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5:30:22

P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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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국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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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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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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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설립 1997년
해체 2007년
창립자 사카키바라 노부유키
본사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1. 개요2. 역사
2.1. 초창기2.2. 그레이시 이후2.3. 도산
3. 룰4. 역대 타이틀5. 고정 주최 이벤트6. 상업적 성공
6.1. 부작용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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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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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발족되어 2007년까지 일본에 있었던 종합격투기 단체.

1997년 DSE와 타카다 노부히코가 계획했던 원매치 이벤트였으나 이후 계속 이어지며 일본 최대, 나아가서는 세계 최고의 MMA 단체 중 하나로 성장한다. 지상파에서의 방영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자금원에 범죄조직이 연루되어 몰락하다가 Zuffa사에 인수되었고, 결국 빚 문제로 2007년 도산했다.

본거지는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2. 역사

2.1. 초창기

1993년 미국UFC 1 토너먼트에서 호이스 그레이시가 우승을 거두자 1994년 UWF 소속의 안조 요지로스앤젤레스의 도장으로 찾아간다. 안조는 힉슨 그레이시와 무규칙 룰로 대결했지만 결과는 콧구멍에 손가락을 끼워 상체를 들어올리는 등 거의 관광에 가까운 참패였다.

안조의 스승이었던 타카다 노부히코는 U-계 프로레슬링의 명예회복을 위해 1997년 발리투도 최강이었던 힉슨을 일본으로 불러들여와 리벤지에 나섰다. 바로 이것이 Pride의 시작이다. 물론 시합에서는 힉슨이 타카다를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비록 시합에서는 졌지만 타카다 vs 힉슨이라는 빅카드에 개리 굿리지, 올렉 탁타로프, 댄 세번, 키모 레오폴도, 쇼지 아키라 등 수많은 빅네임들이 참가한 대회였기에 입장수익은 초대박이었다. 5만이 넘는 관객들이 모여드는 것을 본 주최측은 이 대회가 엄청난 흥행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 차기 대회의 준비에 들어갔다.

흥행을 위해 준비된 선봉은 사쿠라바 카즈시였다. 사쿠라바는 이미 일본에서 열린 UFC JAPAN 우승자 출신으로 PRIDE FC의 일본격투기 선수를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없었고, 또 다카다 노부히코의 제자임과 동시에 레슬링을 베이스로 하였기에 대회내의 스토리를 쌓기는 충분한 선수였다. PRIDE.02부터 참전한 사쿠라바는 프라이드의 전성기를 책임진 선수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흥행의 보증수표였다. 레슬링 선수임에도 경기를 지루하게 하지않고 쇼맨십도 좋아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경기중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스승의 복수라는 명분하에 그레이시 가문을 만나 연전연승하며 일본 최고의 인기격투기 선수이자 영웅이 된다. 호일러, 호이스, 헨조, 하이안 그레이시를 격파하며 프라이드의 대 흥행을 이끌었다.

자칫 사쿠라바의 격투기 실력을 흥행 위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때 사쿠라바는 그레이시 가문 외에도 다양한 선수들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하였다.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 인기로만 매치가 이루어지거나 이길만한 상대를 골라서 싸운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격투기도 흥행요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일본내에서 선수간의 대립요소나 복수를 위한 리벤지 등 여러가지 스토리 라인을 만들기도 하지만 명백히 사쿠라바는 프라이드를 대표하는 선수임과 동시에 당대 최고의 격투기 선수인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쿠라바는 PRIDE FC 13에서 숙적을 만나고야 만다.

2.2. 그레이시 이후

2002년 마에다 아키라가 일방적인 Rings의 해체를 전후하여 Rings가 보유하고 있던 우수한 선수층은 그대로 Pride에 흡수된다. 특히 훗날 MMA 헤비급 판도를 뒤흔들었던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등의 선수들은 Pride의 질을 한층 높여주었다.

초반부의 흥행을 책임지던 사쿠라바가 반달레이 실바에게 참패하며 무너졌다. 하지만, Pride는 더 이상 선수 1명의 스타성에만 의존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쿠라바를 제압한 실바는 얼마 안 되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

2004년 '60억 분의 1'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인 2004 헤비급 그랑프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선수층 덕이 컸다. Pride는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MMA 단체로 성장함과 동시에 미국의 UFC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했다.

