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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우메하라 헤이쇼(梅原炳昌) |
이명 | 강철(姜徹, 姜澈), 강현철 계학, 정한, 박윤세(朴允世) |
본관 | 진주 강씨 |
출생 | 1898년 7월 23일[1] |
경상남도 진주군 설매곡면 설매리 665번지 (현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2] | |
사망 | 1953년 9월 20일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학력 | 니혼대학 경제과 중퇴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병창은 1898년 7월 23일 경상남도 진주군 설매곡면 설매리 665번지(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에서 설악(雪嶽) 강수환(姜璲桓, 1876 ~ 192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우당(至愚堂) 강내운(姜來運)의 7대손으로, 아래로 자맹 강병관(姜炳觀, 1901 ~ 1949), '학생ㄱ당 사건' 등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강병도(姜炳度, 1908. 7. 5 ~ ?) 등 남동생이 있었다. 설매마을 들어가는 도로 옆에 강내운의 효자문[3](정려[4])이 있다. 고종 31년 갑오(1894)년 9월 한로절에 효자문(정려)기문을 상산(商山) 김인섭(金麟燮)[5]이 기록하고, 6대손 강수환이 글을 썻다.[6]아버지 강수환은 파리장서 운동[7]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같은 문하생 선배인 독립운동가 회봉 하겸진[8]과 평생 절친하게 지냈다. 또한 평소 성품이 너그럽고 후해서 인망이 있던 인물이었다.[9] 강수환은 지역내 유림들 사이에서 붓글씨로 유명했다. 진주시 상봉동 서봉지공원(가마못공원)[10]에 있는 고려시대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충절을 기리는 포은선생유적비 비문의 글을 하겸진이 짓고, 강수환이 글씨를 썻다.[11] 남동생 강병관은 회봉(晦峯) 하겸진의 문인으로[12], 또다른 남동생 강병도는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활동 중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기소유예로 석방[13]된 것을 계기로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였다.
한편 그는 대대로 유학자 집안의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마을 관내 서소대[14]에서 마을 사람들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상경하여 중동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경제과에 입학하였다.[15]
1922년 여름, 일본 도쿄에서 조선노동동맹회 결성에 참여하여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일월회(一月會) 회원 및 정우회 상무집행위원으로 민족 계몽과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였다. 당시 일월회는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그 활동 범위를 국내로 넓혀 나가고 있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서 조선공산당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4월에는 도쿄에서 조선공산당 일본부를 조직하고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필명 강철(姜徹)로 같은 해 8월 『이론투쟁(理論國爭)』에「‘사회주의활살(活殺)론’을 논살(論殺)함」이라는 글을 기고했으며, 그해 9월에는 도쿄에서 조선총독부 폭압정치반대 관동지방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같은 해 말 귀국했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사이 동생 강병도 또한 이른바 '학생ㄱ당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어, 1930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강병창 또한 4달 뒤인 그해 8월 30일에 경성지방법원 제3호 법정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하고, 1932년 7월 9일 만기 출옥하였다.[16] 이 사이 1929년 아버지 강수환이 별세했다.
1931년 4월 1일 대중잡지 삼천리 제14호에 실린 'ML계 인물 인상기'란 기사에 여러인물이 소개 되었는데, 최익한(崔益翰),이우적(李友狄)등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17]
姜徹 (一名 姜炳昌)
경남 진주의 일완고가정의 출생으로 니혼대학에 다니다가 중도퇴학. 이름은 강철이나 성품은 소와 같이 유순하고도 질벽하여, 과연 일을 X모할만한 소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입이 무거워서 별로 말이 없으나, 이따금 한마디씩만 하는 소리라도 X있는 말이였었다. 지려쎈 목수패, 풍부처갓혼 그 얼굴 첫 인상은 대단히 뚝해 보이나 사귀여 보면 어디인가 구수한 인정미를 찾을 수 가 있다. 그는 또 한학의 수양이 잇는 이만치 쉽사리 정치논문에 붓대을 둘러 저술계공적도 많았다.
