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두만강 눈물저즌 豆滿江 | ||
<colbgcolor=#f5f5f5,#1f2023><colcolor=#373a3c,#dddddd> 가수 | <colbgcolor=#ffffff,#2d2f34>김정구 | |
음반 | 왜못오시나/눈물젖은두만강 | |
발매일 | 1938년 2월 | |
러닝타임 | ??:?? | |
장르 | 트로트 | |
작사 | 김용호 | |
작곡 | 이시우 | |
노래방 | 금영엔터테인먼트 | <colbgcolor=#ffffff,#2d2f34> 255[1] |
TJ미디어 | 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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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수 김정구(金貞九)가 1938년에 발표한 대중가요다.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 등과 함께 대표적인 고전가요이다.
2. 곡 정보
고연령층은 노래 제목을 '두만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원곡자인 김정구의 톤이 워낙 높다보니 노래도 굉장히 높다. 오리지널로 부르면 최고음이 2옥타브 라샾 정도 나온다. 그것도 한두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렴구에서 연속으로 몰아치는 것이라서 앵간한 남자들은 소화하기 어려운 옥타브이다. 그래서 보통 남자들이 이 노래를 부를때는 음을 낮춰서 부른다.
가끔씩 2절 가사와 3절 가사를 섞어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원곡자인 김정구도 언젠가부터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부분을 3절 가사인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려'[2]로 개사해서 불렀다.
현재는 김정구의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한다면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지만, 눈물젖은 두만강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큰 히트를 치지 못했다. 심지어 눈물젖은 두만강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 1943년에 눈물젖은 두만강을 수록한 음반을 판매 금지하였다. 1963년에 동명의 영화가 나오고, 1964년 KBS 라디오의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역주행하였다.
전혀 알려지지 못한 게 작사자인 이시우(1913~1975)는 이후 경찰간부가 되었다. 본명은 이만두(李萬斗)인 그도 바로 1930년대 중반 극단 '예원좌'에서 가수 겸 연주자로 활동했다. 그는 1948년 지리산전투지구 공비소탕작전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내무부장관촉탁(1948), 대한반공인천시연맹 특무국장(1949), 부산시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전부 차장(1950), 경상남도비상사태대책위원회 선무과장(1950), 경기도 부평 형사주임(1954), 경상남도 동부산 경사(1958) 같은 일을 맡았다. 1980년대 후반 눈물젖은 두만강을 소개하던 스포츠서울 기사에 의하면, 1950년대 후반에 불법 영업을 한 나이트클럽을 경찰이 단속하니 클럽가수가 참고인으로 와서 조사받는데 취조하던 간부가 이 가수가 클럽에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걸 보고 관심을 보이며 노래 작사자를 아냐고 질문하더란다. 그 가수는 노래부른 가수 김정구는 알겠는데 작사자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는데 이에 그 경찰 간부는 답답하듯이 '그거 작사한 사람은 이시우야! 이시우! 바로 나란 말야!'라고 외쳐 가수는 멍때렸고 경찰들도 그랬어요? 라고 반응했다는 이야기를 싣기도 했다. 작사자 이시우에 대하여 알려지지 못한 시절이라며 소개했었다. 1962년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님없는 거제도」, 「인생 역마차」, 「영도다리 애가」, 「아내의 사진」 등을 발표했다. 1975년 교통사고로 인해 향년 만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79년 10.26 사건 때 박정희 대통령이 앙코르를 요청하자 심수봉이 이 곡을 불렀다.
