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25 18:54:34

김병지/클럽 경력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김병지/선수 경력
,
,
,
,
,

1. 개요

김병지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울산 현대 시절

2.1. 현대 호랑이 시절

파일:울산시절.jpg
파일:GOMCAM 20210716_2059030643.mp4_20210716_205956.gif
98년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극적인 골을 넣는 김병지[1]
현대 호랑이 시절 기록
(1992~1995년)[2]

1992년 K리그: 10경기 11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6 7
아디다스 컵 4 4
합계 10 11
팀 성적: K리그 3위[3], 아디다스컵 5위[4]

1993년 K리그: 25경기 19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1 15
아디다스 컵 4 4
합계 25 19
팀 성적: K리그 3위, 아디다스컵 준우승

1994년 K리그: 27경기 27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4 24
아디다스 컵 3 3
합계 25 19
팀 성적: K리그 4위[5], 아디다스컵 5위

1995년 K리그: 35경기 26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8 21
아디다스 컵 7 5
합계 35 26
팀 성적: K리그 3위[6], 아디다스컵 우승

2.2. 울산 현대 호랑이 시절

울산 현대 호랑이 시절 기록
(1996~2000년)[7]

1996년 K리그: 30경기 37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5 33
아디다스 컵 5 4
합계 30 37
팀 성적: K리그 우승[8], 아디다스컵 4위

1997년 K리그: 22경기 19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13 9
아디다스 컵 1 0
프로스펙스 컵 6 8
FA 컵 2 2
합계 22 19
팀 성적: K리그 3위[9], 아디다스컵 3위, 프로스펙스 컵 8위[10]

1998년 K리그: 25경기 33실점 1골
대회 경기 실점 득점
K리그 22 31 1
아디다스 컵 3 2 -
합계 25 33 1
팀 성적: K리그 준우승, 아디다스컵 우승

1999년 K리그: 23경기 35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12 21
대한화재 컵 8 11
삼보컴퓨터 FA 컵 3 3
합계 23 35
팀 성적: K리그 6위, 대한화재 컵 3위, 삼보컴퓨터 FA 컵 4강

2000년 K리그: 33경기 41실점 2골
대회 경기 실점 득점
K리그 26 34 1
대한화재 컵 3 0 0
아디다스 컵 2 4 1
서울은행 FA 컵 2 3
합계 33 41 2
팀 성적: K리그 10위, 대한화재 컵 5위, 아디다스컵 6위
울산 현대 통산 230경기 248실점 3골(K리그 177경기 195실점 2골/리그 컵 46경기 45실점 1골/FA컵 7경기 8실점)
파일:울산시절.gif
울산 시절 크로스 차단하는 김병지
파일:김병지 ▶ 90년대 한국 최고의 골키퍼 ● 전성기 시절(1995-2000) 선방 모음_20190912_222551.gif
고종수의 프리킥을 선방하는 김병지

1992년 7월 전역과 함께 울산 현대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발레리 사리체프를 앞세운 천안 일화 천마의 3연속 우승 쇼크에 울산 현대를 제외한 K리그 전 구단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는 붐이 일어났을 때도, 그만은 토종 골키퍼의 자존심을 지켰다. 덤으로 울산 현대는 골키퍼 명가의 명성을 이어 간다.[11]

울산 현대의 1996년 K리그 우승과 1998년 K리그 준우승에 일조한다. 특히 1998년 포항과의 PO 2차전에서 보여준 헤딩 골은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은 1:1, 후반전 추가 시간, 울산이 프리킥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김병지가 포항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려왔고 때마침 올라온 골을 그대로 헤딩, K리그 사상 최초로 골키퍼 필드 골을 넣었고 플레이오프 1, 2차전 합계 스코어 4:4를 만들면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12] 결국, 팀은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다.[13]

3. 포항 스틸러스 시절

파일:포항시절.png
파일:[K리그 타임머신] 김병지-이운재, 레전드 GK의 맞대결.mp4_20210717_131010.gif
2004년 챔피언결정전 김병지 승부차기 선방
포항 스틸러스 시절 기록
(2001~2005년)

2001년 K리그: 29경기 28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2 22
아디다스 컵 3 2
서울은행 FA 컵 4 4
합계 29 28
팀 성적: K리그 5위, 아디다스컵 5위, 서울은행 FA 컵 준우승

2002년 K리그: 25경기 31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1 27
하나-서울은행 FA 컵 4 4
합계 25 31
팀 성적: K리그 6위, 하나-서울은행 FA 컵 준우승

