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0:49:15

박향림

박향림
朴響林 | Park Hyanglim
파일:Park_Hyang-rim.jpg
<colbgcolor=#878787><colcolor=#fff> 본명 박억별 (朴憶別)
출생 1921년 1월 31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읍 온천동
사망 1946년 2월 8일[1] (향년 25세)
강원도 홍천군
데뷔 1937년 태평레코드 입단

1. 개요2. 생애3. 대표곡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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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가수.

2. 생애

1921년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읍 온천동# 출신으로 1937년 서울로 상경해 태평레코드에서 데뷔하였다. 17살의 나이인 1938년에 오빠는 풍각쟁이를 발표해 유명해졌다.[2] 사후 [age(1946-02-08)]년이 지난 지금도 좋게 평가받고 있는 건 박향림의 가창력. 현대의 가수들과 비교해도 박향림의 가창력은 최상급으로 평가받으며 당시에는 체계적인 보컬 트레이닝도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부분이다. 지금도 그녀의 대표곡인 오빠는 풍각쟁이를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가창력에 자신 있다는 일반인들이 불렀지만, 그 오묘한 콧소리와 노래의 독특한 오르내림을 모두 살린 사람은 없다.[3]

반면 친일 행적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있는데 1942년 남인수, 백년설과 함께 혈서지원을 불렀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자발적인 것인지 강압에 의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혈서지원은 같이 부른 둘은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유일하게 박향림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기에 본인은 여기에 해당이 되진 않은 상태.

광복 직후 출산하였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공연을 나섰다가[4] 산욕열이 발발하여 해방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6년에 사망했다.

3. 대표곡

4. 여담

  • 데뷔 초에 예명 박정림(朴貞林)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 출산한 직후에 강원도 홍천군에서 열린 공연에 참가했다가, 산후병이 발병했다고 한다. 그후에 1946년 7월 에 동양극장에서 박영호가 추도사를 읽은 박향림 추도 공연이 열렸다.[2] 박향림 사후 50년이 지난 1996년 이래로 저작재산권이 만료되었고, 최근 복고분위기를 타면서 광고에서 많이 써먹고 있는 멜로디이다. 2003년 저작권법 개정 이전 저작물이라 개정 전 유효기간인 50년을 적용받는다.[3] 오빠는 풍각쟁이를 불렀던 한 가수는 '음의 오르내림에 치중하면 콧소리를 내기 어렵고 반대로 콧소리에 치중하면 그냥 평탄한 노래가 된다.'라고 평했다.[4] 당대 여성들은 산후조리는커녕 출산 다음날 바로 밭일하러 가곤 했다. 거기다 박향림은 인기 가수였으니 산후조리고 나발이고 공연하러 오라는 소속사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