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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2fa7> 일본국 제11-12대 참의원 의장 고노 겐조 河野謙三 | Kōno Kenzō | |
<colcolor=#c3c965>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901년 5월 14일 |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정 (현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나리타) | |
사망 | 1983년 10월 16일 (향년 82세) |
일본 도쿄도 | |
학력 | 와세다대학 전문부 (상학 / 학사) |
가족 | 아버지 고노 지헤이 어머니 고노 타미 형 고노 이치로 조카 고노 요헤이 종손자 고노 다로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의원 선수 | 1 (중), 5 (참) |
의원 대수 | 24 (중) 3-4, 5-6, 7-8, 9-10, 11-12 (참) |
지역구 | 구 가나가와 3구 (중) 가나가와현 선거구 (참) |
약력 | 대일본 인조비료 사원 중의원 의원 (제24대) 참의원 의원 (제3, 5, 7, 9, 11대) 참의원 부의장 일본체육협회 회장 제11-12대 참의원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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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제11-12대 참의원 의장을 지냈으며 일본 부총리를 지낸 고노 이치로의 동생이자 디지털대신을 지낸 고노 다로의 작은할아버지이다.2. 생애
1901년 5월 14일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정 (현 오다와라시)에서 가나가와현의회 의장인 고노 지헤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고노 이치로는 이케다 하야토 내각 부총리 등을 역임한 거물 정치인이였다.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중학교 재학 시절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했으며 와세다대학 재학 이후에는 육상부에 소속되어 있었고, 하코네 역전에서 형인 이치로와 함께 참가해 두 차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와세다대 전문부 상과를 졸업하고 대일본 인조비료(현 닛산화학)에 입사했다.
1945년 형 이치로가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하자 이듬해인 1946년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에서 (구) 가나가와현 제3구에 일본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6위로 낙선했다, 1949년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첫 당선에 성공했다.
1950년 형 이치로의 공직 추방 명령이 해제되자 중의원 지역구를 형에게 넘겨주고 본인은 참의원으로 이동했다. 1952년 중의원 선거에 불출마 하고 1953년 제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가나가와현 선거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했고 동시에 참의원 원내 파벌인 녹풍회에 가입하였다. 1955년 자민당 합당 당시 고노 이치로와 함께 보수 합동에 참여한다.
1965년부터 3년간 참의원 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고노는 점차 자신의 정치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당시 참의원은 참의원 의장 시게무네 유조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총리 내각 인선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한 정치력을 발휘해 참의원을 이른바 "시게무네 왕국"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고노는 시게무네의 독단적인 장기 집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1971년 7월 참의원의 개혁을 촉구하는 고노서한을 발표했다. 그는 시게무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의원들을 모아 반시게무네 회파 벛꽃회를 결성했고, 1971년 참의원 의장 선거 당시 시게무네가 후계자로 추천한 키우치 시로를 10표 차이로 꺾고 의장으로 선출되는데 성공한다.[1]
고노는 6년간 참의원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의장을 위한 사적 자문기구인 참의원 문제간담회(이른바 8인 위원회)를 구성했고, 8인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참의원 대표 회의를 열어 심의 시간 확보, 질문 시간 증가, 당의 구속 완화, 자유 토의제 도입 등의 개혁을 이끌었다.
1974년 7월4일 정치자금규정법 개정안이 여야 표결 동수가 나오자 의장인 고노가 직접 표결에 참가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의장의 표결권 행사는 참의원 개원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고, 중의원으로 사례를 넓혀봐도 1907년이 마지막이었다. 훗날 고노는 "원래는 의장으로서 부결하는 게 옳았지만 먼저 가결된 공직선거법 개정안과의 관련성이 높은 법안이라 정치자금규정법 개정안이 부결되면 두 법안 사이에서 모순이 생길 우려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가결했다"라고 회고했다. 고노는 1977년 7월을 끝으로 참의원 의장직에서 퇴임했다.
1983년 참의원 임기가 만료되자 정계에서 은퇴했고, 같은해 10월 16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종2위가 수여되었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6 - 1948 | 창당 |
| 1948 - 1950 | 창당 |
| 1950 - 1955[2] | 창당 |
| 1955 - 1974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4 - 1983 |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정계은퇴 별세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가나가와 3구 | | 18,716 (6.86%) | 낙선 (6위) |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33,673 (10.48%) | 당선 (4위) | 초선 | |
1952 | 제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가나가와현 선거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64,324 (21.06%) | 당선 (2위) | 초선 |
1959 | 제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 364,120 (38.89%) | 당선 (1위) | 재선 | |
1965 | 제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519,027 34.49%) | 당선 (2위) | 3선 | ||
1971 |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795,799 (42.74%) | 당선 (1위) | 4선 | ||
1977 |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086,512 (41.32%) | 5선 |
5. 여담
- 학생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한 경험을 토대로 스포츠 진흥에 큰 힘을 쏟았다. 1960년대 일본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지낸뒤 1975년 일본체육협회 회장에 취임해 1976년 7월 개최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일본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고노 본인이 소련에 우호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기요카와 마사지[3]와 일본 국가대표 선수단의 참가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문제로 인해 참여하지 않았다.
- 고노 켄조의 장남인 고노 테츠오 (河野鉄雄, 1932~)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구 가나가와 2구에서 1983년과 1986년 선거에 각각 자민당 공인과 무소속 후보로 입후보 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에게 밀려 낙선했다.[4]
6. 둘러보기
고노 가문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 고노 지헤이 | ||
2대 | <rowcolor=#D7003A> 차남 | 삼남 | ||
고노 이치로 | 고노 겐조 | |||
3대 | 고노 요헤이 | |||
4대 | 고노 다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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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의원 의장에 취임한 고노는 전임 의장인 마쓰노 쓰루헤이와 시게무네 유조가 자민당 당적을 유지하며 의장직에 올랐던것과 달리 참의원 개혁을 촉구하며 본인 스스로가 자민당을 탈당해 최초로 무소속 참의원 의장이 되었다.[2]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참의원 원내회파 에 소속.[3] 1913~1999,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100m 배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고, 선수 은퇴 이후에는 일본 IOC 위원으로 활동하며 1988 올림픽을 나고야시에 유치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지만 끝내 실패했다.[4] 참고로 그 당시 가나가와 2구에서 신자유클럽 후보로 출마한 타가와 세이이치는 고노 이치로와 겐조 형제의 조카이자 고노 요헤이의 사촌 어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