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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바조/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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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베르토 바조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ACF 피오렌티나

고향 비첸차를 연고로 하는 비첸차 칼초의 유소년 팀을 시작으로, 1983년 6월 5일[1] 세리에 C 경기에서 성인팀에 데뷔했다. 1984-85 시즌엔 12골을 넣으며 활약하면서 팀이 세리에 B로 승격하지만, 1985년 5월 오른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2][3]
파일:바조 피오렌티나 시절.jpg
그런데 그런 큰 부상중임에도 바조는 그 해 여름에 당시 세리에 A 리그 팀인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재활을 마치고 1986년 1월 복귀한 바조는 컵 대회로 복귀를 알렸고, 가을에 리그에 정식으로 데뷔 했는데 곧장 무릎 부상 재발7개월 결장.

20살도 되지 않은 바조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치명적인 부상을 2번이나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채 끝나리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의학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그런 우려들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조는 '경기를 뛰고싶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며 재활에 성공, 1987-88 시즌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세리에 A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알리게 된다. 바조의 첫골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던 나폴리를 상대로, 강등권 위기에 쳐해있던 피렌체를 구해내는 값진 골이었다.

이듬해인 1988-89 시즌, 21살의 바조는 40경기에 출전하며 24골을 기록하며 기량이 폭발하기 시작하며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되었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슈퍼스타로서 착실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3. 유벤투스 FC

이 활약으로 인해 그는 1990년, 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며 150억 리라[4]의 금액에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바조는 사실 이적을 원치않았고 큰 부상에도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피오렌티나에 대해 큰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나[5] 당시 피오렌티나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때문에 결국 이적하게 된다.[6]
파일:바조의 유벤투스 시절.jpg
유벤투스에서 미셸 플라티니의 10번[7]을 이어받은 바조는 매년 20골 이상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인다. 특히 1992-93 시즌 리그와 대회를 통틀어 30골, 1993-94 시즌엔 22골을 기록했는데, 시즌이 아닌 연도 즉 199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39골을 넣으며 절정기를 누렸다. 특히 1993년 UEFA컵[8] 결승전 당시 1,2차전을 통틀어[9] 2골을 넣어 유벤투스에게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안겨준 활약으로 해당 년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옹즈도르, RSSSF 올해의 선수,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를 모두 휩쓸어버린다.
파일:바조 발롱도르.jpg
발롱도르를 수상한 바조
그러나 바조는 월드컵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 이후 크나큰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마르첼로 리피가 유벤투스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개적으로 바조가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주전 자리를 차츰 앗아갔다.

설상가상 그해 11월 무릎 부상 재발로 뛰지 못하는 동안, 하필이면 리피가 직접 데려온 델 피에로가 훌륭히 빈자리를 메꾼다. 1994-95 시즌 막바지에 복귀한 바조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보지만, 팀에서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고 결국 전력외 판정을 받고 팀을 떠난다.

4. AC 밀란

파일:바조의 AC 밀란 시절.jpg
이때 인테르으로 이적한다는 루머가 파다했지만 결국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는데, 파비오 카펠로 감독 역시 판타지스타 바조를 탐탁지 않게 여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5-96 시즌 밀란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유벤투스 때와 같이 바조가 우승에 기여한 바는 미미했다. 다음해 카펠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를 맡으면서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결국 아리고 사키 감독이 들어온다. 사키 감독은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는데, 노르웨이전에서 골키퍼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자 후보 골키퍼 루카 마르케지아니를 투입하기 위해 바조를 벤치로 불러들이며 바조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인물이었다.

1996-97 시즌 밀란은 리그 11위를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사키 감독을 경질했는데 후임으로 카펠로 감독이 다시 왔다.

5. 볼로냐 FC

파일:바조의 볼로냐 시절.jpg
결국 카펠로 감독에게 전력외 통보를 받은 바조는 볼로냐 FC로 이적, 1997-98 시즌 리그 30경기 22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전히 볼로냐 감독과 불화를 겪었다.