때마침 UFC는 공화당의 집중포화에 맞아 도산직전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Pride에서 UFC 쪽의 선수층을 마구 영입해 오기도 했다. 2004 ~ 2006년 무렵의 UFC 해설을 들어보면 엄청나게 Pride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 도산

하지만 2007년 자금원에 야쿠자가 연계되어 있다는 제보가 흘러나오면서 중요한 돈줄 중 하나였던 후지TV 방송과의 계약이 끊어졌다. 방송사를 잃고 버틸 방법이 없어진 Pride는 자금난을 타개하고자 미국 진출 등의 무리수를 뒀지만 심각한 적자를 봤고 결국 Zuffa사로 매각, 도산해버리고 말았다. 2006년 경 자금난에 관한 루머가 돈 후로 약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이나 화이트의 UFC가 방송금지 처분을 받고 4년간 450억원을 까먹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세계 1위를 탈환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항목.

UFC측은 Pride를 계속 유지할 의지가 없었는지 일부 탑 컨텐더들을 UFC에 흡수한 후 해체시켰다. 원래는 일본의 프라이드와 미국의 UFC로 나누어 운영하려고 했고 실제로 프라이드를 흡수하는 대신 프라이드 월드와이드라는 자회사를 새로 세웠었다. 하지만 막상 인수하고 보니 재정 상태가 막장이었고[1] 거기에 야쿠자와의 유착이 심해서 포기했다는 뒷얘기가 있는데, 미일 양국에서 기업이 범죄 조직과 연루되는 것을 심각한 범죄로 본다지만 UFC의 회장이었던 퍼티타 가문의 마피아 연관설은 미국의 종합격투기 팬들에게 흔한 주제이니 만큼 재정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인듯 하다.

남은 일부 선수들은 2008년 5월 2일 K-1 히어로즈에 흡수되어 새로운 단체인 DREAM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다른 일부는 새로운 단체인 센고쿠를 결성하였고 이는 SRC로 이어진다. 그러나 2011년 두 단체 모두 경영난[2]에 빠져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결국 SRC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공중분해되었고, DREAM은 모회사가 파산되는 바람에 공동개최가 아니면 대회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5년 Pride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다가, 2015년 10월 8일에 Rizin FF라는 명칭으로 출범하였다. 관련기사

이렇듯 Pride의 몰락은 동시에 일본 격투계의 몰락을 초래했다. 당시 일본의 유명선수들은 자국단체가 망하는 바람에 미국이나 다른나라 단체로 이적했지만 이렇다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연패를 기록하다 은퇴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예가 고미 타카노리, 추성훈이다. 더군다나 고미같은 경우는 요즘 일본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없고 운영하는 체육관도 관원이 없어서 매달 적자를 면치못해 폐관직전 이라고 하고 추성훈, 사쿠라바 카즈시 또한 이미 운영중인 도장을 폐관하였으며 일본의 유도 영웅 요시다 히데히코는 자신의 간판을 건 체육관을 전국에 8개의 지점을 놨을 정도로 번창했지만 현재는 도쿄의 본점을 제외한 모든 도장을 폐관한 상태라고 한다. 더욱 안타까운것은 이 몰락은 현재진행형 이라는것이다.관련기사

3.

  • 체급
    헤비급 - 93kg 이상
    미들급 - 83kg이상 93kg미만
    웰터급 - 73kg이상 83kg미만
    라이트급 - 73kg미만
  • 공식 룰
    파이터들은 주최즉에서 제공하는 오픈 핑거 글러브를 착용하여야 한다.
    파이터들은 니 패드나 발목 보호대 팔꿈치 보호대 그리고 핑거 테이프 등을 착용할수 있으나 사전에 심판진들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마우스 피스는 필수 착용하여야 한다.
    시합중이나 전에 어떤 종류의 오일이나 젤, 스프레이, 마사지 크림 바세린등을 바르는것을 금한다. 발각될 경우 실격패로 인정한다.
    신발을 착용할 경우에는 레퍼리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링 크기는 주최즉에서 정한데로 가로세로 7m를 원칙으로 한다.
    라운드는 3라운드를 기본으로 하되 첫번째 라운드는 10분, 2번째, 3번째 라운드는 5분으로 한다. 연장전은 없으며 라운드 중간 휴식시간은 2분으로 한다.
  • 반칙
    깨물기
    찌르기
    박치기
    로우 블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행위
    호흡기관 가격이나 손으로 조르기[3]
    후두부 가격
    로프 붙잡고 늘어지기
    링에서 내려가 도망가기
    상대방을 링밖으로 던져버리기
    시간끌며 도망다니기
  • 승리조건
    한판(녹아웃)
    항복하거나 탭을 할 경우
    레프리 스탑
    닥터 스탑
    타월 투척
    판정
  • 스톱 앤 돈 무브[4]
    선수들이 시합중 링 밖으로 떨어질 것 같은 경우에 심판은 중지를 외칠 수 있고 양 선수들은 무조건 스탑하여야 한다. 그 후, 그 포지션 그대로 링 중앙에서 경기를 다시 시작한다.