경남 진주의 일완고가정의 출생으로 니혼대학에 다니다가 중도퇴학. 이름은 강철이나 성품은 소와 같이 유순하고도 질벽하여, 과연 일을 X모할만한 소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입이 무거워서 별로 말이 없으나, 이따금 한마디씩만 하는 소리라도 X있는 말이였었다. 지려쎈 목수패, 풍부처갓혼 그 얼굴 첫 인상은 대단히 뚝해 보이나 사귀여 보면 어디인가 구수한 인정미를 찾을 수 가 있다. 그는 또 한학의 수양이 잇는 이만치 쉽사리 정치논문에 붓대을 둘러 저술계공적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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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9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출옥한 후에는 한동안 진주읍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며, 1933년 3월 5일에는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이기택(李起澤)[18], 정희영(鄭禧泳)[19]등과 만나 조선 내 각 지방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 중인 조직체를 통일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1934년 10월 30일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동생 강병도가 출소하였다.[20]
한편,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비밀문서 중 《용의조선인명부》에 '강철(姜澈), 한국인, 이명 朴允世, ML파 조선공산당 및 서울파 공산당사건 관계자. 도주.'로 수배되었던 기록이 있는데, 강병창이 강철이라는 필명을 쓴 적이 있고, 일전에 ML파 계열의 일월회 회원으로 활동했었기 때문에 동일인으로 보인다. 강철 자체가 가명이므로 당시에 주소지가 적발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35년부터는 하겸진의 일족인 하영진(河泳珍)[21]이 설립한 광신상회(廣信商會)[22]에서 취체역으로 활동했다.[23][24]
1937년에는 아버지 강수환이 남긴 글과 시를 모아 문집인 설악집(雪嶽集)[25] 4권을 발행하였다. 때마침 1937년 2월 10일 동생 강병도가 진주읍내 영정(현 진주시 대안동)에 있던 진주합동인쇄(晋州合同印刷)에서[26] 취체역으로 등기되어 활동한 기록이 있는데, 이곳에서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入統營(입통영)
雪嶽 姜燧桓(설악 강수환)
地是保障七十州 (지시보장칠십주)
遊人筇屐際淸秋 (유인공극제청추)
悠悠千載元戎恨 (유유천재원융한)
城上歸雲結不流 (성상귀운결불유)
바다의 칠십 고을을 보호했던 이곳(통영)에서
나그네의 지팡이와 신발, 맑은 가을과 만났네.
아득한 천년동안 원융(元戎:군사들의 우두머리, 최고사령관)의 한이,
성 위에 휘감는 구름 되어 흩어지지 않는구나
설악집에 실려 있는 위 입통영 이라는 한시는 2012. 6. 4. 통영지역신문인 한산일보에 일제강점기 국가를 걱정하는 한시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雪嶽 姜燧桓(설악 강수환)
地是保障七十州 (지시보장칠십주)
遊人筇屐際淸秋 (유인공극제청추)
悠悠千載元戎恨 (유유천재원융한)
城上歸雲結不流 (성상귀운결불유)
바다의 칠십 고을을 보호했던 이곳(통영)에서
나그네의 지팡이와 신발, 맑은 가을과 만났네.
아득한 천년동안 원융(元戎:군사들의 우두머리, 최고사령관)의 한이,
성 위에 휘감는 구름 되어 흩어지지 않는구나
1937년 8월 17일 동아일보 진주기획기사에 글을 기고했다.
먼저 도서관 설치 – 강병창씨 담(談)
우리는 흔히 사회적 교육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교육이란 결코 학교 교육보다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란 것은 학교의 연장인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그 사람의 인격과 식(?)견이 최후적으로 성숙되고 결정되는 것은 사회적 교육에 의하여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 사회란 결국 그 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이니 사회 교육의 정체는 이 사회 발전의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 교육을 운위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도서관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도서관이란 그 기관 자체가 종합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란 의미에 있어서 사회 교육기관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삼만여의 인구를 포옹(?)하고 매년 수백 명의 졸업생을 내는 우리의 대(大) 진주가 아직까지 도서관 한 개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중대한 사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주란 곳은 다른 의미로 보아 도서관의 필요가 특히 강조되는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나온 청년들이나 시민중00층의 대부분은 갈 곳이 없다는 그러한 단순한 이유로 주사(酒肆)와 기가(妓家) 출입을 사회 교육으로서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갈 곳을 몰라서 향락가에 방황하는 청년에게 갈 곳을 지시하고, 사고(思考)의 대상이 없어서 0념망상을 일삼는 인사에게 사고 재료를 제공하고 우(愚?)0의 정화를 희구하나 견문은 모두 이취(泥醉) 00뿐인 자에게 진정한 예술을 보여준다면 이 어찌 위대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환락가의 한복판에 학술의 전당이 0존하여 만당한 학구의 사(士)가 학리를 연구(?)하고 대예술을 제작하고 세계적 저술을 구(?)상하고 있다는 거룩한 사실 그것이 벌써 환락가에 대한 커다란 위협적 존재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진주의 뜻있는 인사여! 퇴폐의 0으로 전락되려는 이 고을을 구하기 위하여 분기하라!
