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속의 평가를 다룬 문서.2. 유비의 평가
마속에 대한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先主臨薨謂亮曰 :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亮猶謂不然,
선주(유비)가 훙(사망)할 때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만 요란하고 실속이 없어 크게 쓸 사람이 아니니 그대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이하 생략)
▶ <마량전>
선주(유비)가 훙(사망)할 때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만 요란하고 실속이 없어 크게 쓸 사람이 아니니 그대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이하 생략)
▶ <마량전>
마속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비가 임종의 자리에서 그에 대해 했다는 위와 같은 말로 요약된다. 즉, 말이 실질보다 앞서니 크게 쓸 자가 못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2.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
-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 : 마속이 제갈량의 최측근이었던 마량의 동생으로 당대에 이미 주목받고 있었다 하나, 실제로 마속이 본격적으로 군정에 두각을 드러낸 것은 제갈량의 남방평정 당시의 일이고, 유비가 마속을 저렇게 평가할 만큼 활동한 바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 유비가 저런 평을 내렸는데 마속이 중용될 수 있었겠는지 여부 : 마속의 실제 능력이나 인성 등이 어떻든 간에 무려 황제가 임종 직전까지 그 사람을 두고 "크게 쓸 자가 아니다"라고 평했는데, 그 평의 대상이 된 자가 중용된다는 것은 그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는 것과 진배 없다. 촉한은 한나라 부흥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건국된 나라였고 게다가 유비는 평범한 황제도 아닌 창업군주였기 때문에,유비 생전은 물론 후주 유선의 시대조차 조정 대신과 장군들이 황제를 어찌 못할 정도로 황제의 권력과 권위가 모두 강력한 편이었고, 제갈량을 비롯한 재상들의 권력 또한 황제의 위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제갈량을 직접 찾아가서 직접 등용한 게 바로 유비다. 또한 제갈량은 유비 사후 어쩌면 정적에 가까웠던 이엄과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다. 선제가 중용할 인재가 아니라고 특별히 거론했던 신하를 고명대신 중 한 명이 함부로 중용한다는 것은, 유비의 고명을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제갈량으로서는 심각한 리스크를 부담하는 일이다.
- 문제는 정황이 명확하지 않다는 거다. 습착치와 같은 인물의 비판은 후세의 평가일 뿐이다. 당시 촉한 내부가 마냥 제갈량에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속에 관한 비판은 그가 제갈량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지, 그를 기용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1] 오히려 장완이 "아까운 인재를 성급하게 죽인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할 정도다. 제갈량이 스스로 벼슬을 깎아 사죄했다곤 하나, 이엄이라는 잠재적 정적이 존재함에도 제갈량의 실권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므로 마속의 기용 건으로 정치적 타격이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문제들을 감안한다면, 이른바 '유비의 평가'는 당대의 기준에서 볼 때 후세의 시각에서 해석되는 것처럼 마속에게 비판적인 것이었다고 보기 어려웠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리도 후대에 널리 알려졌기에 그 근거가 희박하지만 유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뭐 없지는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마속이 당시 유비가 따로 평가를 내리거나, 제갈량이 선제의 유명을 무시한다는 모험을 걸 정도로 거물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이다. 마량 형제에 대한 의리 때문에 선제의 유명을 무시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인정에 치우쳐져 정치가 제갈량을 간과하는 구석이 있다. 유비의 유고가 본디부터 널리 알려졌는지, 마속 사후 비로소 알려진 건지도 불분명하다.
- 유비도 마속 못지 않은 병크를 저질렀는데, 바로 이릉대전이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장비도 살해당한 와중에 제갈량을 비롯한 책사들이 사잡아 말릴 정도로 무모한 짓이라고 경고했는데도, 유비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릉대전을 강행했다. 그 결과 온갖 촉한의 무장들이 위 또는 오로 항복하는 결과를 맞이했고,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즉, 유비는 아무리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날지 몰라도 마속을 함부로 평가할 처지가 못된다. 어떻게 보면 유비는 말년까지 수습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무리한 행보로 인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고, 모든 것을 제갈량에게 다 맡기고 갔다. 따라서, 유비도 마속 못지 않은 대형 삽질이 있음에 따라 과연 마속이 진짜로 인재가 아니었는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다.