안면 커팅의 위험 때문에 팔꿈치 공격을 금지해 놓고 스톰핑, 사커볼 킥, 4점 니킥 등 뇌진탕을 유발할 수 있는 기술들은 허용했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결국 2007년부터 선수 보호 차원에서 금지되었는데 몇달 후 바로 망해버렸다. 물론 이게 원인은 아니었지만.

흥행 차원에서인지 경기 룰은 은근히 스탠딩 타격을 강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스트라이커에게 조금 더 유리. 그래플러의 태클을 막아낸 후 링에 기댈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태클을 시도한 쪽이 체력이 빠질 수 있다. 링 구석에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서 하위 포지션에서의 방어도 약간 더 유리하다. 또한 그라운드 공방이 너무 지리하다 싶으면 레프리가 스탠딩을 선언하기도 한다.[5]

채점 방식은 UFC처럼 라운드 별 채점제가 아닌 경기 전체를 채점하며, 철저히 공격적으로 임하는 선수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다. 일단 타 단체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서브미션 캐치에 다운과 동등한 점수를 주고[6], 어그레시브한 모습에도 가산점이 들어간다. 또한 무제한급 경기의 경우에는 체중이 낮은 선수에게 혜택을 준다.

다만 이 판정 시스템이 문제가 많아서 1~2라운드 동안 아웃파이팅 혹은 개비기 전법으로 점수를 쌓고 있다가 다운 한번 당해서, 혹은 하위에 깔린 선수의 끊임없는 서브미션 시도 때문에 판정패당하는 경기가 좀 나왔다. 대표적인 경기가 리코 로드리게스 vs 호드리고 노게이라 전. 사실 이건 최대한 좋게 말해준거고, 분위기빨로 판정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UFC의 판정 시스템이 큰 문제가 되면서 프라이드의 판정 시스템을 그리워하는 팬들도 있다.

초창기 UFC가 폭력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것과는 달리 일본의 Pride는 이런 문제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이는 격투기를 스포츠가 아닌 무도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다. 점점 온건한 룰을 도입하는 것과 반대로 거의 모든 공격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자극적인 난타전과 실전성을 표방할 수 있었다. 또한 룰이 전체적으로 적극적으로 경기하는 파이터에게 유리하고, 레드 카드나 그린 카드 등의 지루해지지 않는 요소들을 많이 배치해 두어서 전체적으로 재밌는 경기가 많이 나왔다.

다만 스톰핑이나 사커볼 킥, 4점 니킥[7] 같은 뇌진탕을 유발할 수 있는 기술은 허용하면서, 얼굴에 컷[8]을 만든다는 이유로 엘보우를 금지시킨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평가가 많았다.[9]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 내에서 "스톰핑과 사커킥은 폭력적이다"는 의견이 점점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런 여론을 반영하여 결국 2007년 경에 스톰핑과 사커킥을 금지하게 되었다. 다만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레슬러에게 유리한 UFC룰에 대한 반감으로 'Pride의 룰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약간 나오기도 했으나 반론도 만만치 않아[10] 얼마 안되어 사장되었다.

