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27 11:39:36

딥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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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바 알 히슨의 시가지. 왼쪽 멀리는 딥바 알 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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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바 알 푸자이라 요새

1. 개요2. 역사
2.1. 중세: 딥바 전투2.2. 포르투갈 제국령 두바2.3. 근세2.4. 근현대

1. 개요

아랍어 دبا
영어 Dibba

아랍에미리트 동북부, 오만무산담 반도에 걸쳐 있는 도시. 디바, 답바 등으로도 표기된다. 코르파칸에서 북쪽으로 25km, 라스 알카이마에서 동남쪽으로 3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전근대 시기까지는 하나의 항구 도시였으나 20세기 들어 북쪽에서부터 오만 술탄국, 샤르자 토후국, 푸자이라 토후국에 의해 분할되고 뒤의 둘은 아랍에미리트에 가입하며 복잡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오만령은 딥바 알 바야 (دبا البيعة), 샤르자 령은 딥바 알 히슨 (دبا الحصن), 푸자이라 령은 딥바 알 푸자이라 (دبا الفجيرة)로 불리며 각각 인구는 1만, 1만 3천, 5만명으로 합치면 8만에 육박한다. 그중 가장 큰 딥바 알 푸자이라는 푸자이라 토후국의 주요 항구로써 중시된다. 딥바 알 히슨에는 수산 시장이 있다. 또한 세 도시 모두 요새 유적이 있는데, 그중 포르투갈 시기 요새는 딥바 알 히슨에 있었다.

세 도시는 해안을 따라 인접해 있지만 중간 중간에 공백지가 있어 구분된다. 또한 엄연히 다른 나라인 알 히슨과 알 바야 사이에는 장벽에 가까운 울타리가 둘러져 있다. 아랍에미리트 축구 1부 리그에 소속된 디바 FC는 디바 알 푸자이라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딥바 알 바야에는 공항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고, 활주로는 거의 준비되었으나 아직까지 상용화되지 못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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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바야의 요새

고대부터 항구가 있었고, 서쪽 내륙의 믈레하 및 앗 두르와 교류했다. 서기 전후에는 바레인, 메소포타미아, 인도, 동남아와도 교류했다. 6-7세기에는 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륙의 투암 (알 부라이미)을 근거지로 독립을 유지하던 오만 인들이 딥바를 항구로 이용했다.

2.1. 중세: 딥바 전투

630년 무렵 딥바를 비롯한 오만의 아랍계 부족들은 무함마드의 초대에 응하여 이슬람을 수용하고 메디나자카트를 바쳤는데, 632년 그가 사망한 후 라키트 빈 말리크 (둘 타즈)가 이끄는 아즈드 부족이 자카트 납부를 거부했다. 딥바를 중심지로 삼은 라키트는 더 나아가 스스로 무함마드와 동급인 예언자라고 칭했다. 이에 딥바의 예멘계 징세관 후다이파 이븐 무흐신 알 바리키는 칼리파 아부 바크르에 도움을 청했다. 아부 바크르는 하와진 부족의 징세관이자 기존 쿠라이쉬 지도자였던 이크라마 빈 아비 자흘과 아즈드 부족 출신인 아르파자 이븐 하르마타 알 바리키를 파견했다. 이슬람 제국군은 빠른 기동을 위해 룹알할리 사막을 관통해 진격했다.

라키트에게 밀려난 줄란다 부족과 합류한 이슬람 군대는 딥바 근처에서 반군과 교전했다. 사기 진작을 위해 병사들의 가족을 후방에 배치한 라키트는 초반에 우위를 점했으나 곧 메디나 편인 압둘 카이스, 나지아 부족이 이슬람 진영에 합류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릿다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에서 이슬람 군대는 라키트의 병사 수백을 전사시키며 승리했다. 역사가 앗 타바리는 최대 1만여명이 전사했다 기록했고, 지금도 (오만에 속한) 딥바 알 바야에는 알 무르타딘 (배교자) 묘지가 남아있다. 승리 후 이크리마는 딥바에 입성하여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냈고, 딥바를 약탈하여 그 재산과 가축의 1/5를 전리품으로 취해 돌아갔다.

