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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초대 혁명평의회의장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نور محمد ترکی Nur Muhammad Taraki | |
| 파일: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이미지 2.png | |
| <colbgcolor=#cd0000><colcolor=#febe00> 출생 | 1917년 7월 14일 |
가즈니 나와 | |
| 사망 | 1979년 10월 9일 (향년 62세) |
카불 | |
| 국적 | |
| 부족 | 파슈툰족 |
| 직업 | 기자, 작가, 정치인 |
| 학력 | 카불 대학 저널리즘 |
| 배우자 | 누르 비비 타라키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정당 |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
| 경력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혁명평의회의장(1978 ~ 1979) |
1. 개요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의장.2. 생애
타라키는 1917년 7월 14일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의 가즈니 주 나와 지역에서 출생했다. 15세에 인도 봄베이로 떠나 파슈툰 무역 회사(Pashtun Trading Company)에서 일하며 공산주의와 사회 정의에 관한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카불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기자로 활동하면서 장편소설, 단편소설, 에세이를 출판하는 등 저술 활동을 했다. 193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경제부 장관의 소개로 러시아인들과의 인연을 맺고, 이후 바흐타르 뉴스 에이전시에서 부국장으로 일하며 작가이자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저서 《드 방 무사피리》는 아프가니스탄 농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을 다루고 있으며, 소련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1952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아프가니스탄 왕국 정부의 독재적 성향을 비판하며 해고당하고, 이후 여러 직업을 거친 후 1965년에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을 창당하여 공산주의 확산을 위한 지하활동을 추진했다.[1] 1978년 4월 17일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주요 인물 미르 아크바르 카이베르가 암살되면서 당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쿠데타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타라키 |
1978년 4월 30일 사우르 혁명이라 불리는 공산 쿠데타가 일어났다. 공산화 작업이 완료되어 인민민주당 쿠데타에 적극 협력한 군인들의 도움으로[2] 모하마드 다우드 칸과 그의 일가족을 죽이고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세웠으며 초대 의장이 되었다.
2.1. 의장 재임기간(1978 ~ 1979)
| 소련을 방문한 타라키 |
그러나 이윽고 하피줄라 아민 지지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된다. 우상화에 도취된 타라키는 자아가 비대해져 측근들의 설득조차 제대로 듣지 않는 독선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결국 이 때문에 아민과 사이가 갈라지고, 할크파 내에서도 타라키와 아민 간의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1979년 1월 1일,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려 했으나, 이 개혁은 불만을 초래하고 농업 생산성도 감소했다. 타라키는 개혁에 대한 불만을 인식하고 정책을 철회했다. 그러나 후에 파르참파 출신인 바브라크 카르말 정부에서 일부 토지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타라키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촉진하고 강제 결혼을 금지하는 등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책을 도입했으나,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적 가치와 종교적 저항에 부딪혀 일부 개혁은 시행되지 않았다. 1978년에는 아프가니스탄 국가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기도 했다.
타라키는 1978년 12월 5일 소련과 20년 우호 조약을 체결하며 소련의 지원을 확대했다. 그러나 헤라트 봉기 이후, 타라키는 소련의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소련은 정치적 여파를 우려하여 이를 거부했다. 타라키는 브레즈네프와 협상하여 일부 지원을 얻었지만,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내 군사 개입을 거부했다. 타라키와 아민은 1978년 4월 혁명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타라키가 아민의 제안을 무시하며 갈등이 심화되었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아민은 타라키를 신격화하며 '동방의 별', '위대한 사상가'라는 칭호를 붙였으나, 타라키는 아민의 가족 승진을 비판하며 갈등을 촉발시켰다. 1979년 3월 헤라트 봉기 후, 타라키는 아민의 권력을 축소시키며 사실상 아민을 권력 밖으로 몰아넣었다. 타라키가 쿠바에서 열린 제6차 비동맹 회의에 참석한 동안, 타라키의 측근인 '4인조'는 아민 암살을 시도했으나, 아민은 소련 대사관의 경고로 이를 피할 수 있었다.
2.2. 최후
1979년 9월 11일, 타라키는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아민과 공항에서 만났으나, 아민은 타라키에게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고 비행기 착륙을 한 시간 지연시켰다. 타라키는 아민을 외교직으로 보내려 했으나 아민은 이를 거절하며 큰 언쟁을 벌였다. 그 다음날 타라키는 아민을 아르그 대통령궁에 초대했으나, 아민은 이를 거부하고 사임을 요구했다. 아민은 결국 아르그로 가서 타라키와 그의 측근들을 체포했다. 타라키는 9월 16일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정치국에서 자신이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발표하고, 아민은 새로운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타라키는 이후 아민의 명령으로 10월 8일 베개로 질식사당했다. 타라키의 죽음은 소련에 큰 충격을 주었고, 두 달 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 작품 리스트
3.1. 장편 소설
- 드 방 무사피리(De Bang musāfirī) (1957)
- 사라(Ṡaṛah)
- 상사르(Sangsār)
- 비 타르비야타 조이(Be tarbiyatah zoy)
3.2. 단편 소설
- 모치 : 다 란도 키소 토라가(Mochī : da lanḍo kīso ṭolagah)
3.3. 에세이
- 파하론 카 바이타(Pahāṛon̲ kā baiṭā)[3]
4. 기타
- 모하마드 다우드 칸 암살 직후 기자회견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영어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