2.2. 반론
- 일단 마속이 두각을 드러낸 것이 남방 평정부터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주장이다. 정사를 보면 마속에 대한 기록은 마량전 끝에 부록마냥 덧붙여져 간략한 출세 과정과 기산 출병에 대해 기록된 것이 전부이며, 여기에 양양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갈량에게 남방 평정에 대한 조언을 한 것이 마속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즉, 마속에 대한 실질적인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 위의 주장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기록을 근거로 실제 존재하는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이 마속을 신뢰했다는 기록이 실제 있기에 평소 유비가 이를 우려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2]
- 위의 '유비가 마속에 대해 따로 평할 이유가 있었는지 여부'는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전에는 마속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한 바도 없다가 그 시점에 갑자기 마속 이야기를 꺼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선 유비가 특별히 마속에 대해서만 말했으리라는 법은 없다. 유비는 이릉대전 다음 해에 병사한 것이지 이릉대전의 상처로 바로 사망하거나 한 것이 아니므로 전반적인 국정 운영 등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즉 충분한 시간을 들여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마속도 언급된 것일 수 있다.[3] 마속은 유비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했다가 기록적인 실패를 겪은 특별한 경우라서 기록에 남은 것이지, 마속만을 언급했기 때문에 마속에 대한 언급만 기록에 남았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설령 마속만 별도로 언급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릉대전 이전에도 당연히 제갈량 등과 인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것이므로, 과거에 마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견이 어긋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마음에 두고 있다가 따로 이야기할 이유가 된다.
- 유비가 사망할 당시에 갑자기 마속에 대해 몇 마디 남겼다는 것은 가능하긴 하다. 유비는 백제성에서 일종의 칩거 상태였기 때문에 제갈량과 대화를 나눴을 시간이 적었을 수 있고 평소에 마속에 대해서도 별 말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설령 유비가 마속 하나만을 집어서 얘기했다 하더라도, 유비는 인물평만 남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착한 일이 작다고 행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고 나쁜 일이 작다고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은 너무나 아름다운 말이나 사실상 범인에게는 실현이 불가능한 말이다. 이와 같이 유비의 유고를 전부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유비의 유고들도 논리적이지 않거나 평소 유비의 언동에서 드러나지 않았다거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해 보이는 일을 삼가는 것도 어색한 일이다. 마속의 당시 나이를 생각해볼 때, 유비의 평가를 아직 미숙하니 큰 역할을 맡기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한 가능하기는 하나 밑바닥 신발장수에서 나라 하나를 세운 대영웅이 죽기 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길 말치고는 너무나 조잡스럽고 중요도가 떨어진다. 유비가 그때 남긴 말들의 중요도가 대단히 높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이와 같은 전제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해석은 유비의 유고가 여러 가지였기에, 여러 유고 가운데에서 마속에 대한 발언은 유비 본인이 툭 던지는 식으로 얘기했다든가 하는 형태라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해석했을 가능성이다. 유비 입장에서는 평소에 자신의 사후 제갈량의 성향상 마속을 중용할 것 같은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근거가 어렴풋하고 직관적이라 잘 전달하기 어려웠다면 유고의 형식으로 몇 마디나마 전달해 두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 유비는 어디까지나 마속을 크게 쓰기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보았지,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니 등용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니다. 또한 크게 쓰지 말라는 막연한 표현일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느 이상의 권한을 주지 말라 지정한 것도 아니었다. 황제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한 사람을 이후에 재평가해서 등용한다고 해서 황제의 뜻이 무시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실제로 유비의 유고만을 근거로 한창 일할 청장년의 벼슬길을 제한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좀 이상해 보이기 때문이다.[4] 능력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그보다 적임자가 없다면 당연히 쓸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능력을 완전히 신임하지는 않았는데 그 증거가 바로 정사에서 언급되는 "마속이 제갈량의 절도를 어기고..."이다. 즉 제갈량은 단순히 마속에게 "알아서 수비해라"고 가정의 수비를 맡긴 게 아니라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는 말이다. 따라서 실제 제갈량은 마속의 능력 및 경험 부족을 감안하여 행동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시했으며 왕평을 부관으로 삼아 나름 대책을 세웠으나 마속의 성격 때문에 최후의 보험장치까지 해제되었고 당연히 이는 생전의 유비조차도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 이엄은 제갈량과 실제로 대등한 위치였다고 볼 수 없다. 