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0:50:53

동관대전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마초와 한수 등 서량 세력과 조조 사이에 벌어진 실제 역사상의 전투에 대한 내용은 관중제장의 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동관 대전
장소
장안 중심의 관중 서부 지역, 양양 중심의 형주 북부 지역, 합비 중심의 회남 지역
기간
기원후 234년경
교전세력 촉한
오나라
위나라
지휘관[1] 촉한 승상 제갈량
마속
왕평
강유
마충
위연
이엄
오의
손오 초대 황제 손권
손오 형주목 겸 대도독 육손
조위 2대 황제 조예
조위 표기대장군 사마의
장합
왕릉
진태
문흠
하후현
하후패
하후무
신비
병력 촉한 병력 14만 5천
손오 병력 20만
총합 35만 이상
30만~35만 이상 추정[2]
피해 규모 피해 불명 10만명 이상(추정)
결과
촉한-동오 연합군의 승리
영향
촉한의 장안 수복 및 관중 서부 장악
동오의 양번 함락 및 형북지역 영향력 확대
촉한-동오의 상용 대치 및 분할
촉한 승상 제갈량 병사, 촉한 권력 구조 변동


1. 개요2. 배경
2.1. 1차 북벌 성공 후의 정세2.2. 손오의 요동 원정
3. 진행
3.1. 촉한과 오나라의 거병3.2. 촉한의 대전략3.3. 대회전3.4. 패퇴하는 위군3.5. 동오 전선3.6. 전후: 상용 대치
4. 결과
4.1. 촉한4.2. 동오4.3. 조위
5. 기타

[clearfix]

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아! 내가 마속이다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소설의 분기점이 되는 최대의 사건으로[3] 제갈량의 2차 북벌임과 동시에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쳐 조위를 향한 대대적인 북벌에 나선 사건. 또한 작품 내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4]

명칭은 동관대전이지만 사실 가장 결정적이고 중심이 되는 전장이 동관이었기에 그렇지, 전투는 동관만이 아니라 합비와 형북에서도 벌어졌다.[5] 다만 소설의 주역 세력이 마속을 비롯한 촉한 측인지라 대오 전선 쪽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작중에서는 주로 동관 전투라고만 표현되기에 이렇게 서술한다.

2. 배경

2.1. 1차 북벌 성공 후의 정세

마속의 빙의로 인한 제갈량의 1차 북벌의 성공 이후, 위나라는 옹량주를 탈환하기 위해 16만이 넘는 대군을 투사하여 반격을 가했으나 패배, 오히려 제갈량의 역공으로 장안의 주요 방어선인 옹성과 미성마저 잃고 만다. 다행히 헌제를 이용한 사마의의 계략으로 진군을 멈추기는 했으나 옹량 지역은 완전히 촉한의 권역으로 굳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촉한은 파촉 지역에 눌려있던 신세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위나라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위나라의 세력은 강대하여 판을 뒤집기는 무리가 있었고, 촉한은 여전히 만성적인 인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물며 아직 장안을 탈환하지 못하고 관중 일부만 얻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촉한의 초조함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촉한은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전쟁을 벌여 장안을 수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2.2. 손오의 요동 원정

마속은 지난 전쟁에서 오나라의 호족 연합 체제로 인한 군사 동원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미래 지식을 통해 손오의 요동 원정을 계획한다. 본래 역사에서 손권이 계획하고 실행했으나 처참히 실패했던 요동 원정을 성공시키면 오나라 황실의 권위가 높아져 군사 동원이 더 쉬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래 지식을 통해 마속은 이를 성공적으로 실행하고, 덕분에 손권의 권위가 높아지며 다음 북벌 때 전력을 다한 형익병진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3. 진행

3.1. 촉한과 오나라의 거병

마침내 촉한과 오나라는 각각의 실질적인 총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전쟁을 일으킨다. 촉한은 장안을 수복하기 위해 그동안 착실히 기른 국력을 모두 기울여 14만 5천에 달하는 대군으로 장안으로 진격하고, 오나라 역시 20만이라는 대군을 각각 합비와 형북의 2갈래로 나눠 북진시킨다.

