘썼다. 다만 그 이후의 전적은 별로 좋지 못했다. ADCC에 다시 등장했을때 이미 배가 나오고 근육은 쪼그라들어 버린 중늙은이가 되어 버렸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감동한 사람도 꽤 많았다.

후일 The Smashing Machine이라는 자기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도 했으며, 여기에 약물복용과 그 후유증으로 고생한 이야기, 타격 공포증이 단순히 맞는것을 두려워 한 것뿐만 아니라 때리는것. 역시 심적으로 큰 부담을 가졌었던 한 사람으로써의 마크커를 이야기했다.[9]

6. 관련 문서




[1] ADCC 무제한급의 전대회 챔피언과 현대회 챔피언 간의 단판경기이다. 선수들의 사정에 따라 꼭 전•현대회 챔피언 간의 경기가 아닌 경우도 있다. 2000년 대회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마크 커는 1998년 대회 챔피언인 마리오 스페히를 꺾고 2001 슈퍼파이트 챔피언에 올랐으며, 2003년에는 2001년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히카르도 아로나에게 패배하였다.[2] 그래도 2006년과 2007년에 서브미션으로 2승을 거두기는 했다.[3] 커가 정말 잘 쓰는 기술 중 하나였다. 발리 투도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UFC에서 금칙기술이 된 후에도 턱으로 누른다던가 하는 식으로 은근슬쩍 사용했다. 이건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지만.[4] 이 경기의 승자가 2004 헤비급 그랑프리 출전권을 획득하는 경기였다. 야마모토 요시히사는 Rings 일반인 선발 테스트 1기 출신이었는데, 마에다 아키라가 총애하는 직속 제자였다. 오죽하면 발리 투도 제팬에서 Rings 대표로 힉슨 그레이시를 상대하게 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렇게 죽어라 밀어줬는데, Rings에서는 문지기보다 못 했다. 그럼에도 일본 선수 중에 몇 안 되는 헤비급이었기 때문에, 다카다 도장으로 이적하면서 PRIDE 측에서 야마모토를 밀어주려는 의도로 매치업을 잡은 것이다.[5] 야마모토 요시히사는 이 경기 이후 어떠한 강자가 와도 DDT로 이겨버리겠다는 허세를 부렸다. 이를 눈꼴 사납게 본 타카다 노부히코에 의해 미르코 크로캅과 경기를 하게 되는데 결과는...희대의 관광게임. 로우킥을 맞은 뒤 '이게 다야?' 라는 식으로 허벅지를 때리며 크로캅을 도발했고 열받은 그는 주구장창 로우킥만 때리며 요시히사의 허벅지를 변색시켰고 하이킥이 막히자 또 도발을 하는 요시히사를 연속 사커킥으로 저 멀리 보내버렸다. 참고로 요시히사가 도발을 할 때 전 세계 해설들은 '어...저럴 때가 아닐 텐데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6] 야마모토 요시히사는 본래 개그맨 지망생이었는데, Rings 테스트로 격투기에 입문한 케이스. 믿기 어렵겠지만 청소년 시절에는 국내 유도 대회에서 우승도 하는 등 나름 운동신경도 좋았다. 그러나 다카다 노부히코가 그의 재능을 알고, PRIDE로 이적시켰으며, 인터뷰로 어그로를 끌라고 할 정도. 근데 마크 커와 경기 후 인터뷰는 경기 내용도 그렇고, 도를 넘은 어그로라서 헤비급 그랑프리 출전을 불허하고 크로캅을 이기면 출전권 획득이라는 명목으로 경기를 잡은 것이었다. 토사구팽[7] MMA 베테랑들의 관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혹사되어 있다.[8] 경기장에서의 자신감 넘치는 이미지와는 달리 커는 매우 여린 심성의 소유자라고 한다.[9] 사실상 마크커의 심성 자체가 순수한 아마스포츠레슬링 선수로써 살았어야 했었다고 이야기 한다. 맞고 때리는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 어떻게 프로파이터로써 살아갈수 있겠는가. 초창기에는 육체빨로 서둘러 승부를 결정지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