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7-20 18:28:58

로버트 스미스(가수)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로버트 스미스
Robert Smith
파일:로버트메인1.png
본명 로버트 제임스 스미스
Robert James Smith
출생 1959년 4월 21일 ([age(1959-04-21)]세)
영국 블랙풀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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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가수, 작곡가
소속 더 큐어 (1972 - 현재)
수지 앤 더 밴시스 (기타, 1979, 1982-1984)
장르 포스트 펑크, 고딕 록, 얼터너티브 록
종교 무신론
서명 파일:로버트싸인.jpg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3. 스타일4. 여담

1. 개요

포스트 펑크 록 밴드 더 큐어의 프론트맨, 리드 보컬, 기타리스트, 주요 작곡가이자 유일하게 계속해서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영국의 음악가.

로버트의 기타 연주 스타일, 노래 목소리, 패션 스타일은 1980년대에 유명해진 고스 하위 문화 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때 수지 앤 더 밴시스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2. 생애

파일:로밧1.jpg

1959년 4월 21일 잉글랜드 블랙풀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리타 메리와 제임스 알렉산더 스미스로, 4남매 중 셋째였다.

아버지는 노래를 즐겼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등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랐으며, 유년기에는 가톨릭 신앙을 따랐지만 이후 무신론자가 되었다.

세 살 때 가족이 호를리로, 여섯 살 때는 크롤리로 이사하였으며, 세인트 프랜시스 초등학교와 주니어 스쿨을 거쳐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노트르담 중학교, 이후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세인트 윌프리드 종합학교에 재학했다.

그는 어릴 적 여동생 자넷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으며, 자넷이 피아노 천재로 불릴 정도였기에 경쟁심에 기타를 잡게 되었다고 밝혔다.

1966년 일곱 번째 생일 무렵, 형 리처드에게 기타의 기본 코드를 배웠고, 아홉 살부터는 클래식 기타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으나 점차 흥미를 잃고 독학으로 전환하였다.

정규 수업을 그만두고는 형의 음반을 들으며 귀로 익혔으며, 13~14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록 음악에 빠져들었고,

당시에는 자신의 기타가 없어 형의 기타를 빌려 썼다가 1972년 크리스마스에 기타를 선물받게 되어 더욱 음악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버트가 다녔던 노트르담 중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고, 이를 악용해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로버트는 한 번은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등교했으며, 교사들은 이를 단순한 성장기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으나, 하교길에 다른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적당히 시험만 통과할 만큼 공부했고, 선생님을 잘 속이면 특별한 학생처럼 보일 수 있었다고 밝혔다.

파일:로밧2.png

이후 진학한 세인트 윌프리드는 노트르담보다 훨씬 엄격한 분위기였으며, 1975년 O레벨 시험 이후 그는 마이클 뎀프시와 함께 6학년에 진학하였다.

1976년 말, 자신이 소속된 밴드 말리스의 공연이 학교에서 열렸고 이로 인해 소동이 발생하자, 그는 학교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이라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단순 정학이었으며, 종교관이나 교장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는 상반된 진술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함께 공연했던 동료 마크 체카뇨도 퇴학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는 이후 복학하여 생물학, 불어, 영어 세 과목의 A레벨 시험을 치렀고, 생물은 낙제, 불어는 통과, 영어는 B등급을 받았다.

이후 약 8~9개월간 실업수당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다 지급이 중단되자 데모를 제작하기로 결심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1. 음악 경력

로버트 스미스는 10대 시절 형 리처드, 여동생 자넷, 그리고 형의 친구들과 함께 ‘Crawley Goat Band’라는 이름의밴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중학교 재학 중 동급생들과 함께 결성한 ‘Obelisk’는 훗날 더 큐어로 이어지는 초기 형태로, 로버트는 당시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후 세인트 윌프리드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동료들과 ‘The Group’이라는 이름 없이 활동하던 시기를 거쳐, 1976년경부터는 ‘Malice’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파일:이지큐어.png
이지 큐어 멤버들, 왼쪽에서 2번째가 로버트.

Malice는 멤버 교체와 음악적 방향 전환을 거치며 ‘Easy Cure’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역 펍 공연을 통해 팬층을 확보해 나갔다.

보컬 포지션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고, 초기 데모 테이프에 참여했던 피터 오툴이 탈퇴한 뒤로는 자연스럽게 로버트가 프론트맨을 맡게 되었고,

공식 데뷔는 1979년, Three Imaginary Boys를 발매하며 더 큐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2.2. 더 큐어

파일:로밧큐어.gif

로버트는 처음부터 더 큐어의 리드 보컬을 맡을 계획은 없었다.

초기 밴드 오벨리스크 시절에는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며 백그라운드 멤버에 가까운 위치였고,

이후 밴드가 ‘The Group’과 ‘Malice’를 거쳐 정기적으로 리허설을 시작하던 1976년 초에도 고정 멤버로 자리 잡지 않았다.

밴드는 당시 리드 보컬을 고정하지 못한 채 여러 명을 교체했고, 1976년 말에는 지역 언론사 기자 마틴 크리시가 보컬로 합류했지만 공연 평가가 좋지 않아 곧 탈퇴했다.

이후 몇 차례의 멤버 변화를 거쳐 피터 오툴이 보컬로 정착하며 지역 펍 공연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고, 데모 테이프를 통해 한사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77년 10월, 런던의 사운드 앤드 비전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하기 전 오툴이 탈퇴하면서 로버트가 보컬 역할을 맡게 되었다.