이엄은 본래 유비의 부하가 아닌 유장의 휘하였으며, 유비가 죽기 직전 그를 상서령에 임명하기 전까지 그의 위치는 건위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제갈량은 형주 시절부터 유비를 보좌하여 이미 유비가 입촉하기 전부터 장사, 계양, 영릉의 3군을 진수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 당시 유비군 내에서 그와 견줄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은 오직 관우 뿐이었던 데다가, 여기에 제갈량은 유비가 황제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승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즉 애초에 유비의 유언으로 고명대신이 되기 이전부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세력의 2인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를 견제할 수 있는 관우나 장비, 법정, 마초, 황충, 황권과 같은 인물들은 각각 형주 공방전에서 전사, 암살, 병사, 위나라에 투항해버린 상황이었다. 반면 이엄은 파촉의 기존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그 이전에도 법정이나 유파, 황권과 같은 인물들이 그보다 먼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을 받아 왕의 작위를 얻으라고 권유한 바가 있는데, 이는 당시 제갈량의 권력이 불안정한 상황이었거나 둘의 위치가 동등한 상황이었다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외에도 파주 창설이나 관부의 설치 등을 요구하는 대상이 제갈량이었음을 볼 때 둘의 위치는 분명 제갈량이 위가 맞다. 즉, 이엄은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제갈량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였을 뿐 마속의 기용 문제만으로 둘의 위치가 한순간에 바뀔 만한 상황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은 가정이 성립되려면 먼저 제갈량의 기반이 불안한 상태여야 성립되는 법인데, 기록상으로 제갈량의 정치 기반이 불안한 상태였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5]
3. 능력
기본적으로 마속은 참모나 보급장교라면 큰 그릇이나 야전 지휘관이라면 작은 그릇이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건 몰라도 인재를 보는 눈만큼은 득도한 유비의 말이다. 다만 참모로 일할 때는 나름대로 괜찮은 조언도 했고, 제갈량이 병법도 논하며 신임했다는 것을 보면 참모로는 적어도 평균치 이상은 했을 것이다.[6] 가정에서 거하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야전 사령관과 참모는 임무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7] 그런데 참모도 결정권이 없을 뿐, 무조건 작전지휘와 담을 쌓는 게 아니라 전황을 제대로 파악해서 작전지휘에 대한 조언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 지휘관 대신 지휘를 하기도 한다.[8] 따라서 마속이 가정에서 설령 참모직을 맡아도 군사를 산 위에 주둔시켜야 한다는 헛소리나 했을 것이며, 그나마 마속이 활약할만한 분야는 비서나 행정 등일 것이다.직접 군사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아니라 사령관에게 조언이나 해주거나 옆에서 상관을 보좌하는 역할만 했으면 그럭저럭 활약했을지도 모를일.제갈량은 형제처럼 가까웠던 마량에 대한 옛정 이외에도 마속에게 나름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에게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보고는 가정을 중요 포인트로 삼아 위군이 오는 방향에 따라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가정 전투에 파견한 것으로 그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실적을 올릴 계획까지 지참해주고 부장을 주르륵 딸려주고[9] 여러 부대를 따로 인솔하게 해 마속을 선봉으로서 가정에 투입했다. 이때 병력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진춘추에 나오는 "기산과 기곡 양쪽에서 아군의 수가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위는 오와의 전선에 신경쓰느라 촉을 상대하는데 많은 병력을 투자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북벌 초기에는 촉이 병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또한 마속의 대패로 촉군은 왕평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서현의 1천호의 백성들을 데려와도 피해가 복구가 안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니 원래 데려갔던 부대 규모도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때 제갈량 곁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촉한은 이릉대전 몇년 전부터 관우, 황충, 장비 등의 일급 사령관들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고 이릉에서는 황권과 제갈량의 의형제로까지 추정되는 마속의 형 마량을 잃었기 때문에 재능이 보였던 마속을 기용하는건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던 것. 적극 가정에 갈 다른 후보 중에 조운은 조진과 대치하고 있으니 제외, 주변에서는 위연과 오의를 가정으로 돌리라고 권했지만 그럴 경우 그들의 빈자리를 마속이 메워야 하고, 가정에서 막는 동안 농서지역을 장악하는 더 어려운 임무가 마속에게 주어진다.[10] 3군이 호응했다고 하지만 민심이 쏠렸다는 것이지 관리들까지 죄다 문열고 투항한 게 아니다. 특히 위의 명장 곽회가 필사적인 노력으로 농서 지역을 촉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저지했다. 우선 신속하게 상규의 곽회를 제압해서 천수, 남안을 완전히 장악해 촉군이 옹양주에 머물곳을 만드는게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한진춘추의 저자인 습착치는 마속을 인재라 평하며 비록 실패했으나 그를 처형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반박했다. 유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했던 것은 그만큼 마속이 능력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안그래도 인재가 부족한 작은 나라에서 그런 인물을 없앤 것은 스스로의 힘을 깎아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참고로 습착치는 촉한정통론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아무리 한 개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집단을 통솔하는 원칙과 규율보다도 중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처형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당시에는 마속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의견이 있었다.