우리는 흔히 사회적 교육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적 교육이란 결코 학교 교육보다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란 것은 학교의 연장인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지 그 사람의 인격과 식(?)견이 최후적으로 성숙되고 결정되는 것은 사회적 교육에 의하여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 사회란 결국 그 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운(?)행되는 것이니 사회 교육의 정체는 이 사회 발전의 정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 교육을 운위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도서관을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도서관이란 그 기관 자체가 종합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란 의미에 있어서 사회 교육기관으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삼만여의 인구를 포옹(?)하고 매년 수백 명의 졸업생을 내는 우리의 대(大) 진주가 아직까지 도서관 한 개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확(?)실히 중대한 사업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주란 곳은 다른 의미로 보아 도서관의 필요가 특히 강조되는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나온 청년들이나 시민중00층의 대부분은 갈 곳이 없다는 그러한 단순한 이유로 주사(酒肆)와 기가(妓家) 출입을 사회 교육으로서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갈 곳을 몰라서 향락가에 방황하는 청년에게 갈 곳을 지시하고, 사고(思考)의 대상이 없어서 0념망상을 일삼는 인사에게 사고 재료를 제공하고 우(愚?)0의 정화를 희구하나 견문은 모두 이취(泥醉) 00뿐인 자에게 진정한 예술을 보여준다면 이 어찌 위대한 사업이 아니겠는가? 환락가의 한복판에 학술의 전당이 0존하여 만당한 학구의 사(士)가 학리를 연구(?)하고 대예술을 제작하고 세계적 저술을 구(?)상하고 있다는 거룩한 사실 그것이 벌써 환락가에 대한 커다란 위협적 존재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진주의 뜻있는 인사여! 퇴폐의 0으로 전락되려는 이 고을을 구하기 위하여 분기하라!
1938년 6월 15일 강병창은 강병도와 함께 합천군 합천면 합천동(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있던 합천약주제조(陜川藥酒製造) 주식회사[27]를 인수하고, 각각 대표취체역, 지배인으로 등기하였다.
강병창과 합천군의 연관성은, 일전에 강병도와 적색노조 사건으로 같이 체포되었던 강두석(姜斗錫)이 합천면 영창리 이경진의 집에서 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는 1932년 7월1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1932년 7월1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때 강두석 외에 김점봉(金點鳳), 김상필(金相弼), 장호관(張虎觀) 등과 함께 강병창의 동생 강병관(姜炳觀)도 검거되어 극비리에 취조를 받았다. 강병관은 취조 후 석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를 지내고 일찍이 강병창과 일월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정규(金正奎)[28]가 1938년 6월 23일 설립된 합천양조(陜川釀造) 주식회사의 이사로 있었고,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에서 태어나 곽종석의 문인으로 청년회연합회와 신간회에서 활동했던 박운표(朴運杓)[29]도 있었다.
동생 강병도는 1939년 4월 합천약주제조 지배인에서 해임되었고, 같은 해 12월 진주합동인쇄 취체역 직위를 사임하였다. 그후 경남과 전라남북도에 실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던 이정윤(李廷允), 이우적(李友狄)등과 적기파(赤旗派)로 불린 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다.[30]
이어 1941년 5월 2일 강병창은 회사를 양도하였는데, 구창회(具昌會, 1897년생)[31][32]가 와서 지배인으로 5월 2일 등기한 뒤 같은 날에 천도교 신자로 창녕군 사람 하상석(河翔錫)에게 재차 양도하였다. 구창회는 화요회, 신간회 회원이고 독립운동으로 복역한 사람이다. 강병창 본인이 회사를 정리하지 않고, 알 수 없는 사정으로 구창회가 지배인 등기 후 당일 하상석에 양도한 것으로 보인다. 지배인은 대표 부재시 회사의 운명을 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리이다.