2003년 K리그: 43경기 43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43 43
합계 43 43
팀 성적: K리그 7위[14]

2004년 K리그: 39경기 39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7 24
삼성 하우젠 컵 12 15
합계 39 39
팀 성적: K리그 준우승[15], 삼성 하우젠 컵 7위

2005년 K리그: 39경기 32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4 22
삼성 하우젠 컵 12 9
하나은행 FA 컵 3 1
합계 39 32
팀 성적: K리그 6위, 삼성 하우젠 컵 3위
포항 스틸러스 통산 175경기 173실점(K리그 137경기 138실점/리그 컵 27경기 26실점/FA 컵 11경기 9실점)

2001년에는 국내 선수 최고 이적료를 받고 울산의 최대 라이벌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 2004년 K리그 준우승에 여러모로 일조했다. 수원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는 말 그대로 야신 모드로 엄청난 슈퍼세이브를 경기 내내 보여주며 무승부를 이끌어 냈다. 2차전 승부차기에서는 포항의 5번째 키커로 등장했는데, 김병지가 실패하면 수원의 승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김병지가 찬 공은 결국 영원한 국가대표 라이벌 이운재의 손에 막히며 팀도 패하고, 본인도 라이벌에게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4. FC 서울 시절

파일:서울시절.jpg
파일:김병지 선방.gif
이관우의 발리슛을 선방하는 김병지
FC 서울 시절 기록
(2006~2008년)

2006년 K리그: 43경기 37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7 23
삼성 하우젠 컵 13 11
하나은행 FA 컵 3 3
합계 43 37
팀 성적: K리그 4위[16], 삼성 하우젠 컵 우승, 하나은행 FA컵 8강

2007년 K리그: 41경기 28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6 16
삼성 하우젠 컵 12 9
하나은행 FA 컵 3 3
합계 41 28
팀 성적: K리그 7위, 삼성 하우젠 컵 준우승, 하나은행 FA컵 8강

2008년 K리그: 6경기 7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5 7
삼성 하우젠 컵 1 0
하나은행 FA 컵 1 1
합계 7 8
팀 성적: K리그 준우승, 삼성 하우젠 컵 9위
FC 서울 통산 91경기 73실점(K리그 58경기 46실점/리그 컵 26경기 20실점/FA 컵 7경기 7실점)

2006년에는 FC 서울로 이적하여 2006년 팀의 하우젠 컵 우승에 공헌하고 2007 시즌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2005년에는 통산 무실점 기록[17]을 경신하였다. 2006년 K리그 사상 2번째로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 그 해 최다출장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에는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기록을 153경기로 경신했다. 이 기록은 칠레와의 A매치 경기에서 입은 부상[18] 때문에 마감되었다. 이 때 부상으로 잠시 전열에서 이탈한 사이 후배 골키퍼 김호준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던 귀네슈 감독의 의향에 따라 2008 시즌에는 김호준의 백업으로 머물게 된다. 이것을 크게 불쾌하게 여겨 이적 후 축구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전이었다면 우승했을거라며 2008시즌 준우승에 머무른 서울과 귀네슈 감독을 디스했다.[19]
파일:/image/139/2008/12/30/SK004_20081230_160101.jpg
K리그 통산 500번째 경기 날 등번호 500번 유니폼을 들고
파일:/image/410/2012/10/07/20121007_1349597951.jpg_59_20121007172116.jpg
K리그 통산 600번째 경기 날 경남의 모든 선수가 기념 티셔츠를 입었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AKR20150727026900007_01_i.jpg
세 아들과 함께 시축을 한 그의 K리그 통산[20] 700번째 경기날!

5. 경남 FC 시절

경남 FC 시절 기록
(2009~2012년)

2009년 K리그: 31경기 30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6 28
피스컵 코리아 3 2
하나은행 FA 컵 2 0
합계 31 30
팀 성적: K리그 4위[21], 피스컵 코리아 9위, 하나은행 FA 컵 16강

2010년 K리그: 37경기 50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9 34
포스코 컵 6 7
하나은행 FA 컵 2 9
합계 37 50
팀 성적: K리그 6위, 포스코 컵 3위, 하나은행 FA 컵 16강

2011년 K리그: 33경기 44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30 40
러시앤캐시 컵 3 4
합계 33 44
팀 성적: K리그 8위[22], 러시앤캐시 컵 3위[23]

