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무백(武伯)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901년 2월 15일 |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 (現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554번지)[2] | |
사망 | 1960년 12월 7일[3] (향년 59세) |
경상북도 봉화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26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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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조선 명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권벌의 15대손이다.
2. 생애
1901년 2월 15일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유곡리(現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554번지)에서 아버지 옥암(玉庵) 권문섭(權文燮, 1878 ~ 1906. 3. 18)[4]과 어머니 진주 강씨(1874 ~ 1955. 2. 21)[5]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서설당 10대 주손인 형 권돈(權墩, 1897 ~ 1967. 9. 14)[6]이 있었으며, 아버지 권문섭은 1901년 내부 주사(內部主事)에 임명된 바 있다.1919년 3월, 내성공립보통학교(現 봉화초등학교) 4학년 졸업반이던 이귀락(李龜洛)은 경상북도 대구부(現 대구광역시)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이 사실을 고향 봉화군으로 돌아와 당시 내성공립보통학교 촉탁 교사로 근무하던 이육상(李陸相)에게 알렸다. 이에 이육상은 3월 18일 내성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정하고, 4학년생 권호기를 비롯한 내성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던 학생들과 내성사립학교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 66매와 기미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했다.
이튿날인 3월 18일 내성면 장터에서 이육상과 권호기를 비롯한 주도자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장터에 있던 여러 군중들에게 나눠주었고,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곧 일본 제국 육군 헌병에 만세시위는 해산당하고 이육상과 권호기를 비롯한 참여 학생 12명이 모두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7]을 선고받아 당일 출옥했다.
1960년 12월 7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별세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안장되었다가 2021년 11월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에 이장되었다.
[1] 복야공파(僕射公派) 충정공파(忠定公派) 두익(斗翼)계 35세 기(基)자 항렬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2] 이 지번에는 현재 국가민속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된 서설당(瑞雪堂)이 위치해 있는데, 이는 권벌의 차남 석정(石亭) 권동미(權東美, 1525. 7. 15 ~ 1585. 3. 27)의 4대 주손 서설당(瑞雪堂) 권두익(權斗翼, 1651 ~ 1725)이 1708년(숙종 34) 건립한 것이라 전한다. 권호기는 권두익의 10대손이며, 9대 주손 권문섭(權文燮, 초명 권영한(權寧漢), 1878 ~ 1906. 3. 18)의 차남이다.[3] 양력 1961년 1월 23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61년 10월 15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4] 초명은 권영한(權寧漢), 자는 공유(公柔).[5] 강황(姜鎤)의 딸이다.[6] 자는 목경(穆卿).[7] 형사사건부에는 3년으로 기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