3.2. 촉한의 대전략

제갈량은 본인의 대전략은 굉장히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읽히기도 쉽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껏 제갈량 휘하에서 일하며 능력을 증명한 4명의 양장(마속, 강유, 왕평, 마충)들을 따로 납치불러다가 대전략 수립을 일임한다. 이에 4명의 장수가 내놓은 전략은 바로 과거 마초조조를 상대로 시도했던 대범한 동관 진출 작전의 재현. 위수를 따라 진격해오는 10만 대군을 미끼삼아 최소한의 병력 4만 5천명으로 장안의 후미인 동관을 기습 점령하여 장안을 양면에서 포위하는 전술을 택한다.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해 허를 찔린 위나라는 청야조차 행할 겨를이 없이 막대한 군량을 포함해 동관이 함락당하는등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낙양 쪽에서 황하를 통해 동관을 수복하려는 진태, 문흠 등의 위군 3만명을 왕평과 마속이 1만 병력으로 포판현에 묶어두면서 장안을 고립시킨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이런 움직임에 경악하면서도 위수에서 10만 촉군만 막는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 10만명은 이엄과 마충이 지휘하고 있었다. 장합이 뒤늦게야 마속과 위연의 신속한 움직임을 보고서야 제갈량이 동관에서 인근의 위군을 격파하고 있음을 진언한다.[6] 결국 제갈량이 동관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마의 역시 주력을 동관으로 돌린다. 비록 10만 정예병을 제외한 나머지 자투리 병력이 제갈량에게 격파당한 뒤였으나 일단 병력의 양은 여전히 위군이 우세했고, 결국 사마의는 미성에서 촉군 10만을 막는 4만 5천을 제외한 나머지 5만 5천으로 제갈량을 격파하기 위해 진군한다.

3.3. 대회전

사마의의 과감한 진격에 제갈량은 포판현에 있는 마속과 일부 병력을 동관으로 소환하고, 마대와 고상에게 1만의 군사를 맡겨 동관을 지키게 한 뒤 남은 3만 4천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의와의 정면승부를 결의한다. 결국 동관 인근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대적인 야전이 벌어진다.[7]

제갈량은 온갖 기책을 동원하며 사마의의 공세를 막아냈고 옻독 살포[8], 마름쇠 함정[9] 등을 깔면서 난전을 벌인다.

그렇게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끝에 촉한에서는 위연, 위나라에서는 장합이 각각 전사한다. 그러나 위연의 빈 자리를 메꾼 촉군과는 달리, 위군 전선은 장합의 공백을 채우지 못했고 마침내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이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을 대파하는 것에 성공한다.

3.4. 패퇴하는 위군

사마의의 주력이 대파당하면서 사실상 대촉 전선에서 위나라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사마의가 위수 지역에 남겨놓은 4만 5천의 병력은 2선급 전력에 불과했던 데다가 10만에 달하는 이엄과 마충, 오의의 군세를 이길 수 없었고, 동관에서의 승리를 알게 된 위수 지역의 촉한군 역시 기세를 불리며 진격을 거듭한다.

위나라는 남은 중앙군 대부분을 오나라 전선에 투입한 상태라서 결국 낙양에 남아있던 원로 대신 신비가 불리한 전황을 눈치채고 낙양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온다. 신비는 동관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마대와 고상이 죽어라 저항하는 동안 사마의를 격파하고 군을 정비한 촉군이 도착. 결국 전투를 포기하고 퇴각한다.

하지만 이때 제갈량이 지병으로 쓰러지게 된다. 최고지휘관이 쓰러진 이상 장기전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마속과 촉한군은 최대한 빠르게 장안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기조를 변경, 마속은 장안을 지키는 하후무에게 회유를 빙자한 겁박 편지를 보내며 퇴각을 종용한다. 결국 이에 넘어간 하후무는 병주 지역으로 후퇴하고 마침내 장안이 촉한의 품에 돌아오게 된다.

3.5. 동오 전선

한편 동오 전선은 2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각각의 황제(조예, 손권)가 친정하는 합비 방면, 하나는 육손이 이끄는 별동대에 위나라 형주자사 왕릉이 맞서는 형북 방면이었다.

촉한이 장안을 함락시키던 때 합비에서 손권이 이끄는 오군은 장특이 이끄는 5천 군사로 인해 합비성에서 발이 묶여 있었고, 이를 틈타 과감한 우회기동을 감행한 조예의 위군 본대는 오군의 후방을 급습하여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손권은 합비에서 또다시 퇴각하고 만다.