2012년 K리그: 42경기 48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37 44
하나은행 FA 컵 5 4
합계 42 48
팀 성적: K리그 8위, 하나은행 FA 컵 준우승
경남 FC 통산 143경기 172실점(K리그 122경기 146실점/리그 컵 12경기 13실점/FA 컵 9경기 13실점)
파일:GOMCAM 20210716_2154160877.mp4_20210717_135923.gif
이상호의 페널티킥을 선방하는 김병지
파일:GOMCAM 20210716_2156390905.mp4_20210717_135911.gif
프리킥 선방 후 2차 선방하는 김병지
서울에서 주전 기회를 받지 못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김병지는 2009년 고향 팀인 경남 FC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이적한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그는 5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당시 등번호 500번 유니폼을 제작했는데, 처음에는 프로연맹에서 반대하였지만 이후 500번째 경기에서 500번 유니폼 착용을 허락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경기에서 4골이나 먹는 바람에 통산 500실점이라는 그다지 썩 좋지 못한 기록을 세웠다#.

2012년 6월 27일 통산 200번째 클린시트를 달성하였다. 2012년 10월 7일, 서울을 상대로 대망의 6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2012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는데, 경남 FC 주전 수비수 이재명과 함께 전남행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6. 전남 드래곤즈 시절

전남 드래곤즈 시절 기록
(2013~2015년)

2013년 K리그: 36경기 42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36 42
합계 36 42
팀 성적: K리그 10위

2014년 K리그: 39경기 56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38 53
하나은행 FA 컵 1 3
합계 39 56
팀 성적: K리그 7위

2015년 K리그: 31경기 36실점
대회 경기 실점
K리그 27 30
하나은행 FA 컵 4 6
합계 31 36
팀 성적: K리그 9위, 하나은행 FA 컵 4강
전남 드래곤즈 통산 106경기 134실점(K리그 101경기 125실점/FA 컵 5경기 9실점)
파일:화질개선2.gif
서울의 완벽한 득점찬스를 선방하는 김병지
파일:화질개선.gif
김두현의 슛을 선방하는 김병지

결국 전남 드래곤즈로의 이적을 합의했다.# 여담으로, 김병지 슬하의 아들 셋이 모두 축구를 하는데, 모두 전남 드래곤즈의 유스 팀으로 옮긴다고 한다.

특이한 것이 경남 시절에는 분명 플레잉 코치로 입단했는데, 전남에 와선 플레잉 코치가 아닌 선수로 입단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참고로 김병지가 전남에 입단하기 전, 전남의 주전 키퍼는 다름 아닌 이운재다.[24]

게다가 하석주 감독과는 겨우 3살 차이. 그나마도 하석주가 2014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고 수석 코치인 노상래가 감독을 하면서 코치진이 리뉴얼되었는데, 김병지보다 나이 많은 코치가 한 명도 없다.[25]

그리고 2015년 7월 26일, 대망의 7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700번째 경기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3대 1로 승리를 했다. 777번째 경기가 자신의 은퇴 경기가 될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 700경기 인터뷰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축구를 하고 있는 장남 김태백 군이 프로에 데뷔할 때까지 뛸 거라고 하니까 어쩌면 777경기보다 더 오래할지도 모른다. ##

2015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로 이적 시장에 나왔다. 그러나 이미 40대 중반의 최고령인데다가 후술할 막내아들 폭행사건 수습의 영향으로 2016 시즌 전반기엔 소속팀을 구하지 못하고 무적으로 남았다.

7. 은퇴

통산 745경기 800실점 3골(K리그 595경기 650실점 2골/리그 컵 111경기 104실점 1골/FA 컵 39경기 46실점)
2016년 7월 19일, 김병지는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최고령의 나이에 6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커리어가 워낙 긴 이상 결코 저렴하지 않을 몸값(대우), 또 앞서 말한 사생활 이슈가 결국 그를 은퇴의 길로 끌고 갔다. 기사 링크 K리그 최고의 선수라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이렇게 그라운드 밖으로 나아갔다. 통산 최다 출전(706경기)[26], 통산 최다 무실점(229경기), 통산 최다 연속 무교체 출전(153경기), K리그 최고령 출장(45년 5개월 15일)의 대기록을 남긴 채.

2015 시즌까지 무려 24시즌을 현역으로 뛰었다. K리그는 2015년 기준으로 32시즌이다.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현역 1998 월드컵 출전자였으며[27] 그가 2016년 7월 20일 은퇴한 뒤 2002 월드컵 현역멤버는 17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현영민만 남아 있었을 정도.

은퇴식은 그의 프로 첫 팀 울산 현대의 주최 하에 2016년 9월 18일 일요일 전성기를 보낸 또다른 소속팀이었던 포항 스틸러스와의 울산문수축구경기장 경기에서 열렸다.