“제갈량이 상국(上國-위나라)을 겸병하지 못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릇 진나라는 순임보를 살렸으니 폐법(廢法)하여 공을 이루었고, 초성왕은 득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를 죽이고 거듭 패배했다. 이제 촉은 궁벽한 한 귀퉁이의 나라로 인재가 상국보다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고 물러서서 어리석은 자를 거두어 쓰니 명법(明法)을 인재보다 중히 여겼던 것이다. 이는 삼패지도(三敗之道)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장차 대업을 이루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았겠는가! 또한 선주(유비)가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고 경계했지만 어찌 마속이 인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으리? 제갈량이 유비의 가르침을 받들고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 마속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천하의 재상으로 큰 공을 세우려 하면서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제한하지 않고 그 그릇에 따라 일을 맡기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 허물이 있었다면 주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고, 능력을 헤아림에 실수가 있었다면 유익한 인재를 죽인 꼴이다. 이를 두고 보면 (제갈량을) 지혜로운 자라 말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습착치
습착치
그런데 마속이 단지 패군지장이라 처형당한 게 아니라 정사 상랑전의 기록대로 도망가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때문에 이런 견해도 있다.
"이를 살펴본즉 마속은 군사가 패하자 도망하였고 후에 다시 잡아들이니 하옥(下獄)되어 죽은 것이다.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쳐 본래 취할 바가 없었다. 또한 제갈량의 절도(節度-군사 명령)를 어겨 군사를 잃는데 이르렀으나 복죄(伏罪)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尙) 멀리 도망갔으니,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는 가르침을 어겼으매 제갈량이 그를 주륙(誅戮)한 것은 심히 마땅하거니와 습착치(習鑿齒) 등이 제갈량이 잘못 형벌을 내렸다라고 기록한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다.
사사발복(四史發伏)에서 홍량길(洪亮吉)[11]이 말함
사사발복(四史發伏)에서 홍량길(洪亮吉)[11]이 말함
또한 명나라 시대 학자인 왕세정도 다음과 같이 습착치의 견해를 비판했다.
마속이 이야기한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이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사로 싸우는 것이 하책이니, 비록 태공, 손무가 법을 만들어도, 누가 이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합은 일개 기장(騎將)으로, 익덕의 얕은 꾀로, 그를 단절시키기에 넉넉했으나, 마속은 공명의 정비된 군을 부리고도, 한번 싸우곤 꺾이고 무너져,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했으니, 이가 마음으로 싸운다는 견해로, 천한 선비가 주의를 기울여 살펴 가정이 흔들리고 패한 것이다. 공명이 미처 유생을 모두 떼어놓을 수 없었음이 옳고, 마속을 경솔하게 믿어 그를 크게 기용했다가, 그 후 마속을 주살했음이 옳다. 습착치는 공명이 그가 주살됨은 얻었으나 그가 주살될만한 까닭은 얻지 못했다고 논했다. 위연, 오의는 쓰일 수 있었으나 쓰이지 않아, 그들의 불평이 오래 지속됐다. 진실로 마속을 아껴 주살하지 않았으면, 무엇으로 복종시킬 것이고, 자신만이 옳다 여겨 다시 법을 그르치는 이는, 무엇으로 장차 법을 행할 것이며, 장차 법을 행하더라도 무리의 의견은 뒤섞여 어지러워져 사태가 엉클어질 것이고, 법을 행하지 않으면 군기는 와해돼 부진할 것이다. 마속은 청담이나 떠드는 선비인데, 어찌 성득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순림보(荀林父)가 사면돼 진(晉)이 패국(覇國)이 됐으나, 성득신이 주살됐어도 초(楚)가 굳셈을 해하지 못했으니, 그런즉 초 또한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거듭 상랑전을 고찰하니,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갔는데, 상랑이 본디 마속과 친해, 마속이 도망가나 상랑이 사정을 알고도 알리지 않아, 제갈량이 이를 한스러워하여 면관시켜 성도로 돌려보냈으니, 그런즉 마속 또한 도망갔던 것이다. 바로 사형하지 않고 사패(司敗)가 찾은 이후에야 그를 잡았으니, 주살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가?
