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김종태(金鍾泰) |
호 | 용연(龍淵) |
본관 | 영광 김씨[1] |
출생 | 1909년[2] 7월 15일[3] |
전라남도 장흥군 남하면 원등리 (現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덕암리 원등마을 123번지) | |
사망 | 1956년 8월 23일[4] (향년 47세) |
전라남도 장흥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3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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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두환은 1909년 7월 15일 전라남도 장흥군 남하면 원등리(現 장흥군 용산면 덕암리 원등마을 123번지)에서 아버지 김공식(金恭植, 1887. 4. 17 ~ 1938. 1. 30)과 어머니 경주 이씨(1890 ~ 1914. 5. 29)[5]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우수공(愚叟公) 김상범(金尙範, 1583 ~ 1643. 12. 5)의 10대 주손인 김동식(金東植, 1880. 9. 5 ~ 1900. 8. 6)에 입양되었으며, 덕암리 132번지[6]로 거주하기도 했고, 덕암리 133번지[7]에 거주하기도 했다.그는 11살 되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고, 12살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1920년 장흥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6년 졸업했다. 1927년 신간회 장흥지회가 조직되자 가입하여 1929년 12월 11일 회계위원 및 재무부장에 선출되었고, 1931년 5월 이후 해소되기 전까지 활동했는데, 이 사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기도 했다. 또한 장흥군 남상면·남하면 일대의 뜻 있는 청년들을 모아 1929년 1월 13일 남흥청년동맹(南興靑年同盟) 기성회를 조직하고 당일 7촌 재종숙(再從叔) 김미식(金美植, 1907. 8. 7 ~ 1978. 2. 22)[8]·유재성·정진수(丁瑨壽)과 함께 기성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3월 25일 장흥청년동맹 상무·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 뒤 1932년 12월 장흥야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3년 8월 장흥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했고, 1933년 10월에는 장흥군 용산면 덕암리에서 동지들과 함께 사회주의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한 뒤 장흥군에서 동지규합 및 조직 확대를 위해 활동했다. 또한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독립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장흥군 관내 각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장흥군에서 세포반을 조직하며 조직 확대에 힘쓰던 중 1934년 2월 일본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당초에는 1934년 9월 1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재차 체포되었지만 1936년 1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에서 공소를 제기했고, 1936년 3월 2일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그 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의 공소로 1937년 7월 1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2심이 열렸고, 이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6개월형(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365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결국 목포형무소,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41년부터 1945년 8.15 광복 전까지는 임산물을 판매하는 상회를 경영하며 조용히 지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해 장흥지부 총무부장 등 임원을 역임했고, 장흥청년단 간부를 역임했다. 1946년 1월 조선인민당 장흥지부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당이 분열되자 탈당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해 임원을 역임했다. 그 밖에 임시대책위원회 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1952년 지방선거에서 초대 전라남도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역임했고, 1956년 8월 23일 장흥군에서 별세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11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12번지에 김두환의 5대조 김상철(金尙澈, 1776. 11. 1 ~ 1859. 10. 3)이 영광 김씨 종중과 의논해 1824년(순조 4) 후손의 교육을 위해 창건한 월산재(月山齋)가 있는데, 1984년 2월 2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이 재실은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 불타 없어질 뻔 했는데, 당시 장흥군 지역의 선거투표함을 수송하던 차량이 월산재 앞 대밭 곁에 있던 도로를 지나갈 때 쯤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반대하던 좌익 세력이 숨어있다가 수송차량을 공격해 장흥경찰서 소속 경찰들과 한바탕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때 격분한 장흥경찰서장 남정수 총경[9]이 월산재 일대를 모두 불태워버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김두환과 그의 7촌 재종숙 김미식은 평소 안면이 있던 장흥경찰서장에게 유적의 중요성을 간청해 재실을 불태워 없애는 대신 재실 앞에 있는 대나무밭을 채벌하기로 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1] 문경공파(文敬公派)-우수공(愚叟公) 원등파(元登派) 20세 환(煥) 항렬.[2] 1908년생이라는 자료도 있다.[3] 영광김씨문경공파보 권1 93쪽에는 7월 5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음력 7월 18일.[5] 이병종(李秉鍾)의 딸이다.[6]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 이 지번은 김두환과 10촌 지간의 족조(族祖)인 김한충(金漢忠, 1856. 5. 2 ~ 1926. 9. 20)의 소유였다. 이후 1979년 5월 10일 김두환의 7촌 재종숙(再從叔) 김중식(金仲植, 1913. 10. 9 ~ 1981. 12. 7)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이어 1995년 6월 13일 김중식의 장남이자 김두환의 8촌 삼종제(三從弟)인 김가환(金加煥, 이명 김묘환金卯煥, 1947. 2. 1 ~ )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2016년 12월 29일 현재 김두환의 9촌 삼종질(三從姪)이자 김가환의 장남 김양구(金亮求, 1972. 5. 20 ~ ), 차남 김재석(金在石, 1979. 7. 1 ~ ), 장녀 김수진(金修辰, 1974. 9. 23 ~ ), 차녀 김연진(金連珍, 1977. 3. 19 ~ )의 공동소유로 남아 있다.[7] 1915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5년 당시에는 김후립(金厚立)의 소유였다가 1967년 8월 24일 김두환과 1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대식(金大植, 1913. 9. 16 ~ 1977. 2. 19) 외 5명의 공동소유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후 1984년 9월 13일 김두환과 11촌 지간의 다른 족숙인 김봉식(金奉植, 1925. 9. 4 ~ )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991년 1월 25일 김대식의 차남 김부환(金夫煥, 1948. 2. 24 ~ )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뒤 현재도 김부환의 소유이다.[8] 김두환과 함께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목포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34년 9월 1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된 기록이 있다. 8.15 광복 후에는 초대 용산면장, 초대 용산면의회 의장, 농협중앙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9] 재임기간 : 1948. 3. 17 ~ 1948.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