로버트는 자신이 보컬을 맡게 된 이유에 대해 “다섯 명의 보컬을 거쳤지만 모두 형편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부르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본인의 목소리를 싫어했지만, 그보다 나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을 더 이상 찾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작곡 측면에서도 초기에는 멤버 전체가 공동으로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밴드 이름 ‘Easy Cure’는 톨허스트가 쓴 곡에서 따온 것이며, 일부 초기 가사 역시 톨허스트와 갤럽 등이 제공한 문장을 편집한 형태였다.

그러나 1979년경부터 로버트가 대부분의 곡과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Seventeen Seconds 앨범 이후에는 그의 비중이 확고해졌다.

특히 이 앨범은 부모 집 지하실에서 햄몬드 오르간과 탑 20 울워스 기타, 드럼 머신을 이용해 거의 혼자 작곡 및 데모 제작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버트는 초기 4장의 정규 앨범에서 공동 작곡 크레딧을 인정했지만, 1982년 Pornography 작업을 맡은 이후 앨범이 흥행하자 작곡과 프로덕션 전반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큐어를 떠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당시 스스로 앨범의 90%를 자신이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톨허스트와 갤럽 또한 작사에 일정 부분 기여했으나, 녹음 당시 대부분의 가사는 로버트가 정리하고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4년 발표된 The Top은 사실상 로버트의 솔로 앨범으로 평가되며, 거의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했고 드럼은 앤디 앤더슨, 색소폰은 포를 톰슨이 참여했다.

1985년 The Head on the Door부터는 로버트가 단독 작곡한 곡들이 중심이 되었고, Kiss Me, Kiss Me, Kiss Me를 기점으로는 전 멤버가 작곡에 참여하되 로버트가 주 작곡가 및 편곡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2024년 10월, 로버트는 2029년을 은퇴 시점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더 큐어의 데뷔 앨범 Three Imaginary Boys 발매 50주년이자 로버트의 70세 생일이 되는 해이다. 그는 이후 몇 년간 공연을 포함한 활동을 지속하며 마지막을 준비할 계획임을 예고했다.

2.3. 수지 앤 더 밴시스

파일:로밧수지.jpg

로버트는 수지 앤 더 밴시스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

로버트는 1979년 8월 3일 런던 YMCA에서 열린 스로빙 그리슬과 카바레 볼테르의 공연장에서 수지 앤 더 밴시스의 스티븐 세버린을 처음 만났다.

당시 큐어와 밴시스는 각각 픽션 레코드와 폴리도르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로버트는 이미 밴시스의 팬이었다. 두 사람은 금세 친분을 쌓았고, 세버린은 로버트를 밴시스의 두 번째 앨범 Join Hands 홍보를 위한 영국 투어에 참여하도록 초대했다.

양 밴드는 그해 8월 후반부터 투어를 시작했고, 9월에는 밴시스의 보컬 수지 수가 큐어의 싱글 Jumping Someone Else’s Train의 B사이드 곡인 I’m Cold에 백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어 도중 애버딘 공연을 몇 시간 앞두고 밴시스의 기타리스트 존 매케이와 드러머 케니 모리스가 탈퇴하면서 공연 일정이 중단 위기에 놓였다.

로버트는 밴드의 해산을 막기 위해 자신이 임시로 기타리스트 역할을 맡겠다고 자청했고, 드럼은 전 슬리츠 멤버 버지가 대신했다. 이후 투어는 9월 18일부터 재개되었고, 로버트는 매일 밤 큐어와 밴시스 양쪽 무대에 서게 되었다. 투어가 종료된 뒤에는 큐어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세버린은 이 시기의 경험이 로버트에게 무대 위 퍼포머로서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로버트가 처음에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인상이었지만 수지 수와 매일 무대를 함께하며 점차 더 대담하고 외향적인 존재로 변했다고 보았다.

세버린은 로버트가 무대 연출, 관객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프론트맨으로서 허용되는 과장된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때의 경험이 이후 그의 스타일과 무대 존재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3. 스타일

파일:로버트메인2.jpg
로버트 특유의 창백한 피부색, 번진 붉은 립스틱, 검은색 아이라이너, 헝클어진 긴 검은 머리카락, 올블랙 옷등, 그의 전체적인 스타일은 고스 스타일의 유명한 예시로 선정된다.

그의 스타일은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 시저핸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1]

하지만 본인은 자신들을 고스족, 고딕 록 밴드라고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실험적인 스타일이였으며. 흔한 슈게이즈 고스 밴드쯤으로 큐어가 기억되는 게 싫다고.

4. 여담

  • 동시기 활동했던 더 스미스모리세이와는 살벌한 앙숙이다, 어찌나 싫어하는지 "모리세이가 채식주의자라고? 그럼 고기를 더 먹어야 겠다.", "모리세이는 왜 항상 우울하다면서 자살을 안 하는거냐? 안 하면 내가 죽여버리겠다." 며 날선 발언을 하기도 했다.
  • 이렇게나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였지만, 모리세이는 2017년 인터뷰를 통해 그렇게까지 비난할 의도는 없었다고 하며, 행동을 후회한다고 전했다.
  • 1988년 8월 13일 메리 테레사 풀과 결혼했지만, 자식은 낳지 않았다, 이유는 로버트 스스로 태어난 것도 불만족스러운데,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고 싶지도 않아서라고. 본인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다.
  • 도발적인 스타일과는 달리, 실제 모습은 부끄럼을 많이 타고 수줍어하는 성격이다, 인터뷰를 보면 기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로버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 팀 버튼은 감독 큐어의 열렬한 팬으로, 더 큐어가 Shockwaves NME Godlike Genius Award 상을 수상할 당시, "큐어는 디즈니의 화실에서 묶여 우울증에 고통받던 시절의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것이였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Disintegration을 녹음하던 로버트에게 가위손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키보디스트였던 로저 오도넬에 따르면, 로버트가 당시 팀 버튼을 잘 몰랐던건지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