반면에 형북 지역을 맡은 육손은 위나라 형주자사 왕릉이 이끄는 위군을 야전에서 격파하며 양양과 번성으로 몰아넣은 후, 밤낮없이 양번을 두들기며 치열하게 공성전을 펼친 끝에 양번까지 함락시킨다. 이로서 형주의 중심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양양군을 손에 넣어 형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한다.[10]

3.6. 전후: 상용 대치

그러나 이제 위나라를 격파했으니 촉한-오나라 양국의 이해 관계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였다. 육손은 장안을 수복한 촉한을 견제할 수단을 필요로 하여 장안의 바로 아래에 있는 익주 상용군 지역을 얻으려 시도한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제갈량 역시 마지막 명령으로 한중을 경비하는 2천 병력을 빼 상용으로 보냄으로써 그 시도를 저지하고, 결국 상용에서 촉한과 오나라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후 제갈량 사망 후 마속과 육손이 대표로 회담을 벌인 끝에 상용을 분할해 관리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4. 결과

4.1. 촉한

이릉대전 이래로 약소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촉한은 1차 북벌과 위나라의 침공 격퇴로 분위기를 바꿔나가고, 결정적으로 이 동관대전을 통해 한중 공방전 이후로 오랫동안 상실했었던 삼국간 세력 경쟁에서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다시 잡게 되었다.[11]

이 전쟁이 낳은 결과는 대단히 선명했다. 일단 촉한의 국력은 장안 수복을 통해 폭발적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서 촉한은 국세로만 따지면 이미 오나라를 뛰어넘은 수준이었는데, 몇 년 뒤에 실시된 장완의 북벌에서는 오나라와 같은 20만을 동원할 수 있었고, 단순히 군사 수만 따지면 오나라와 대등하지만 오나라는 호족 연맹체라는 국체상 군사를 모으기가 빠듯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군사력으로는 이미 오나라를 상회하게 된 셈이다. 또한 옛 고도(古都)인 장안을 수복함으로써 한(漢)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 강화까지 성공하는 등, 촉한 입장에서는 명실공히 성공한 전쟁이었다.

다만 촉한의 당초 전략은 황하를 넘어 하동군, 나아가 함곡관까지 진군하여 관중 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지만, 함께 진군하던 오나라가 격퇴당하고 결정적으로 총사령관인 제갈량이 병환으로 쓰러지면서 일단은 관중 서부만 권역에 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수복한 장안의 방어선도 불안한 면이 많았기에 바로 장안으로 천도하지는 못하고 잠시 숨을 고르면서 훗날을 도모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촉한의 급격한 팽창을 경계하는 오나라로 인해 촉오 관계가 서서히 냉각되고, 이는 훗날 위나라와 오나라의 2차 합작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촉한의 권력 구도도 대대적인 변동이 일었는데, 일단 유비 시절부터의 맹장이던 위연이 전사하고, 탁고대신이던 이엄이 제갈량 사후의 권력을 탐하다 미리 숙청당하며, 똑같은 탁고대신이자 승상, 나라의 기둥이던 제갈량마저 위독한 끝에 장안 수복 후 진군하던 도중 병사하는 타격을 입으면서 촉한 내의 권력은 사실상 공백 상태나 다름없게 된다. 이에 제갈량은 죽기 직전 장완과 비의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군부를 이끄는 마속과 오의로 하여금 그들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물을 불어넣는다. 또한 정치권과 군권을 분할해 맡기면서 자신 대처럼 권력이 한 명에게 쏠리는 일을 방지하게끔 조치한다. 이로써 촉한은 영토 확장은 물론 세대 교체까지 성공적으로 이룩하면서, 보다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4.2. 동오

동오의 입장에서는 애매한 성공을 거둔 전쟁이었다. 일단 형북 지역에서 육손이 양양군을 손에 넣고 상용군의 절반까지 획득하면서 영토를 확장한 것은 만족할 일이었으나, 정작 주력이었던 합비 방면에서 또다시 대패한 것이 발목을 잡았다.

기본적으로 호족 연맹체인 오나라는 촉과 위와는 다르게 내부 결속이 느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문에 손권은 집권 내내 황권 강화과 황실의 권위 향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요동 원정의 성공으로 황권을 일시적으로 다져놓는데 성공했으나 합비에서의 참패로 또다시 금이 간 것은 물론, 사실상 동오 전선을 혼자서 캐리한 육손으로 인해 거꾸로 육손과 육씨 호족의 위세가 높아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손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죽 쒀서 개준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영토를 확장하여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셈이다.