1945년 진주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강병도는 당시 경성부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해 1945년 10월 경남 인민위원회 산업부장에 선임되었고,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경남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6년 1월 27일 부산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대표단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미소공동위원회 대표단에 보내는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1월 31일 조직된 민전부산시위원회의 선전부를 담당하였다. 1948년에는 강병도와 함께 이석태(李錫台)의 사회과학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동생 강병도는 해방 후 해방일보 편집위원회에서 근무했으며, 박헌영에 반대하는 ML파에 속했다. 1946년 7월 21일부터 같은 달 25일까지 독립신보사에 「조선 파시즘의 해부」라는 글을 기고했다. 1946년 문우인서관에서 발행한 민주주의12강에 정리되어 있다. 1948년 사회과학대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33]
사회과학대사전 -1948년 이석태 편-
<집필자>
강병도, 강병창, 강성호, 강이홍, 고경흠, 김덕한, 김상형, 김완직, 김정홍, 김종억, 김한주, 문일민, 백남운, 송완순, 온낙중, 윤형식, 이광, 이북만, 이석태, 이우적, 이철, 인정식, 박상준, 전석담, 정종섭, 정준섭, 정해근, 정해진, 정희영, 조동필, 주진경, 주진구, 최익한, 최진순, 홍기무, 홍순식, 홍순욱 등 37인, 보조집필자 18인, 감수원 13인, 최소 70명 이상이 사전 편찬에 참여.
<편자 서언>
조선의 민주주의 건국 운동에서 우리들이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근대과학적인 이론무장이다. 더욱이 조선과 같이 과학적 이론이 빈곤한 곳에서는, 열렬한 민주주의 건국운동자일수록 오묘한 과학적 지식과 투철한 분석적 이론과, 그리고 종합적인 세계일반에 대한 상식이 긴급히 요청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지식욕에서나 또는 초범(超凡)한 이론가가 되고 싶다는 인텔리겐챠적 근성에서가 아니라, 가두에서, 직장에서, 학원에서 실천 운동을 하는 자일수록 공통으로 느끼게 되는 귀여운(귀중한) 체험을 통한 요구일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미력이나마 최대의 노력과 지혜를 짜내어 계획하고 편집한 것이 본 사회과학대사전이다. 그러면 본 사전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편집하였느냐? 우리는 현하 조선의 민주주의 건국운동자가 가장 절실히 느끼는 정치, 경제, 세계일반의 사회운동사, 철학, 위대한 각국 선인들의 소개, 조선사회운동의 일반문제 등등을 광범위하게 망라하여, 조선의 민주주의 건국운동자에게 실천이론과 체험지식을 제공하고 앞으로도 우리 조선의 민주주의운동에 투신할 후인들에게, 한 개의 참고자료를 이바지하려는데 그 안목을 두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일찍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대곤란을 발견하였다. 원래 본 사전은 평범한 논문집도 아니고, 또는 어느 문제의 상식적인 친절한 해설만도 아니오, 어디까지나 간명하게 각개 문제의 개념을 파악게 하면서도 민주노선을 강력히 제시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포괄하는 문제가 수십 수백이 아니라 수천으로 헤아리게 될 때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유감이나마 금일의 조선은 여러 가지 사정이 이에 상응할 만한 광범위한 학술부문이 제한되어 있고, 광범위한 재료수집대상이 국한, 또는 협소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본 사전을 편집하는 자로서는 일대 고심이 있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사전을 재료로 하여 편집해보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들 외국사전 중에는 또한 오류도 없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도 낙후 또는 불필요한 것과 착오도 많으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이론무장에 필요적절한 것만을 재료로 하였고, 나머지는 57명의 집필자들이 창작한 후(원고 8500매 중 약 4500매 창작) 내용 충실을 기하기 위해 권위자 13명에게 감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본 사전의 내용을 정확히 말하면 반 번역 반 창작이다. 그런데 일대 유감인 것은 세계의 일반적인 문제와 조선의 문제였다. (둘 다 자료를 거의 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다가 본 사전을 1946년 9월 중에 기고(起稿)해서 1947년 8월부터 인쇄 도중, 동년 9월 20일에 약 4000매의 원고를 유실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 사업을 중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책임도 없지 않은 것이므로 다시 분발해서 원고를 재집필하였으나, 조선 문제에 관한 몇몇 문제는 영영 재료수집 불능으로 실리지 못함은 최대의 통한사(痛恨事)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원고는 어찌 되었든 정리 완료되었다 하더라도 출판이 또한 난사(難事)였다. 그것은 금일 남조선의 사정으로는 이 대서책(大書冊)을 발간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악조건을 무릅쓰고 출판을 쾌락(快樂)하여 주신 문우인서관에 대해서는 독자와 함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년 6개월의 악착스러운 제조건을 회상하면, 실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대할 때마다 감격 되는 바 많다.