왕세정(王世貞)[12]의 독서후(讀書後) 서마속전후(書馬謖傳後)
왕세정(王世貞)[12]의 독서후(讀書後) 서마속전후(書馬謖傳後)
또 속후한서를 지은 학경은 습착치의 평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량이 장완(蔣琬)의 말에 대답한 것을 살피건대, 성심(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평한 도리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밝히고 법을 세우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규범이 되는 것이니, 습착치가 제갈량을 지적하여 법을 폐하여 재주 있는 이를 보전(保全)함이 마땅하다 말한 것은 잘못이다.
4.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강유가 촉에 합류해서 제갈량의 가르침을 받게 되자, 마속이 자신의 입지에 위기를 느껴서 강유를 질투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실제로 근, 현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는 이런 식으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13]이러한 이야기는 연의에서 묘사된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강유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연의에서 강유는 등장부터 천수 전투에서 적수가 없고 거의 신선이나 신 급으로 묘사되는 천하의 제갈량을 계책으로 한 번 이기고 오호대장군중 한명인 조운과의 일기토를 벌여 제갈량에게 큰 임팩트를 심어준다. 이후 제갈량은 강유를 사로잡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며 조위의 부마인 하후무까지 풀어주는 등 공을 들여 강유를 얻으며 평생 깨우친 것을 물려줄 자를 얻었다고 기뻐하며, 제갈량의 기대에 부응하듯 강유는 천수성을 화살 한 대로 얻는 공을 세우고 대 조진전, 대 강족전에서도 활약한다. 마속은 이 모습들을 모두 보고 난 후에 사마의가 재등판하자 가정을 지키러 갔다가 대패한다. 마속과 강유 둘 다 당시 젊은 인재로 묘사되었고 제갈량이 큰 기대를 걸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마속이 강유에게 제갈량의 으뜸가는 총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정에서 무리수를 두었다는 추측이 나올 법 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강유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상관인 태수 마준에게 기현 출신이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아 버려졌고, 이후 기현 주민들의 대표격으로 촉군 진영에 가서 항복 협상을 진행하다가,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참패당해서' 촉군이 퇴각하게 될 때 함께 가면서 귀순했다. 당연히 강유가 군사를 지휘해 촉군과 전투를 치른 일은 한 번도 없었고, 1차 북벌 당시 촉군을 위해 공을 세우거나 촉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만한 일 자체도 전혀 없었다. 애시당초 마속과 강유가 서로 만난 일조차도 한 번도 없었을 확률이 크다. 마속이 도망치다 붙잡혀 왔을 때 서로 얼굴 도장이나 한 번 찍었을까.