한편 후다이파는 오만 총독이 되어 일대의 안정을 위해 남았고, 다른 장군들은 예멘을 평정하기 위해 떠났다. 이크리마가 끌고간, 후일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이 되는 무할라브의 아버지 아비 수프라를 포함한 포로들은 634년에 우마르가 칼리파가 된 후 몸값 없이 석방되었다. 아랍인들은 지금도 배교자들의 패배를 가르켜 '딥바의 날'이라 표현한다. 890년 무렵에는 압바스 왕조의 이라크-바레인 총독 무함마드 빈 누르가 2만 5천 대군과 줄파르 (라스 알카이마)에 상륙, 딥바에서 오만 이맘국 군대를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오만을 정복하기도 했다. 이때 재차 파괴된 딥바는 소하르, 니즈와, 루스타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만의 주요 도시 지위에서 내려와 어촌 마을로 남는다.

2.2. 포르투갈 제국령 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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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히슨의 포르투갈 요새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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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푸자이라의 요새

중세 후기에 딥바는 오만 이맘국을 거쳐 호르무즈 왕국령이 되었다. 1507년 9월, 호르무즈 정복을 위해 오만 만에 진입한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휘하 6척의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 코르파칸이 함락된 후 딥바 (두바 혹은 도바) 역시 포르투갈 령이 되었다. 1580년경 베네치아의 지리가 가스파로 발비는 지명을 데베 (Debe)로 기록했고, 당시에 벌써 포르투갈의 요새가 있었다. 1602년 사파비 왕조바레인 정복 후 딥바 역시 그에 복속했고, 이는 1620년 반다르아바스에 머물던 이탈리아인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에 의해 확인된다. 그러던 1623년 루이 프레이레가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호르무즈 수복을 시도하자 사파비 조는 딥바와 코르파칸에 군대를 보내 대비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함대가 소하르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올리자 주민들이 사파비 병력을 죽이고 다시 포르투갈에 복속했다.

이에 루이 프레이레는 딥바 요새에 50명의 수비대를 배치했고, 1627년에는 현지 반란을 진압하며 수비 병력을 증원했다. 1629년 포르투갈 당국은 이라크 남부에서 아랍 부족들의 압박을 받던 만다야교도들을 딥바로 옮기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거절했다.[1] 1645년에는 네덜란드의 전함 제메우프가 무산담 반도를 탐사하며 딥바를 묘사했다. 그리고 1648년 8월, 오만 제국 (야루바 왕조)가 무스카트를 포위한 끝에 10월에 딥바 & 쿠라야트 & 무트라를 포르투갈에게서 할양받았다. 포르투갈은 이후로도 카사브와 무스카트를 영유하다가 1650년에 그마저 상실하고 페르시아 만에서 사실상 철수한다.

2.3. 근세

1666년 네덜란드측 기록에 '답바'로 등장한 도시에는 대추 야자수로 지어진 주택 3백 채가 있었고, 포르투갈 시기에 세워진 4개의 요새 중 가장 큰 것이 남아 있었다 한다. 또한 내륙 쪽에는 많은 대추 야자수와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샘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어부들이 사는 작은 개울이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18세기 나디르 샤가 오만 제국을 약화시켰을 때에 딥바는 칼바, 코르파칸과 함께 카시미 가문 령이 되었다.

2.4.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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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바 알 히슨의 중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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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바 알 푸자이라

샤르자에 기반한 카시미 왕가의 3대 군주인 술탄 빈 사크르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주었는데, 그중 아흐마드가 1871년 딥바의 군주가 되었다. 1883년 아흐마드가 사망한 후에는 아들 라시드가 계승하여 장기 집권하다 1937년에 사망했고, 다시 라시드의 아들 아흐마드가 통치하다 1951년에 사망한 후 딥바는 다시 샤르자 령이 되었다. 20세기 중엽 샤르자는 딥바의 남쪽을 푸자이라가 차지하자 영토 분쟁을 벌였다. 1971년 아랍에미리트 성립으로 분쟁은 일단락되었고, 1976년에는 자이드 빈 술탄 알나얀이 방문했다. 곧 푸자이라를 잇는 도로와 전선이 놓였다. 그리고 딥바 알 푸자이라는 1979년 발전소, 1980년 시멘트 공장이 세워지며 더욱 발전했다.

[1] 일부만 무스카트로 갔다가 1630년 경에 바스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