4. 역대 타이틀

Pride 역대 챔피언

5. 고정 주최 이벤트

  • 프라이드 넘버링 이벤트 : 일반적인 흥행 이벤트. 32, 33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렸고 2007년 3월 Zuffa에 인수된 이후 34를 마지막으로 프라이드는 폐업하게 된다.
  • 무사도(武士道, Bushido) : 헤비급을 제외한 경량급 이벤트이자 하위리그 이벤트. 시작부터 경량급 이벤트를 지향했지만 이상하게 다른 이벤트들보다 저질 경기가 많이 나왔고 흥행카드로 끼워넣은 헤비급 매치에 이벤트의 흥행과 평가가 휘둘리는 상황이 되었고 폐지까지 논의 되었었다. 하지만 무사도 7을 기점으로 헤비급 매치를 빼고 넘버링 이벤트와 다른 경기 룰을 도입한 이후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 남제(男祭り,Shockwave) : 2002년 8월 도쿄국립경기장에서 K-1과 합동 개최했던 다이너마이트가 전신으로, 2003년부터 매년 말일에 열린 프라이드 최대의 이벤트. 같은 날 벌어진 K-1의 다이너마이트와 함께 연말 격투기 이벤트의 쌍벽을 이뤘었다.
  • 체급별 그랑프리 : 비정기적으로 체급별 그랑프리를 개최했으며 2006년 무차별급 그랑프리가 마지막이었다.

6. 상업적 성공

지상파 방송국과 계약을 맺어 TV로 방영을 하였다. 흡사 프로레슬링을 보는 듯한 화려한 연출과 자극적인 각본[11]을 통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극대화하였는데 이것이 TV 방송과 맞물려 일본인의 정서를 자극했고,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K-1과 공동개최한 2002 남제에서 기록한 7만명 관중동원, 2005 남제의 요시다 히데히코 vs 오가와 나오야전에서 기록한 5억엔의 파이트머니 등 규모나 상업성 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였다. 또한 사이타마의 특설링은 흡사 록 페스티벌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며 업계의 전설이 되었다.

또한 절대강자의 이미지 마케팅에도 크게 성공했다. 호화로운 선수진을 대규모 자본의 마케팅으로 포장하여 이미지 마케팅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요시다 vs 오가와의 라이벌 구도나 2004 헤비급 GP는 바로 이러한 전략이 먹혀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6.1. 부작용

이렇듯 상업성의 화신과도 같은 단체인데, 지나치게 흥행 위주의 편성을 하다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해산 후에 밝혀진 것이지만 워크가 많았던 단체이기도 하다. 덕분에 일본의 프라이드 까들은 사이타마 프로레슬링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사례는 사쿠라바 카즈시 vs 퀸튼 잭슨, 다카다 노부히코[12] vs 마크 콜먼 등이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편파적인 시합 편성이나 판정도 적지 않았다. 무리하게 일부 일본인 선수에게 푸쉬를 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매치업이나 판정이 나오는 일이 흔했다. 특히 고미 타카노리같은 경우는 타이틀샷을 위해 아예 체급을 하나 신설할 정도. 라이트급의 세계 기준은 -70kg인데 프라이드의 경우 기준에서 3kg나 더 늘인 -73kg급을 만들었었다.[13] 비슷한 예로 DREAM도 페더급 스타인 야마모토 노리후미가 증량이 힘들다고 호소하자 -65kg에서 2kg 줄인 -63kg급을 신설했다.[14]

일본 선수 뿐만 아니라 수혜를 받은 선수가 있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미르코 크로캅. 2003~2004년 크로캅의 효도르를 향한 챔피언전 편성을 위해 온갖 명분을 부여하여 매치업을 했다. 그러나 크로캅이 노게이라한테 암바로 역전패를 하게 되자, DSE측의 계산이 꼬였으나 2004년 60억 분의 1이라는 테마로 헤비급 그랑프리를 편성한다. 효도르, 크로캅, 노게이라가 무조건 4강에 진출하기 위해 1회전부터 노골적으로 이들한테 떡밥 매치를 주곤했다. 그러나 크로캅이 케빈 랜들맨에게 타격에 의한 KO패로 탈락하게 되면서, DSE 측에서는 크로캅 멘탈 회복을 위해 떡밥 매치를 주선한다.[15] 무난히 승리를 챙기며, 자신감까지 회복시킨 후 다시 효도르와의 상대를 추진하기 위해 그의 동생인 에밀리아넨코 알렉산더와 경기를 잡게 되고, 여기서 승리를 거두면서, 먼 길까지 왔지만 효도르와 승부하기 위한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그 후 랜들맨과의 리벤지 성공, 노게이라의 통합 챔피언전 패배로 마침내 효도르의 헤비급 타이틀전 도전자가 된다.