<집필자>
강병도, 강병창, 강성호, 강이홍, 고경흠, 김덕한, 김상형, 김완직, 김정홍, 김종억, 김한주, 문일민, 백남운, 송완순, 온낙중, 윤형식, 이광, 이북만, 이석태, 이우적, 이철, 인정식, 박상준, 전석담, 정종섭, 정준섭, 정해근, 정해진, 정희영, 조동필, 주진경, 주진구, 최익한, 최진순, 홍기무, 홍순식, 홍순욱 등 37인, 보조집필자 18인, 감수원 13인, 최소 70명 이상이 사전 편찬에 참여.
<편자 서언>
조선의 민주주의 건국 운동에서 우리들이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근대과학적인 이론무장이다. 더욱이 조선과 같이 과학적 이론이 빈곤한 곳에서는, 열렬한 민주주의 건국운동자일수록 오묘한 과학적 지식과 투철한 분석적 이론과, 그리고 종합적인 세계일반에 대한 상식이 긴급히 요청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지식욕에서나 또는 초범(超凡)한 이론가가 되고 싶다는 인텔리겐챠적 근성에서가 아니라, 가두에서, 직장에서, 학원에서 실천 운동을 하는 자일수록 공통으로 느끼게 되는 귀여운(귀중한) 체험을 통한 요구일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미력이나마 최대의 노력과 지혜를 짜내어 계획하고 편집한 것이 본 사회과학대사전이다. 그러면 본 사전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편집하였느냐? 우리는 현하 조선의 민주주의 건국운동자가 가장 절실히 느끼는 정치, 경제, 세계일반의 사회운동사, 철학, 위대한 각국 선인들의 소개, 조선사회운동의 일반문제 등등을 광범위하게 망라하여, 조선의 민주주의 건국운동자에게 실천이론과 체험지식을 제공하고 앞으로도 우리 조선의 민주주의운동에 투신할 후인들에게, 한 개의 참고자료를 이바지하려는데 그 안목을 두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일찍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대곤란을 발견하였다. 원래 본 사전은 평범한 논문집도 아니고, 또는 어느 문제의 상식적인 친절한 해설만도 아니오, 어디까지나 간명하게 각개 문제의 개념을 파악게 하면서도 민주노선을 강력히 제시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포괄하는 문제가 수십 수백이 아니라 수천으로 헤아리게 될 때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유감이나마 금일의 조선은 여러 가지 사정이 이에 상응할 만한 광범위한 학술부문이 제한되어 있고, 광범위한 재료수집대상이 국한, 또는 협소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본 사전을 편집하는 자로서는 일대 고심이 있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사전을 재료로 하여 편집해보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들 외국사전 중에는 또한 오류도 없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도 낙후 또는 불필요한 것과 착오도 많으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이론무장에 필요적절한 것만을 재료로 하였고, 나머지는 57명의 집필자들이 창작한 후(원고 8500매 중 약 4500매 창작) 내용 충실을 기하기 위해 권위자 13명에게 감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본 사전의 내용을 정확히 말하면 반 번역 반 창작이다. 그런데 일대 유감인 것은 세계의 일반적인 문제와 조선의 문제였다. (둘 다 자료를 거의 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다가 본 사전을 1946년 9월 중에 기고(起稿)해서 1947년 8월부터 인쇄 도중, 동년 9월 20일에 약 4000매의 원고를 유실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 사업을 중지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책임도 없지 않은 것이므로 다시 분발해서 원고를 재집필하였으나, 조선 문제에 관한 몇몇 문제는 영영 재료수집 불능으로 실리지 못함은 최대의 통한사(痛恨事)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원고는 어찌 되었든 정리 완료되었다 하더라도 출판이 또한 난사(難事)였다. 그것은 금일 남조선의 사정으로는 이 대서책(大書冊)을 발간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악조건을 무릅쓰고 출판을 쾌락(快樂)하여 주신 문우인서관에 대해서는 독자와 함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년 6개월의 악착스러운 제조건을 회상하면, 실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대할 때마다 감격 되는 바 많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해체 후 친일세력들이 법원기록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기 위하여 진주지방법원을 방화하여 모든 기록이 소실되었다. 그 뒤 행방은 알 수 없으며, 다만 1953년 9월 20일로 사망신고가 되었다.
