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루바츠 성채
인근 다뉴브 강 협곡인 철의 문
1. 개요
세르비아어 Голубац영어 Golubac
세르비아 동부의 도시. 골루박, 골루바크로도 표기된다. 스메데레보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다뉴브 강 남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1천 5백명이다. 동쪽 3km 지점에 있는 골루바츠 성채가 랜드마크로 유명하다. 14-15세기 헝가리 왕국과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동쪽으로 다뉴브 강이 카르파티아 산맥과 발칸 산맥을 갈라 놓으며 좁아지는 협곡인 '철의 문'이 있으며, 동쪽 70km 지점에 트라야누스 다리 유적이 있다.
2. 역사
로마 제국 시기 쿠파이 (Cuppae)란 식민 도시가 있었고, 554년경 도시 지위 (콜럼브리아)가 주어졌다. 1334년 헝가리 왕국의 카로이 1세가 성채를 정복했고, 1382년에는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포위해 점령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후 오스만 제국이 일시 점령했다가 1391년 헝가리 장군 페테르 페레니가 점령했고, 이듬해 국왕 지기스문트에게 넘겼다. 다만 1403년 라자르의 아들이자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군주인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헝가리에 복속하며 베오그라드와 함께 골루바츠도 양도받았다.
다만 1426년의 서약에서 스테판은 사후 지기스문트에게 골루바츠를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이듬해 스테판이 사망하자 골루바츠 영주 예레미아는 자신이 스테판에게 1만 2천 두카트를 내고 지배권을 얻었기에 지기스문트 역시 그만큼 납부해야 한다 주장했다. 지기스문트가 거절하자, 예레미야는 1만 2천 두카트를 제안한 오스만 제국에 성채를 넘기고 귀순했다. 놀란 신임 데스포티스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설득하려 골루바츠에 당도했지만, 성문 앞에서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도주했다.
골루바츠의 탈환을 중요하게 여긴 지기스문트는 1427년 말엽, 그 건너편에 라슬로바라 (콜로니니) 성채를 세웠다. 1428년 4월, 그는 2만 대군과 함께 성채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했다. 그러자 5월에 술탄 무라트 2세가 더 많은 병력과 함꼐 구원에 나섰고, 지기스문트는 강 건너로 철수를 지시했으나 신속하지 못해 오스만 군에게 따라잡혔다가 여성 제독 세실리야 로즈고니에게 구출되었다. 이때 후위 병력은 대부분 괴멸되었고, 유명한 폴란드 기사 자위차 차르니가 오스만 군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1443년 헝가리-세르비아 군의 니슈 전투 승리 후 이듬해 체결된 세게드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은 골루바츠를 세르비아에 반환했다. 하지만 주라지의 사후 1456년 혹은 1458년에 오스만 군이 재차 골루바츠를 점령했다. 얼마 후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골루바츠를 포위했으나 내부 문제로 회군했고, 1481년에는 겨우 점령했으나 곧 철수했다. 따라서 이후 골루바츠는 귀베르진릭 (Güvercinlik)이라 불리며 대튀르크 전쟁기인 1688-90년, 오스트리아령 세르비아 시기인 1718-39년, 코자 반란기인 1788-91년을 제외하고는 오스만 령으로 남았다.
도시는 다뉴브 강의 수운으로 번성했고, 1804-13년간 세르비아 봉기군의 수중에 있었으나 1817년에 세워진 세르비아 공국령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1868년 칼레메그단과 함께 세르비아 공국령이 되었다. 당시 일대에는 흡혈 모기인 골루바츠 모기가 창궐했고, 많은 가축을 폐사시켰다. 1964-72년에 하류 비딘 방면의 '철의 문' 협곡에 수력 발전소가 세워지며 수위가 상승했고, 성채의 밑부분이 침수되었다. 1세기 이상 방치되며 수풀이 무성했던 성채는 2005년부터 복원되었고, 2014-19년의 대대적인 정비 후 재개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