이렇게 무리하게 만들어진 파이터는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기량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Pride 해산 후에도 좋은 성적을 냈던 효도르, 노게이라, 램페이지, 쇼군 등 외국인 선수에 비하면 이들 일본인 파이터들의 몰락은 상전벽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

운영면에서도 단기적인 수익은 잘 뽑아내지만 장기적인 전략없이 재투자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한순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게다가 경영의 투명성이나 도덕성에서도 심각하게 곪아있던 것이 드러나고 있다. 굳이 2007년의 스캔들을 꺼내지 않더라도 이미 2003년 이노키 봄바예에서 효도르를 빼돌렸을 때 야쿠자들이 봄바예의 프로모터들을 협박한 전력이 있다. 2004년에도 모리시타 나오유키 CEO가 의문의 자살을 하여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세간의 주목을 모았던 거액의 대전료 역시 일부 일본인 선수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으로, 비인기 선수나 외국인 파이터들은 낮은 금액에 경기를 뛰어야 했다. 선수들의 임금이 체불되었으며 일부는 미지급되기도 했다. 조쉬 바넷 같은 탑 컨텐더도 대전료를 떼어먹힌 적이 있을 정도다. 언론을 달구었던 거액의 파이트머니[16]조차 부풀려진 액수라는 설이 있다.[17] 이 문제가 실질적으로 점화된 게 첫 미국 대회였던 Pride 32회 대회였다. 미국 대회였기때문에 NSAC에서 최초로 파이트 머니를 공개하게 되었는데 최고 액수를 받은 효도르의 파이트머니가 10만달러였다. 물론 이때 당시 프라이드는 후지 TV의 방영권 계약이 끝나는 등 대체적으로 몰락기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대전료 뻥튀기는 일본 격투기 단체의 고질적인 문제란 것도 생각해야한다. 라이벌 단체였던 K-1도 대전료 뻥튀기가 심각했다. 그나마 프라이드 32는 미국대회라서 뻥튀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상이 드러난 것. 얼마 후 K-1측에서도 Dynamite 대회를 미국에 개최하였는데, 당연히 파이트머니가 공개되었다. 대표적으로 많이 받은 선수들이 브록 레스너가 50만 달러, 호이스 그레이시가 30만 달러로 PRIDE보다 얼추 자금력이 나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기서 충격적이었던건 사쿠라바 카즈시의 대전료는 3만 달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내실있게 기반을 다지지 못했고 내부에서부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결국 너무나도 급속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7. 기타

경기 내내 광란의 도가니인 북미와 다르게 일본에서는 관중들이 매우 조용하다. 환호도 야유도 거의 없어서 선수들의 타격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북미 단체의 아드레날린 넘치는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컬처 쇼크를 일으킬 정도. 일본은 프라이드 뿐만아니라 복싱 등 오래전부터 외국인들의 대진에서는 왠지 모르게 매우 조용했었는데 1990년 일본에서 열린 당시 엄청난 인기였던 마이크 타이슨과 더글라스의 경기에서도 미어터질 정도로 굉장히 많은 관중에 비해서 지나치게 조용했었다. 더글라스가 처음 다운될때 까지 그냥 고요하다. #

하지만 일본 선수가 나오면 분위기가 180도 바뀐다. 여기에 실력까지 좋고 프로레슬러이기까지 하면[18] 금상첨화. 또 이 동네도 국뽕이 없는 게 아니어서, 올림픽 메달리스트들도 상당한 리스펙을 받는다. 이 세 가지가 모두 합쳐진실력 빼고 오가와 나오야는 거의 PRIDE의 진 주인공 수준의 엄청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19]효도르마저 블루 코너로 밀어냈을 정도.[20] 꼭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미르코 크로캅이나 반더레이 실바같은 파이터가 나오면 환호가 폭발한다.

유명 선수들이 패배하면 DSE 대표였던 사카키바라 노부유키가 기자 회견에서 "사실 그 선수는 경기 전 40도의 고열과 발목 부상이 있었다" 같은 변명을 해주는 전통이 있다. 실바와 크로캅이 이 전통의 수혜자. 효도르도 경기 전 미리 부상실드를 쳐놓고 시합한 적이 여러번 있다. 사쿠라바 카즈시는 실바와의 1차전에서 지고 나서, 같은 이유의 변명을 언플받은바가 있다. 또한 실바와 퀸튼 잭슨과의 타이틀전에서도 1라운드와 달리 2라운드에서 대역전패를 당하자 퀸튼 잭슨에게 이 변명을 언플해준적이 있다. 모두 다 선수 측 입장을 얘기한게 아닌 주최측의 언플이었다는 것.

