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大闘争
도쿄대 투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야스다 강당의 모습이다. 그을린 정면부는 격렬했던 전투의 유일한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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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連帯を求めて孤立を恐れず)
도쿄대 투쟁은 1968~1969년 전학공투회의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도쿄대학뿐만 아니라 메이지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니혼대학 등 도쿄도 소재 여러 대학이 참가했다.
2. 투쟁의 시작
2.1. 1968년
1968년 1월 29일 도쿄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기존의 인턴 제도 대신 도입되는 등록 제도에 반대하며 시위를 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3월 12일 도쿄대는 시위했던 학생 17명을 퇴학시킨다고 하였으나 26일 의학부 강사 2명이 17명 중 1명은 대학 측에 오인이 있다고 반박하자 28일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던 야스다 강당에 의학부 학생들이 모여들어 졸업식을 중지시키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의학부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학부는 6월 15일 야스다 강당을 점령했고 17일에는 경찰 기동대 1200여 명이 도쿄대학으로 들어왔다. 20일부터 학생들이 경찰의 출동에 항의하면서 법학부를 제외한 9개 학부가 파업에 들어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오코치 가즈오 총장은 야스다 강당에서 회견을 열었지만 7월 2일 학생들은 야스다 강당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며 투쟁을 시작했다.
투쟁 시작 3일 만에 도쿄대학에는 야마모토 요시타카[1] 이마이 기요시[2]를 중심으로 도쿄대학 전학공투회의가 결성되어 교양학부까지 무기한 파업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져 갔다. 8월 28일에는 전학공투회의 학생 200여 명이 의학부 본관을 점거하는 일이 발생했고 9월 9일에는 의학부 졸업시험이 있었지만 수험 대상자는 전체 105명의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45명에 불과했다. 결국 의학부 졸업시험은 연기되었고 18일 의학부는 당분간 휴학한다고 하였다.
22일에는 전공투 학생 250여 명이 의학부 부속병원 외과계 의국·연구동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봉쇄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투쟁 내내 거의 활동을 하지 않던 법학부도 10월 12일 파업에 들어가 1877년 개교 이후 처음으로 전체 학부가 무기한 총파업을 벌였다!
11월 22에는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를 두고 전공투 계열 학생 7,000여 명과 이를 저지하려는 공산당 계열 학생 7,000여 명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결국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는 취소되었다.
급기야 12월 29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1969년 도쿄대 입시 중지를 발표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2.2. 1969년
오코치 가즈오 총장이 사임하고 새로운 총장이 된 가토 이치로가 경시청에 기동대 지원을 요청하자 1월 9일 기동대가 대학 내에 진입하였고 10일에는 지치부미야 럭비장에서 도쿄 대학 7학부 학생집회를 열어 민청계와 학원 정상화를 추구하는 논포리 학생과 교섭을 통해 학부의 파업에 대해 수습을 결의했지만 여전히 점거를 지속하는 전공투 학생과는 의견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16일 바리케이드 철거를 요청하였다.2.2.1. 야스다 강당 사건
安田講堂事件1월 18일 오전 7시를 기하여 투입된 기동대 8,500명은 의학부 종합중앙관과 의학부 도서관에서 바리케이드 철거를 시작했고 콘크리트, 화염병 등을 던지는 학생들의 저항을 막으면서 각 학부의 시설 봉쇄를 해제하고 야스다 강당을 포위했다. 여기까진 순조롭게 일이 잘 풀렸다.
그러나 오후 1시부터 야스다 강당 바리케이드 철거 작전을 시작한 기동대는 학부 철거 작업 때와는 차원이 다른 학생들의 저항을 체험하게 되었다.
2000여 명 전후의 학생들이 창문을 깨고 화염병을 던지는가 하면 강당내의 책상과 의자로 강당 입구를 막아 불을 지르고 옥상에선 벽돌과 콘크리트 더미를 던졌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저항에 당황한 기동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5시 40분이 돼서야 작전을 중단했다. 당시 야스다 강당에는 학부 시설을 포기하고 강당으로 온 학생들과 투쟁을 지원하러 온 메이지대학, 니혼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메이지대학 학생이자 야스다 강당 수비대장이었던 요네다 류스케는 강당의 구조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기동대의 진압을 방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작전은 다음 날로 연기되었으며 19일 오전 6시 30분 기동대는 경찰 헬기와 살수차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진했다. 기동대는 작전 시작 9시간 20분 만에 3층 대강당을 점령하였고, 오후 5시 46분이 돼서야 상황은 종료되었고 총 457명이 체포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야스다 강당에 모인 전공투 파벌들 중 혁마르파는 전력을 보전하겠다며 이탈해 버렸다. 전원옥쇄를 결의한 중핵파 등 다른 파벌들은 퇴각하는 혁마르파의 등 뒤에다 대고 쌍욕을 퍼부었다고.
3. 피해
야스다 강당 사건 이전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사건 이후에는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다. 구체적인 작전 없이 돌입한 기동대 측에서 710명이 부상, 그중 31명이 중상을 입었고 해생 측은 71명 부상, 47명이 중상을 입었다. 학생들의 방화와 기동대의 진압 중 발생한 재산 피해 또한 어마어마하다.사건 이후 야스다 강당은 23년 동안 폐쇄되었다고 한다.
4. 이후
도쿄대 투쟁 후 1년 사이에 국립대학 75개 중 68개교가, 공립대학 34개 중 18개교가, 사립대학 270개 중 79개교가 전공투 투쟁에 가담했다. 교토대학을 시작으로 와세다대학, 도호쿠대학, 시즈오카대학, 구마모토대학, 오사카대학, 규슈대학, 히로시마대학 등 일본의 주요 국공립 대학과 사립대학의 80%(총 165개)가 전공투 투쟁이나 바리케이드 봉쇄를 시작했다.대학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에까지 영향을 줘 시험제, 교복 폐지 등을 주장하며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고등학교 또한 적지 않았고[3] 교복을 입지 않고 등교하거나 교복을 변형시켜 등교하는 보이콧 운동이 확산되자 당시 중, 고등학교 표준형 교복이었던 가쿠란이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1969년에 일본 문부과학성이 도쿄대학 입시를 중지시켜서 대부분의 학생이 교토대학으로 빠졌다. 그래서 도쿄대에는 69학번이 없고 유독 교토대 69학번이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나비효과를 낳았다. 그런데 교토대 입학생도 교토대 투쟁 때 전공투에 가담하거나 바리케이드를 봉쇄하는 데 힘을 썼다고 한다(...).
도쿄대 투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전공투들은 과격해지기 시작했고 이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과격의 도가 지나치면서 학생운동은 일본 국민들의 동의를 이끌지 못하게 되었고 동대전공투 의장이었던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체포되고 여러 주요 동력원들이 연달아 체포되면서 힘을 잃어 결국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