이러한 전쟁의 결과는 결국 손권과 육손의 점진적인 관계 파탄을 낳았고, 설상가상 요동 원정의 부작용이 전쟁 이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정계가 조금씩 분열되는 등, 굉장히 미묘한 성과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동맹인 촉한의 급격한 국력 향상은 또다른 불안감을 낳았다. 동맹이라 한들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적인 동맹에 가까웠던 만큼, 대적인 위나라를 크게 격퇴한 상황에서 동맹의 냉각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에 육손은 장안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상용군을 얻음으로써 촉한의 목줄을 쥐려 시도했고, 이에 반발한 촉한이 상용 대치를 일으키면서 국가 간의 충돌이 가시화된다. 결국 상용군은 반씩 나눠 관리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으나, 사실상 동맹이 유명무실해졌음은 두 나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4.3. 조위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나라의 삼국 패권 상실. 물론 대패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촉과 오를 합친 것에 비견되는 강국의 위치를 잃지 않았으나, 228년부터 이어진 촉한과의 전쟁에서의 연패와 점진적인 영토 상실로 그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요동 지역의 이탈과 더불어 장안과 양번이라는 요충지까지 빼앗기면서 전략적 불리함이 가중되었고, 결정적으로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삼국의 정세는 위나라의 절대적인 1강 체제가 무너지게 된다.

천하의 패권을 상실했다는 표현이 걸맞게, 이 전쟁 이후로 위나라는 예전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병주를 통한 우회 공격을 시도하거나 이민족을 이용한 함정을 파고, 나중에는 오나라를 설득해 동맹을 맺으려는 등 정공법보다는 여러 기책을 통해 난국을 돌파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이는 위나라가 더 이상 촉과 오를 압도할 만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촉한과 오나라의 관계가 급랭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요동의 이탈을 오히려 오나라의 힘을 빼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사마의는 이 정세를 이용해 촉오동맹을 파기시키고 거꾸로 자신들이 오나라와 연합해 위기를 극복한 뒤 가장 위협이 되는 촉한을 함께 무너뜨리자는 연횡책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의 이 연횡책은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촉한에는 미래에서 빙의한 마속이 오나라가 배신할것을 예상하고 철저한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다. 결국 위나라의 이런 음모는 훗날의 전쟁에서 촉한이 위오 연합군을 멋지게 격파함으로써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게 된다.