6.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파일:바조 인터밀란 시절.jpg
19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바조의 건재함을 확인한 인테르가 오퍼를 넣어, 바조는 등번호 10번을 받고 이적한다. 그리고 이때 인테르에 호나우두가 있었다. 축구팬들은 신구세대 최고 공격수 두 사람이 환상의 투톱을 이룬다고 기대와 설레발을 떨었으나 정작 호나우두가 부상크리(…). 이 무렵 인테르는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애먼 감독 모가지만 연달아 날렸는데, 결국 작심하고 데려온 승부사가… 마르첼로 리피 감독.[10]

7. 브레시아 칼초

파일:바조의 브레시아 시절.jpg
결국 바조는 2000년 들어 무소속이 된다. 사실 아직도 슈퍼스타였던 바조를 원하는 해외팀들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목표인 2002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려면 세리에 A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그는 결국 2000년 9월 브레시아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계속한다. 33살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00시즌을 앞두고 막 1부 리그로 승격한 작은 팀으로의 이적을 바라보는 팬들의 반응은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브레시아에서 바조는 마지막 축구인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탁월한 감각은 변함없어 매 시즌 꾸준히 10골 이상을 넣는 페이스를 보이며 최약체 브레시아를 리그 8위로 올려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월드컵을 코앞에 둔 2001년 10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개월 결장. 재활을 거쳐 다음해 1월 복귀했지만 통증 재발로 끝내 수술대에 오른다. 회복까지 최소한 넉달은 넘게 걸린다는 예상이었지만, 바조는 기자들에게 "나는 기적을 믿는다."고 담담히 밝힌다. 그리고 77일 만에 시합에 복귀했다. 복귀한 김에 두 골을 넣었다.

그러나 그의 불꽃투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트라파토니 감독은 바조의 몸 상태가 100%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대표팀에 뽑지 않았고 월드컵의 꿈은 좌절되었다.[11] 그리고 이탈리아는 대한민국에 일격을 맞고 16강 탈락.

월드컵이 끝난 뒤로 줄곧 리그에 전념, 세리에 A 400경기 출장과 통산 200골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즌이던 2003-04 시즌, 바조는 37살의 나이에 무릎 수술, 요통으로 장기간 결장하는 등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시즌 26경기 12골 11도움을 기록하며, 도움왕이자 시즌 평점 1위라는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5월 시즌 마지막 경기 AC 밀란 원정경기에서 8만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브레시아에서는 그를 기리며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의 긴 여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 때문에 1982-83 시즌 데뷔로 표기할 수도 있다[2] 이 부상은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히게 된다.[3] 사실, 십자인대 파열은 바조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이 당해도 쉽사리 재활을 끝내기 어려울 뿐 더러 부상 부위가 재발 위험이 크기 때문에 언제든지 경기 도중 경기장 밖으로 실려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나우두이다.[4] 당시 1900만 달러 정도. 2009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억 3천만 달러 가량.[5] 유벤투스 첫시즌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한 PK를 거부한 바 있다. 또한 이 경기에서 그는 교체아웃 될때 피오렌티나의 스카프를 들고 피오렌티나 팬들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갔는데, 유벤투스 이적 초반 피오렌티나 팬들은 바조에게 야유를 퍼붓었지만 이 이후로는 그럭저럭 레전드 대우를 해주게 된다. 물론 유벤투스 팬들은 이런 행동을 그렇게 달가워 하지는 않았지만 얼마안가 바조의 퍼포먼스에 매료되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6] 여담으로 이 무렵 피오렌티나는 10년전 석연찮은 판정으로 리그 우승을 유벤투스에 뺏긴 앙금이 남아 있는 숙명의 라이벌이었는데, 하필 이틀전 UEFA컵 결승에서 유벤투스에 패해 적대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현질로 에이스를 빼간다고 염장질을 해대니, 팬들의 폭동으로 5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진압을 위해 경찰까지 출동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도 피렌체는 이탈리아 전국에서 유벤투스 팬클럽 지부가 없는 유일한 도시다.[7] 유벤투스의 10번은 아주리 군단의 핵심 공격수라는 공식이 있었다. 이 공식을 깬 유일한 인물이 AS 로마프란체스코 토티였다. 다만 델피에로 이후엔 테베즈, 포그바 등이 유벤투스 10번을 맡아 이 공식이 깨진지는 10년도 넘었으며, 당장 최근 우승한 유로 2020의 10번은 인시녜였던만큼 더이상 유효한 공식이 아니다.[8]UEFA 유로파 리그[9] 당시 UEFA컵 결승전은 홈&어웨이 2차전이었다.[10] 바조에게는 불행이었겠지만, 리피, 카펠로, 사키 모두 손꼽히는 명장들이다보니 빅 클럽이 안풀릴 때마다 불려오는 일이 잦았다.[11] 이때 바조의 반응도 걸작인게, 자기가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일체의 인터뷰도 끊은 채 두문불출했다. 물론 한창 회춘모드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바조에게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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