[1]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7월 1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3] 진주시 대곡면 광석리 42-1, 고종 29년 임진(1892) 지우당 강내운의 효행과 학문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4]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5] 1862년(철종 13)에 일어난 단성민란(丹城民亂)의 지도자. 단성(산청) 단계리에서 탐학한 관리들이 농민을 수탈함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61년부터 감사와 현감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농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버지와 함께 농민들을 지도하여, 부정한 현감과 이서들을 축출하였다. 이로 인해 김인섭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아버지는 전라도 영광의 임자도(荏子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864년 다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곧 체직(遞職)되었다. 민란 이후 새로 부임한 현감과 서리들의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나 정원용(鄭元容)의 도움으로 화를 모면하였다. 1867년에는 어사 박선수(朴瑄壽)에 의해 무단토호(武斷土豪)로 지목되어 강원도 고성(高城)·통천(通川)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1882년 단성 향교의 강장(講長)에 추대되었고, 1894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1902년 통정에 올랐다.[6] 상산 김인섭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단성민란 이후 탐관오리들의 착복으로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나, 각 마을을 휩쓸고 다닐때, 설매마을은 농민군으로 가담한 이웃마을 사람들의 보호로 농민군들이 무사히 지나갔다.[7]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대표는 137명이지만 면우 곽종석은 이 일이 발각되어 유림대표로 서명한 이들이 고초를 겪을 경우 후일을 도모해야 하기에 직계 50세 이하 유림은 서명에서 제외시켰다.[8] 하겸진은 파리장서운동 독립청원서 서명자이고, 김창숙이 이회영 등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만주-몽고 접경지에 황무지를 구입하기로 하고 유림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벌인 제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의 장인이다. 해방 후 백범 김구가 찾아와 감사함을 표시하고, 하겸진이 후학을 양성한 덕곡서당 편액 글씨를 직접 썻다. 지금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덕곡서당에 가면 김구의 친필 편액을 볼수 있다. 진주시는 2022년 8월11일 사곡리 덕곡서당 앞에 파리장서비를 건립했다.[9] 1924년 6월 5일자 시대일보 기사에 관후(寬厚)한 지주로 소작농을 위해 선행을 베푼 것이 소개되기도 했다.[10]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로 141[11] 1922년 세운것으로 상봉동 888-6번지에 있던것을 1985년 6월에 현위치로 이전하였다.[12] 강병관은 어렸을 때부터 회봉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30년동안 굴천(屈川) 이일해(李一海)와 함께 모셨다. 이일해는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가 회봉선생을 흠모하여, 해방 후 찾아왔다가 제자 중 이일해를 이승만대통령 비서실에 추천하여, 상경 후 비서실에서 2년동안 일하다가 본인의 뜻과 맞지 않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이일해의 문집 굴천집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지시로 중국 장개석에게 보낸 서신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984년 산청 남사예담촌 이동서당의 면우 곽종석 유허비의 비문을 이일해가 지었다.[13] 동아일보 1926. 6. 17.[14]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700-9번지에 있었다.[15] 당시 주소지는 도쿄부 시타바시정(下橋町) 1793[16] 판결전 수감상태로 총 4년 5개월을 복역했다.[17] '완고한 가정 출신으로 개인적 품성과 함께 한학을 수양하여 정치논문의 저술계 공적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8] 1904년생, 전북 임실출신 독립운동가[19] 1902년생, 사천 곤명면 금성리출신 독립운동가, 금성리는 항일 독립운동가 17명을 배출하였고, 박낙종, 이우적도 같은 마을 출신이다.[20] 강병도는 학생ㄱ당사건으로 2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만기출소한 후 1932년 경남남부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를 진주에서 결성하고 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에 경남서부적색노동조합도 조직 결성하였으며, 9월에는 진주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부산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였다.강병도는 판결전 수감상태까지 총 5년 3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판결문 참조[21] 하겸진의 일족이자 하겸진의 문인이다. 하겸진의 사위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형인 이병각이고, 하영진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의 손위 처남이다, 당시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대지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파리장서 운동 때 거금을 지원했었다. 하영진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신지식인 하영근의 실제모델이라고 한다.[22] 진주읍내 본정(현 진주시 중성동)에 있었다.[23] 문학 박사로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1925 ~ 2017)이 찬한 우천하공 묘갈명(友泉河公墓碣銘)에 기록되어 있다.[24] 진양은 영남의 거읍으로 세족고가가 많은데 수곡의 하씨가 가장 문O으로 일컬어진다. 우성(佑成)이 소시에 어른들로부터 지금 하씨에 문학에 회봉(晦峯)이 있고 부(富)에 우천(友泉)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대개 회봉 선생은 유림의 원로로서 동남의 의표이었고 우천공은 락선호의(樂善好義)하여 종방(宗邦)을 돌보며 동포(同胞)에 마음을 두어 흥학육영에 전력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된 얼마 후에 진양에 갔었는데 회봉옹은 그때 이미 OO후이었고 우천공은 마침 출타하여 그 문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뒤 삼십 년을 지나 우천공의 후사인 석근(錫根)과 서울에서 알게 되어 곧 벗을 삼았고 이어 공의 비문을 부탁받으니 우성이 어찌 불문하다 하여 사양(辭讓) 할 수 있으리오.