5. 기타

  • 위연제갈량이라는 두 주요 인물의 사망 씬이 이 파트에서 연출되었는데, 시점상 본편에 등장하지 않는 유비가 이 작품에서 어떤 인물상으로 설정되었는지가 간접적으로 그려진다.
  • 장합과의 일기토 끝에 본의아니게 동귀어진해버린 위연은 그저 큰소리만 칠 줄 알던 자신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위문장의 용기다"[12]라며 발탁해준 유비에 대한 고마움과 그가 죽은 후 침체된 촉한의 분위기를 바로 그 유비가 인정한 자신의 용기로 다시금 끌어올리기 위해 행동해왔음을 되새긴다. 장합이 먼저 쓰러지고, 이내 위연 역시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면서 "이 싸움의 끝은 보고 죽어야 하는데, 주공께서 장안은 어찌 되었느냐 물으실텐데"라고 잠시 걱정하지만 이내 "승상은 답답하긴 해도 꼼꼼한 사람이니 분명 장안을 함락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안심하고 세상을 떠난다. 원 역사와 달리 끝까지 한의 충신으로서 명예롭게 전사하는 최후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장안성 함락 후, 동관을 떠나 장안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제갈량은 성도의 유선에게 표문을 올리는 한편 자신의 후계를 지정하며 유언을 남긴다. 조조손권처럼 지연이든 혈연이든 뒤를 받쳐주는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과 달리 정말로 세상에 알려진 것 처럼 아무 뒷배도 그럴듯한 유 씨 친족 한 명도 없이 관우, 장비, 조운, 간옹, 손건, 미축 등이 겨우 모여있는 초라한 세력에 느꼈던 황당함과 막막함, 그런 아무 연관고리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기적적으로 일궈낸 촉한이라는 나라에 대한 자부심, 그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등을 담담히 풀어낸 뒤 민간인 10만명을 동반한 퇴각전이나 의형제의 복수를 위한 전쟁 등의 일견 정치 군사적 상식에 배치되지만 촉한만의 가치가 담겨있는 사건들을 돌아보며 그 가치를 이 이어가주기를 당부한다.[13] 이 유언은 삼국지에 나오는 촉한이라는 나라를 그대로 요약했다고 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많은 독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냈으며, 작중의 등장 인물들에게도 일종의 가치관으로서 자리잡아 실제 역사와 달리 군사와 행정 양면에 큰 족적을 남겨 원한다면 제갈량의 포지션을 그대로 차지할 수도 있는 주인공 마속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큰 갈등 없이 장완 -> 비의로 이어지는 최고 권력자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1] 각국 부관급은 제외하고 군사 지휘권자만 기재.[2] 조위가 동원한 병력은 장안 방면에서만 12만~13만. 게다가 사마의가 장안과 동관 일대에 배치된 자투리 병력들이 제갈량의 별동대에게 죄다 격파당했다고, 그들만 있었으면 확실히 우세를 취할 수 있었다고 아쉬워한다. 당시 포판현을 지키다가 동관에 온 마속이 보기에도 동관 일대 위군의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 데다가 사마의 산하의 위군이 10만이기에 자투리 병력도 수천에서 수만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낙양에서 진태와 문흠에게 군사를 맡겨 보냈지만 포판현에서 묶여 황하를 못 건넌 병력이 3만이다. 즉 최소 15~16만. 또한 동오 전선에서는 동오의 병력이 촉한보다 더 많았고, 황제 조예가 친정을 시행했기에 조위 역시 더 막대한 물량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동오 전선에서 최소 15~20만 추정. 종합해서 30~35만 명 이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3] 사실상 이 사건으로 소설의 1부와 2부가 나뉜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4] 삼국의 병력을 전부 합쳐서 계산하면 동오 20만, 계한 15만, 조위 30만 이상으로 총 60만 이상의 병력이 뒤엉켜 싸운 셈이다. 본래 삼국시대 최대, 최중요 전쟁으로 꼽히는 적벽대전2배 이상의 규모이고, 이후 벌어진 장완의 북벌. 마속의 낙양대전에서도 이 정도 병력은 동원되지 않았다.[5] 사실 규모만 따지면 대촉 전선인 동관 지역보다 오히려 대오 전선 쪽이 더 거대했다. 동오가 20만을 동원했기에 당연히 조위도 그에 맞먹거나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며, 황제 조예가 직접 친정을 나갔기 때문.[6] 동관이 주전장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진태와 문흠의 3만, 동관 주변에도 최소 수만 단위의 위군이 출현했기에 실제로 동관에도 위군이 훨씬 더 많았다. 그걸 결사적으로 막아낼 정도의 능력자는 당연히 제갈량밖에 없었던 것.[7] 촉군 3만 4천, 위군 5만 5천에 달해 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초반 강유의 활약과 제갈량이 준비한 전장에서의 기선제압이 아니었다면 체급부터가 상대하기 어려웠다.[8] 자석 가루와 섞어놓아서 철로 무장한 위나라 병사들이 걸려들자 지옥도가 펼쳐졌다.[9] 촉군이 무너지는 척 하고 위군을 끌어들였지만 무너지 척 하고 후퇴하는 촉군이 마름쇠를 잔뜩 뿌려놓아서 위군이 진입하자마자 갇힌 것을 두꺼운 신발을 신은 촉군 보병들이 격파했다.[10] 다만 양양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남양군과 상용군은 얻지 못했기에 형주 전역을 지배하지는 못했다.[11] 실제로 이 전쟁 이후로 국가들 사이에서의 견제는 촉한 쪽에 집중된다. 또한 촉한의 비상을 두려워한 오나라와 위나라가 결국 연합까지 하여 촉한을 공격하는 계기까지 낳았으니, 국력의 비율과는 별개로 삼국 중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12] "조조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거야?"라는 유비의 물음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겠다고 답하자, 그 말을 들은 유비가 곧바로 위연을 발탁하며 남긴 말이다. 첫 질문도 그렇고 짧은 등장이지만 상당히 탈권위적이고 친근한 모습.[13] 즉, 아무 혈연도 지연도 없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 아래 모여 기적과 같이 나라를 건국했으니, 후대의 너희들도 권력을 다투지 말고 나라를 위해 힘을 합해달라는 뜻.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