[1] 1998년 울산과 포항의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 골득실로 비기기만해도 탈락하는 상황, 1:1이었던 후반 종료 40여초를 남기고 극적인 골을 넣은 김병지는 이후 진행된 승부차기에서도 활약하며 팀의 승부차기 4:1 승리를 이끈다.[2] 구단명이 '현대 호랑이'었던 당시 김병지가 뛴 기간[3] 당시 K리그는 포철, 일화, 현대, LG, 대우, 유공 등 총 6개 구단이 존재했고 각 팀당 30경기를 치렀다.[4] 당시 K리그 리그컵 명칭으로 토너먼트가 아닌 리그제로 운영되었다.[5] 기존 6개 구단에 버팔(전북현대의 옛 명칭) 팀이 추가되어 총 7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30경기를 치렀다.[6] 기존 7개 구단에 전남 팀이 추가되어 총 8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28경기를 치렀다.[7] 구단명이 '울산 현대 호랑이'었던 당시 김병지가 뛴 기간[8] 기존 8개 구단에 천안 팀이 추가되어 총 9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32경기를 치렀다.[9] 기존 9개 구단에 대전 팀이 추가되어 총 10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18경기를 치렀다.[10] 97년 신설된 또 하나의 리그 컵으로 아디다스컵과 마찬가지로 리그제로 운영되었다.[11] 1980년대 렌스베르겐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선수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던 거와는 반대로, 1990년대 울산 현대는 이상하리만치 외국인 선수 영입을 안 하던 구단이었다. 이건 2000년대 들어서 파울링요의 영입으로 깨졌다.[12] 당시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이 없어 양팀의 합계 스코어만 같으면 무조건 연장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었지만,다득점 원칙 규정이 있었다면 이 골이 그대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결정짓는 골이 되었을 것이다.[13] 공교롭게도 이 날은 김병지 아내의 25번째 생일이었다.[14] 기존 10개 구단에 광주 상무와 대구 팀이 추가되어 총 12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44경기를 치렀다.[15] 기존 12개 구단에 인천 팀이 추가되어 총 13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24경기를 치렀고 상위 4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뤘다.[16] 기존 13개 구단에 경남 팀이 추가되어 총 14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26경기를 치렀고 상위 4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17] K리그+컵 대회[18] 허리 디스크로 당시 고양시의 명지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경기 도중 골킥이 하프라인조차 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19] 그러나 2008 시즌 서울은 수원과 부산에게 각 1번씩만 패했을 뿐 충분히 우수한 시즌을 보냈고 김호준은 리그 24경기 23실점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다. 이 해 서울이 우승 못한 건 슈퍼매치까지 이겨놓고 선수들 멘탈관리 제대로 못하고 부산전에 터져서 리그 1위를 차지할 기회를 날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데얀이 결정적인 찬스를 죄다 날려버려 홈에서 벌어진 결승 1차전에서 무승부에 그친 탓이다. 2008 시즌 서울의 무관은 그냥 멘탈 문제 이거 하나로 정리된다. 물론 베스트일레븐에 많았던 젊은 선수들이 결정적일 때나 화가 날 때 우왕좌왕하는 사이 주장이었던 이을용과 베테랑 김한윤이 이를 컨트롤해주기는커녕 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했던데다 또다른 베테랑 이민성은 시즌 도중 좋지 못한 이유로 팀을 나갔다 보니 터진 게 당시 서울의 멘탈 문제인지라, 산전수전 다 겪은 김병지가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고 팀의 중심이 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20] K리그-K리그 클래식으로 넘어간다.[21] 기존 14개 구단에 강원 팀이 추가되어 총 15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28경기를 치렀고 상위 6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22] 기존 15개 구단에 상주 팀이 추가되어 총 16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30경기를 치렀고 상위 6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23] 2011년을 마지막으로 리그컵 폐지[24] 이운재는 2012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25] 노상래, 김태영이 그나마 그와 동갑인데, 둘 다 생일은 김병지보다 늦다.[26]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K리그에서는 FA컵 대회 기록을 제외한 경기수를 공식 통산 출전 기록으로 보고 있다. 현재 K리그 선수들의 통산 기록은 FA컵 기록을 포함하는 상황이라 아이러니한 부분)[27] 이 사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병지뿐만 아니라 2014년 7월 20일에 은퇴한 최은성도 노장 골키퍼를 대표해서 나온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최고령 선수 기록을 세운 콜롬비아의 파리드 몬드라곤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것도 포인트.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42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42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