공의 휘는 영진이오 자는 여옥이며 우천은 그 호이다. 시조 휘 공진은 고려 충신으로 그 활력이 역사에 빛나며 중고에 송정 선생 휘 수일은 남명에 사숙하고 대각서원에 배향되니 곧 공의 십이대조이다. 고조는 휘 철현이고 호는 묵화이며 증조는 휘 성운이며 호는 인재이며 조는 휘 재억이오 선공가감역이었고 고는 휘 세진이오 성균진사를 지냈는데 역대로 모두 후덕과 인문이 있었다. 비는 해주정씨 충공문중의 후(後)이오 감찰환교의 따님이며 부덕의 O범이 있었다.
공이 1896년 고종 병신에 출생하여 십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으며 모부인의 명으로 회봉옹에게 수학하였다. 1919년 기미인산날에 동향 허공 (許公)만정 (萬正)과 한성에서 만세운동을 몸소 겪고 곧 더불어 독립 OO의 방도를 강구한 끝에 시세를 헤아려 우선 인재 양성보다 마땅함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돌아와 창의모재하여 고등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외인의 O제때문에 여학교로 만들고 해온 (解慍) 백남훈 (白南薰)을 맞아 교장으로 삼았다. 지금 진주여자고교가 곧 그것이다. 또한 그 뒤에 당시 부호(富豪) 이종만 (李鍾萬)과 협력하여 한성에 남우학원 (南友學院) 을 세워 이를 확장육성 (擴張育成)해 오던 중 후일 매부(妹夫) 조공 (趙公) 홍제 (洪濟) 에게 맡겨 터전을 크게 넓히니 곧 지금의 배명 (培明) 고교이다. 이보다 앞서 심산 (心山) 김창숙(金昌淑)옹이 유림의 장서를 OO 하고 기미 평화회의에 나아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그 비용이 거대하여 공이 거금을 내어 이를 도우고도 일찍이 일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욱 공을 높이 보았다. 광복 후 시사일변함을 보고 서울의 우거(寓居)에서 OO하여 고장(故庄)으로 돌아온 후 다시 육이오의 난을 겪게 되어 크게 지친 공은 O생의 사업으로 심열을 기울인 학교에서마저 손을 떼고 종래 원림에 은거하는 몸이 되었다. 이어 존조보본에 전념하여 선묘를 개수하고 석의를 갖추며 또한 재종족과 논의하여 진양성중에 충의당과 경충사를 지어 선조를 모시니 이것이 공의 평생의 대업이다.
1966년 병오 8월 19일에 몰하니 향년 칠십일이오 대천 구태동산 경자원에 장사하였다. 배는 광주이씨 상용의 따님이오 숭덕재 윤경의 후이며 O순정O하여 군자의 배필로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묘는 사곡뒤 서록해좌이다. 일자 석근은 훌륭히 가업을 잇고 밀양박씨 낙촌충원의 후인 태식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병길, 병훈, 병환, 병O를 두었고 병길은 일남일녀, 병훈은 이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하여 가로대 우석을 벗하였으니 부하면서 청하여도다. 일생에 선을 행하면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도다. 살아서 순하였으니 돌아가서도 평안하리라.
