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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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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2. 생애

1930년 7월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태어나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북한에서 공개한 정보에 따르면 1931년 7월 10일, 중국 길림성에서 빈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국공내전에 참전, 14살에 홍군에 입대하여 1946년에 그 유명한 장춘전투에 참전했다. 귀국 후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하여 최춘국의 안동제12보병사단에서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으로 복무하며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미 김일성 시대부터 중요한 직책들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4년 12월, 중장 계급으로 4군단장에 재직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임명은 더 이른 시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군사연구로 이름이 높아 김일성,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으며 군사학 박사학위 및 후보원사 칭호도 받았다.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상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94년 4월, 백두산 권총을 수여받았다. 1994년 10월, 7군단장 조동이 확인되었는데 북한 선전에 따르면 4월에 군단장 자격으로 백두산권총을 받았다고 하니 임명은 더 전에 이루어졌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3월, 조선인민군 중대장, 정치지도원대회에 참석했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1996년 6월, 현지지도를 나간 김정일과 줴기밥옥수수죽을 같이 노나먹는 쑈를 했다고 한다.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7년 11월,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조동되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98년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인민무력부가 인민무력성으로 개편되면서 인민무력성 부상에 유임되었다. 1999년 7월, 조선인민군 친선참관단장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2000년 9월, 인민무력성이 인민무력부로 환원되면서 다시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되었다. 2002년 4월 1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152호에 따라 김윤심, 김정각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했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북한에서 제작한 소개편집물에 따르면 고령으로 인해 은퇴했었다.

그러다가 2007년 7월, 김정일이 "지금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은 항일 빨치산들이나 그 관계자들이 총장을 역임했으니, 제대한 려춘석이 총장으로 적합하다"고 그를 총장으로 임명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지기선의 후임으로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남한에서는 이를 2008년 2월에 파악하였다. 총장에 임명되면서 대장 계급도 다시 돌려받았으며,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30년만에 승진하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은 그를 "총장 아바이"라고 부르면서 존중해주었다 카더라.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2012년 10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창립 60주년 행사에 출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김정각에 자리를 내주고 2번째로 은퇴하였으나 2015년 당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에서 각 전선군단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하여 전선군단 고문에 임명되면서 84세의 나이로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교통사고 후유증과 고령으로 인해 병든 몸으로 인해 최종제대하게 되었다.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8년 8월, 김영춘 장의위원에 은퇴한 노간부들과 위촉된 것을 봐서는 은퇴해서 말년을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2018년 8월 26일에 사망했으나 부고는 발표되지 않았다. 2023년 2월 8일 열병식에서 제2경보병사단 종대가 려춘석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 2023년 9월 26일, 려춘석 소개편집물이 새로 방영되었다. 2024년 9월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당중앙위원회 부부장 직함으로 안장됐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이 어디 꿀리지 않는 자리인데 그 직함이 아니라 부부장으로 안치된 것을 보면 사망 전에는 당중앙위원회 군사부 부부장 등을 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3. 여담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4명 모두 솔선수범해서 최전선에 복무시켰으며, 고명딸 려귀숙도 최전선에 복무하는 군관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손자 려강혁을 비롯한 손자들도 당연하지만 모두 군인이 되었다.

4. 참고문헌

  • 2019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