다만 이 선수들 중 실제 선수 측에서 몸살이 있었다고 밝힌 사례는 PRIDE 32에서 댄 핸더슨반달레이 실바와의 미들급 타이틀전이 유일하다. 반달레이 실바가 당시 고열과 몸살을 앓고 있는 중으로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경기는 패배했다. 그럼에도 이 경기를 취소할 수 없었던건 DSE가 승부수를 걸고 북미에서 개최한 대회였기 때문에 흥행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출전을 고사시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프랜차일즈 대회의 명칭인 남제(男祭, 영문명 Shockwave)는 "사나이들의 축제"라는 의미로, 일본어로는 "오토코 마츠리"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이게 서구권에서는 동성애자 축제 같은 뉘양스로 들렸다고….

사토 다이스케 프로듀서가 만든 경기 전 선수 소개영상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사실상 프라이드 선수들의 기믹 & 캐릭터는 이 사람이 만든 영상에서 유래한게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 분. 하지만 윤동식같은 경우는 악의적인 편집으로 괜한 일본 안티만 생겼기 때문에 꼭 좋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타카나시 야스하루가 만든 오프닝 테마곡이 장엄한 데다 웅장하고 멋있는 것으로 유명한 명곡이라서 TV 방송이나 인터넷 방송에서 많이들 가져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개그콘서트에서도 자주 사용했다. 또한, 저 오프닝 테마와 함께 시작되는 오프닝 세레모니도 상당히 화려한 편인데 첫 경기 출전 선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등장해 소개를 하는 전통이 있었고 이때 분위기만큼은 지금의 UFC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평이 많다.

경기 이후 백스테이지에서 일어난 일들을 동영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이걸 인터넷으로 일일이 찾아봐야 하는지라 별로 유명하지 않았으나 그 유명한 슈트박스 vs 해머하우스 난투극 사건이후의 백스테이지 영상을 일부 네티즌들이 이 영상들을 번역해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관심있는 유저들은 유튜브에서 'pride Backstage footage'이름으로 검색해볼 것. 단 자막은 일본어이며, 한국어 번역본은 'dh lee'라는 유저가 올려놓은게 몇 개 있지만 많지 않다.

영어 아나운서인 레니 하트의 찰진 선수 소개 멘트가 컬트적인 인기가 있었다.# 포인트는 ㄹ 발음과 등장 음악 장르에 따라 변하는 소개 스타일.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일본식 영어 발음을 섞어서 썼다는 점[21]과 한국 선수의 이름을 성-> 이름 순서대로 호명한 것. 특히나 '최'를 '초이'로 읽지 않았다. 또한 관중들이 이분의 소개 멘트가 끝나기까지 환호를 보내지 않고 기다려준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다.

프라이드 FC에서 심판으로 데뷔해서 이 단체의 간판 심판이었던 인물이 바로 시마다 유지. 그의 행적이 어떤지는 문서 참조.