강산에의 노래인 라구요 1절에 이 노래의 가사 일부분이 들어가 있다.[3]
2.1. 발표 배경
'눈물 젖은 두만강'의 발표 배경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인터넷에 돌아다닌다.1935년 이 노래를 작곡한 이시우(李時雨)는 순회공연을 위해 중국 두만강 도문에 한 여관에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한 여인이 비통하게 우는 소리가 났다. 다음 날, 이시우는 여관 주인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여인은 여관주인의 친구 김증손녀(金曾孫女)였다. 그 여인의 남편 문창학(文昌學)이 독립운동을 하러 갔는데, 몇 년 동안 오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을 찾아 헤매다녔고, 그러다가 남편 문창학이, 닷새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접한다. 공교롭게도 남편 문창학이 사망한 날은 그의 생일이었고, 그 김증손녀는 남편의 생일상과 제사상을 모두 차렸다. 이후 제사를 다 지낸 후 그 김증손녀는 두만강으로 뛰어 들어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연을 접한 이시우는 충격을 받아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하면서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통탄하는 감정을 실었다. 이 노래는 김조성(金肇聲)을 대표로 1935년 민족항일기 말에 설립되었던 신파극단인 예원좌극단(藝苑座劇團).의 소녀 화술배우(話術俳優) 장월성(張月星)이 처음 불렀고, 가사의 마지막 부분인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면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간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 작곡가는 뉴코리아 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다. 한명천이 지어준 1절뿐인 노래에 김용호[4]가 2, 3절을 만들어 1938년 오케레코드사가 첫 음반을 출시했지만, 판매량이 저조하였다. 설상가상 조선총독부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부인은 남편을 찾아 헤매다녔고, 그러다가 남편 문창학이, 닷새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접한다. 공교롭게도 남편 문창학이 사망한 날은 그의 생일이었고, 그 김증손녀는 남편의 생일상과 제사상을 모두 차렸다. 이후 제사를 다 지낸 후 그 김증손녀는 두만강으로 뛰어 들어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연을 접한 이시우는 충격을 받아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작곡하면서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움을 통탄하는 감정을 실었다. 이 노래는 김조성(金肇聲)을 대표로 1935년 민족항일기 말에 설립되었던 신파극단인 예원좌극단(藝苑座劇團).의 소녀 화술배우(話術俳優) 장월성(張月星)이 처음 불렀고, 가사의 마지막 부분인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면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간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시우 작곡가는 뉴코리아 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다. 한명천이 지어준 1절뿐인 노래에 김용호[4]가 2, 3절을 만들어 1938년 오케레코드사가 첫 음반을 출시했지만, 판매량이 저조하였다. 설상가상 조선총독부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실제로 독립운동가 중 문창학이 있고 실제로 몇몇 언론에서 이 노래와 엮어서 보도한 적도 있으며 후손들의 인터뷰 내용이 어느 정도 검증되어 완전히 날조되거나 거짓된 낭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2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닷새 전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내용은 후에 이야기의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덧붙여진 내용인 것 같다. 실제로 시손녀인 후손이 2005년 언론과 한 인터뷰에는 시조모인 김증손녀가 10여년간 남편이 사형이 집행된지도 모른체 찾아다녔다는 내용이 있다.
여담이지만 문창학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3. 영상
유튜브 |
4. 가사
가사 |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든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여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5]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가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그님이 보고 싶구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5. 커버
6. 매체
[1] 영상[2] 사실상 말하자면 3절의 가사는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고나'이다.[3] 여담으로 이 노래 2절에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 일부가 들어가 있다.[4] 김용호(金用浩, 1908~1967)는 당시 오케레코드 트럼펫 연주자이던 현경섭의 일기에서 연주보다 다른 일을 주로 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본이나 무대 구성, 차후 공연을 위한 답사 등 이 그런 예인데, 때문에 1939년 4월 태극 문양 사건 때에는 김상진과 함께 오사카에서 구속 이 되기도 했다. 1930~1940년대 작사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5] 이 소절을 원곡자인 김정구는 1980년대쯤부터 '떠나간 그 님이 보고싶구려'로 개사해서 부른다. 실제로 1991년 발표된 '현인 김정구 경연전집' 앨범에서는 2절 가사와 3절 가사가 섞어서 녹음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