게다가 촉군 내에서의 입지를 따져 봐도 강유는 마속이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말고 할 짬이 되지 못했다. 마속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촉 진영 내부에서 꽤나 촉망받는 인재였고 제갈량에게도 상당히 신임받고 있었던 반면, 강유는 이제 막 들어온 항장이고 나이는 서른도 안 된 햇병아리였으니[14][15] 당시 그의 입지는 마속이 라이벌 의식을 느낄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설령 강유가 촉나라에서 촉망받았더라도 마속 입장에서는 본인 다음 세대를 맡을 뛰어난 인재이지 본인의 직접적인 라이벌은 아니었다. 당장 위에 왕평이 아직 짬이 낮아 마속 대신 대장을 할 여지가 없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강유는 그보다도 아래였고 실제로 왕평 사후에야 촉의 총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16]
[1] 위연과 오의라는 대안이 이미 제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두 장군은 1차 북벌 당시 그 역할 자체가 불분명하다. 마속이 성공한 뒤의 다음 작전에 투입하려고 했는데 마속이 말아먹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퇴각한 거라는 설도 있지만 뒷받침되는 사료가 없어서 추측의 영역.[2] 유비와 제갈량의 사이가 수어지교로 비유될 만큼 워낙 가까웠던 만큼 제갈량이 자주 만나고 아꼈던 사람들을(그들이 현재 중임을 맡고있던 아니던) 유비가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3] 마속의 형이자 제갈량과는 의형제 같은 사이인 마량은 유비의 명에 따라 촉한과 무릉만이의 동맹을 위한 외교관으로 종군했다가 촉에게 전황이 불리해진 뒤 뚜렷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이유로 죽었든 이릉대전으로 인해 사망한 마량과 그의 유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마속이 언급됐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4] 당장 제갈량의 후계자 장완은 본인 잘못으로 유비한테 밉보여서 한때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유비 사후 제갈량이 다시 데려다 놓고 기용해서 재상 자리까지 물려받았던 사람이다.[5] 제갈량은 실제로 가정전투의 패배로 우장군으로 자진 강등하였고, 3차 북벌의 성과를 바탕으로 승상에 복귀하였으나, 우장군 시절에 이엄이 제갈량보다 권위 상 위였다는 근거 역시 없다.[6] 마속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중 하나가 양양기의 '공심위상'. 남만을 정복하러 가는 제갈량에게 "용병의 대원칙은 적의 마음을 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심리전이 상책이고 군사로 싸우는 전투는 하책입니다(夫用兵之道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 그러므로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일화.실행이 쉽냐고 물으면 또 다르지만 정말로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라 안 할 수 없고 이렇듯 제갈량에게 조언을 하는것만 봐도 나름대로 식견이 있던것으로 보이다.[7] 이에 대해서 차라리 왕평을 부장이 아닌 총대장으로 쓸 수도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당시 왕평은 참군이었던 마속에게 소속되어 선봉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낮은 직급이었던 데다가, 항장이라 내부입지가 적을 수밖에 없는(훗날 강유도 제갈량-장완 라인을 탔음에도 중앙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못 썼다) 왕평을 아무 이유없이 하루 아침에 승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제갈량이 마속에게 군사적 식견이 뛰어난 왕평을 붙여준 것만 해도 그의 꼼꼼한 성격을 볼 수 있다. 이후 왕평을 중용한 것도 그가 군사적 식견을 통한 실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8] 실제 삼국지에서 참모의 조언에 따라 부대가 산에 올라간 사례가 있다. 이쪽은 제대로 판단해서 오히려 성공한 사례인데, 참모 역시도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9] 상대 장군인 장합조차도 중요 부장으로 비요만 확인되는 정도인데 마속은 이름이 확인되는 부장만 4명이다. 아무리 허접해 보여도 역사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 인물은 능력이든 명성이든 뭐 하나는 무명 장수들과 차별화되는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봐야 한다.[10] 그런 의미에서 후일 자신의 후계자인 장완에게 강유를 소개시켜 주어 그가 장완을 군사적으로 도와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마속에게도 군사적인 조언을 해줄 부장을 붙이면 마속이 그 역할을 다해주고 향후 마속의 중요 측근으로 마속을 보좌하는 역할로 왕평을 제갈량이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왕평은 충분한 조언을 해줬으나 마속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지만.[11] 산문 및 사륙문(四六文:騈文)에도 능했던 청나라의 문인 겸 학자. 변문팔대가(騈文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경학(經學)·역사지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요 저서에는 《홍북강전집(洪北江全集)》,《권시각집(卷施閣集)》등이 있다.[12]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後七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학식은 그 중에서도 제1인자였던 중국 명나라의 문학자. 명대 후기 고문사(古文辭)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격조를 소중히 여기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에는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考)》등이 있다.[13] 삼국지 공명전,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에서의 마속은 클론 무장이긴 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평이나 진지 대화 등을 통해 마속이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며 진삼국무쌍 BLAST에 레어 등급으로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플레이어블로 참전하여 강유와 라이벌 기믹을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14] 강유는 202년생, 마속은 190년생으로 12살 차이가 나는 띠동갑이다. 228년에는 각각 27세, 39세.[15] 나이나 경력을 비교한다면 장완과의 비교과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장완과 마속 모두 유비의 입촉 시기부터 활동하였으며 입촉 이후 비슷한 시기에 현령, 현장을 역임하였다. 장완이 227년 참군으로 승진한 것과 마속이 1차 북벌 당시 참군을 역임하고 있던 것을 본다면 두 사람의 경력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16]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으로, 제갈량이 죽고 무려 22년이나 지난 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