[1] 당시 UFC 관계자가 비유하기를 사과를 구입했는데, 포장을 뜯어보니 썩은 사과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2] SRC는 스폰서인 돈키호테의 스폰서 철회로(SRC가 출범할 수 있던 것도 돈키호테가 뒤에서 밀어준것이 컸을 정도로 그만큼 중요한 돈줄이었다.), DREAM은 모회사인 FEG의 삽질+파산으로[3] Pride 17 대회에서 톰 에릭슨이 맷 스켈튼을 상대로 손으로 조르는 형태의 초크를 시전하여 승리를 거뒀는데 그 다음 대회부터 바로 금지를 당했다.영상[4] 북미 단체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5] 이러한 룰 덕분에 프라이드 해체 후 나온 가장 큰 떡밥 중 하나가 프라이드 룰 하에서는 레슬러가 힘을 쓸 수 없다였다. 다만 UFC 시스템상 룰 개정이 힘들기에 지금은 많이 묻힌 떡밥.[6] 판정 기준은 레프리가 기브업 사인을 보낸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걸로 일본 선수들과 외국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일본선수가 서브미션 시도를 하면 순식간에 사인을 주고 외국 선수가 서브미션 시도를 하면 좀 기다렸다가 사인을 주는 꼼수가 존재했었다. 대표적인 경기가 미사키 카즈오 vs 데니스 강 전.[7] 다만 선수간 체중이 20kg이상 차이나는 매치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기술이 될 수 있었기에 체중이 덜 나가는 파이터가 스톰핑, 사커킥, 4점 니킥 기술의 허용 여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8] 그렇다고 스톰핑, 사커킥이 컷을 만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마우리시오 쇼군 vs 카네하라 히로미츠와의 경기에서 쇼군이 스톰핑과 사커킥만으로 카네하라의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었다.[9] 이는 바셀린의 도포의 전면적인 금지와도 관련이 있는데, UFC와는 달리 Pride에서는 바셀린을 얼굴에 바르는 것까지도 금지했다.[10] 일단 UFC룰은 UFC 내부에서 정하는 게 아니라 주 체육위원회의 룰을 따르며, 이걸 고치는 것 자체가 높으신 분들때문에 매우 힘들다고 알려져 있다. 결정적으로 사점니킥같은 경우는 되려 레슬러들에게 유리한 룰이 될 수도 있다.[11] 프로레슬링의 대립각본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대립들이 다수 존재했다. 난투극이 연출되었을 정도.[12] 해체 후 실전에서 거둔 승리는 모두 워크라고 본인이 밝혔다.[13] 이건 흥행을 위한게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봐야한다. 당시 PRIDE가 UFC보다 더 컸던데다가 격투기 단체별로 취급하는 체급이 통일화되지 않았다. 즉, 무차별급 → 각 체급 타이틀로 변하는 흐름에서 발생한 과도기로 봐야하는데, 굳이 북미단체들이 만들었던 체급 규정을 맞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15파운드 차이별로 체급이 있어, kg 단위를 쓰는 동양과는 숫자 환산 시 맞지 않는다. 단순히 Pride는 10kg 차이별로 체급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되니 77kg 체급인 웰터급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14] 야마모토 노리후미의 경우 전성기 당시 자기 체중에 맞는 체급이 없었다. 그래서 라이트급까지 증량해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UFC 산하단체인 WEC가 밴텀급, 플라이급의 신설 후 흥행이 되기 시작하며, 야마모토한테 맞는 체급이 생겼다. 그러나 DREAM측은 체급 타이틀이 통일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체급을 만들었는데,오직 야마모토 노리후미를 위한 룰이었다.[15] 2경기를 치렀으며, 카네하라 히로미츠, 오야마 슌고를 상대했다.[16] 크로캅 7억, 실바 4억 등... 격투기 눈팅 오래 하신 분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있는 액수이다.[17] 오죽하면 격투기 커뮤니티에서 하부단체의 제왕이었던 제레미 혼도 프라이드에선 6~7천만원의 대전료를 받는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제레미 혼은 철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실력 좋은 자버였는데, 미국에서 많이 받은게 2만 5천 달러 수준이다. 본인이 셔독 캐스트에서 밝히기를 '그 말이 사실이면 주최측이 마저 줘야할 남은 돈들은 다 어디 있을까?'라고 우회해서 말했다. 한국에서 개최됐던 글레디에이터 FC에서 앤더슨 실바와 경기를 메인이벤트로 치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받은 돈이 일본에서 받은 돈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미국 대회 후 공개된 파이트 머니는 그간 선수들이 대외비로 함구하고 있던 프라이드, k-1의 대전료 뻥튀기 문제에 대해 너도나도 직접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게 되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특히 북미에서 해설을 하며 선수생활을 한 프랭크 트리그는 셔독 캐스트에서 그간 선수들이 자신에게 얘기했던 고충을 대변했을 정도.[18] 프라이드 자체가 프로레슬링 기반으로 시작된만큼 실력이 딸리더라도 프로레슬러들에 대한 기본적인 리스펙트가 형성되어 있어서 인지도가 어느정도 된다면 환호가 엄청나다.[19] 어느정도냐면, 효도르의 소개 영상에서 효도르가 이긴 선수들을 나열할 때 노게이라, 크로캅과 같이 언급됐을 정도.[20] 다만 대놓고 밀어주는 티가 심하게 났으며 실력도 그닥 좋은 편이 아니라서 일본 내에서도 반발이 많았다.[21] 대표적으로 크로캅을 '크로코푸'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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