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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中村元 / 1912.11,28~1999.10.10(향년 86세).일본의 인도철학자이자 불교학자로 인도철학과 불교학 연구 나아가 비교사상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1912년 시마네 현 마츠에시 토노마치에서 태어났으며, 마쓰에 지방 관청 관리직 출신의 집안이었다. 그의 집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도쿄도 분쿄구 도쿄제국대학 근처로 이사해 살게 되었는데, 평생토록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더 없이 사랑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1989년 ‘동양사상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마쓰에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도 했다고.1936년 도쿄 제대 문학부 인도철학범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43년부터 조교수로 재직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의 스승은 일본의 조동종 승려이자 마찬가지로 인도철학 연구자, 불교 연구자였던 우이 하쿠주(宇井伯寿)이며, 나카무라 하지메는 우이 하쿠주의 직계 제자로 평가된다.
1951년에 저서 《동양인의 사유방법》이 높은 평가를 얻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로부터 일본인 최초의 객원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이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50회 넘게 초빙되어 불교 관련 강의를 맡게 된다. 1954년에는 드디어 도쿄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학계에서 은퇴한 뒤인 1970년 재단법인 동방연구회를 설립하고 원장을 맡아 오랫동안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학사원 은사상과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비교사상학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쿄대학에서 한국관계학을 처음으로 개강하였고[1] 여러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개설하게 하는 등 한일불교학 교류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81년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원폭피해자병원 건립 목적으로 일본에서 한국피폭자전상자구원기금설립준비사무국이 설립될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한 120여 명 가운데 나카무라 하지메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
한국의 승려나 불교학자들 가운데에도 그에게서 배운 이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 연구가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는 동국대학교 김지견 박사.[2] 그의 회고에 따르면 나카무라 교수는 다소 엄격한 사람이었던지 제대로 공부, 연구하지 않고 들어갔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되니 그럴 거면 그냥 오지 마라"라는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 또한 1968년 도쿄대 투쟁 당시 전공투 소속의 학생들이 이따금 교수나 학교 행정 책임자들을 납치해 단교(團交)라 불리는 일종의 인민재판 비슷한 것을 벌이곤 했는데, 인도철학연구실 주임이었던 나카무라 하지메에게도 이런 학생들이 찾아왔을 때 나카무라는 "너희는 학생이 아니다. 나는 공부하는 학생 아니면 학생으로 인정할 수 없다. 학생이 아닌 너희가 말하는 단교에 나는 응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
또한 나카무라 하지메는 일반인들이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생에 걸쳐 어려운 한문 술어, 통상적으로 사용치 않는 불교 용어 등을 일반적인 현대어로 표현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불교 용어에 대한 사전인 《불교어대사전》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 이 해에 오스트리아 학사원 원격지 회원에 선출되었는데, 그만 집필하던 원고를 분실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분실 한 달 뒤에야 새로 집필을 시작해 1975년에 간행되었다.
1999년 10월 10일에 향년 86세로 사망하였다. 계명은 자서원향학창원거사(自誓院向學創元居士)[3] 유해는 유언에 따라 고향 시마네현 마쓰에시 신고우지(眞光寺), 도쿄도 공동묘지 타마레이엔(多磨霊園), 인도 갠지스강 등에 분골 매장되었다.
나카무라 하지메 박사가 별세한 5년 후인 2004년 3월, 인도 뉴델리에서 박사의 업적을 현창하는 ‘일본, 인도불교철학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 식장에는 나카무라 하지메 박사의 영정과 전 40권 한 질로 된 《나카무라 선집(選集)》(결정판) 외 많은 저서를 쌓아 놓고 전시했는데, 세미나 참석자 중 한 사람은 나카무라 하지메의 영정 앞에서 오체투지로 예의를 갖추기도 했다고 한다. #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카무라의 저서를 한 번씩은 보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도 그의 저작이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동서문화사에서 〈동양인의 사유방법〉 (78년)이 출간된 이후[4] 김영사에서 〈불타의 세계〉, 민족사에서 〈불교경전산책〉, 경서원에서 〈불교의 본질〉·〈종교와 사회윤리〉, 불교시대사에서 출판된 〈불교정치사회학〉·〈용수의 삶과 사상〉 등이 번역 출간되었다.
[1] 나카무라 하지메는 일본 불교가 한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 과정에는 한국 불교의 영향이 컸음을 밝힌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가 주목한 한국의 승려 가운데 한 명이 고려의 승려 균여로, "균여 연구를 통해 한일 양국의 화엄 사상 규명이 가능하다"며 균여를 높이 평가하였다.[2] 1973년에 도쿄대학에서 《신라화엄사상의 연구》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에 보조지눌의 저술인 《화엄론절요》를 일본 가나자와 문고(金澤文庫)에서 재발굴하여 도쿄대학 문학부에서 영인판을 냈다. 재발굴이라고 쓴 것은 이미 이종익(李鍾益)이 다이쇼 대학(大正大學) 재학 중이던 1941년에 발견하여 《불교신지(佛敎新誌)》 제36호(1942년 3월호)에 〈고려보조국사 화엄론의 발견(高麗普照國師 華嚴論の發見)〉이란 제목으로 발표까지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종익이 처음 발견했을 때는 두 벌을 필사해 한 벌은 자신이 갖고 다른 한 벌은 송광사에 증정했던 것과 달리, 김지견은 이를 영인판을 내고 아울러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송광사 그리고 역경원의 탄허에게도 기증하여, 한국 학계와 《화엄론절요》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해지는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이종익 자신도 "《화엄론절요》의 학계의 보급은 김지견의 공이 크다"고 평했을 정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불교의 고승으로 꼽히는 성철은 보조지눌의 돈오점수 교리를 "내 정원에 돋아난 당장에 찍어내 버려야 할 뿌리가 나쁜 나무"라고 부정했고, 해인사 선방과 강원에서 지눌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약칭 절요)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절요를 배우고자 하는 해인사 학인들은 인근 통도사나 범어사에서 절요를 배울 수밖에 없었고# 송광사로부터는 "지금 뭐 분서갱유하자는 거냐"라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3] 일본에서는 대체로 불교식으로 장례를 거행하며, 장례를 맡은 절에서 망자에게 계명을 준다.[4] <동양인의 사유방법>은 1990년 까치글방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