성균관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여주 이우성 찬
무술년 2월 17일[25] 문집의 서문은 회봉(晦峯) 하겸진이, 발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썼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경상국립대학교 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서 소장 중에 있다.[26] 회사 감사로 영남춘추 발행인이고, 형평운동(백정의 계급해방운동)가인 신현수선생이 등기되어 있다.[27] 이 회사는 김진수(金鎭壽)가 대표취체역으로 1937년 8월 11일 설립, 1937년 11월 17일 등기한 회사이다. 1937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일본군에게 헌금한 내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진수는 친일 관련 인사로 보인다.[28] 1899년생. 포해 김정규는 합천 초계 출신으로1924년 대구노동공제회 집행위원이었다. 일본에 유학해 주오(中央)대학, 메이지(明治)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여 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해방운동』 동인이 되었다. 1926년 2월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활동 중, 그해 7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만기출소 후 신간회 활동도 한 민족지사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대구출신 민족시인 이상화(시인)에게 받은 12폭 병풍을 김정규지사 후손이 2020년 대구시에 기증했다. 대구시에 기증된 병풍은 '금강산 구곡담 시'를 담은 10폭 병풍으로 죽농 서동균이 행초서로 쓴 서예 작품이다. 병풍의 마지막 폭에 1932년 죽농 서동균이 글씨를 쓰고 시인 이상화가 포해 김정규에게 선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29] 1894년생, 호는 몽공(夢空), 합천지역 독립운동가[30] 역사비평 1989년 5월 기사 참조.[31] 1919년 3.1 운동 당시 괴산면 면서기로 있다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내 장날 홍명희가 만세운동을 벌인 후 다음 장날인 3월 24일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洪性憙), 소수면 서기 김인수(金仁洙) 등과 의논하고 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는 "홍성희와 구창회는 공모하여 3월 24일 괴산 장날에 한국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운동을 하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라고 판결하였다. 구창회는 그해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출옥 후 시대일보 판매부 직원으로 근무했다.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시대일보사 내에 조직된 경성부 제4야체이카, 언론기관 프랙션 등에 배속되었다가, 그해 7월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9년 3월 17일 출옥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시기 경성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강병도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강병창 등과 이미 면식이 있던 사이로 보인다.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참고.[32] 진주지역 실업가 중 구창회가 있으나 한자 이름이 다르다.[33] 해방 후 이력 : 조선인민공화국 재무부 대리,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상임위원, 사회노동당 중앙기관지 부장, 사회과학대사전 편찬위원
공의 휘는 영진이오 자는 여옥이며 우천은 그 호이다. 시조 휘 공진은 고려 충신으로 그 활력이 역사에 빛나며 중고에 송정 선생 휘 수일은 남명에 사숙하고 대각서원에 배향되니 곧 공의 십이대조이다. 고조는 휘 철현이고 호는 묵화이며 증조는 휘 성운이며 호는 인재이며 조는 휘 재억이오 선공가감역이었고 고는 휘 세진이오 성균진사를 지냈는데 역대로 모두 후덕과 인문이 있었다. 비는 해주정씨 충공문중의 후(後)이오 감찰환교의 따님이며 부덕의 O범이 있었다.
공이 1896년 고종 병신에 출생하여 십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으며 모부인의 명으로 회봉옹에게 수학하였다. 1919년 기미인산날에 동향 허공 (許公)만정 (萬正)과 한성에서 만세운동을 몸소 겪고 곧 더불어 독립 OO의 방도를 강구한 끝에 시세를 헤아려 우선 인재 양성보다 마땅함이 없다고 판단되므로 돌아와 창의모재하여 고등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외인의 O제때문에 여학교로 만들고 해온 (解慍) 백남훈 (白南薰)을 맞아 교장으로 삼았다. 지금 진주여자고교가 곧 그것이다. 또한 그 뒤에 당시 부호(富豪) 이종만 (李鍾萬)과 협력하여 한성에 남우학원 (南友學院) 을 세워 이를 확장육성 (擴張育成)해 오던 중 후일 매부(妹夫) 조공 (趙公) 홍제 (洪濟) 에게 맡겨 터전을 크게 넓히니 곧 지금의 배명 (培明) 고교이다. 이보다 앞서 심산 (心山) 김창숙(金昌淑)옹이 유림의 장서를 OO 하고 기미 평화회의에 나아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그 비용이 거대하여 공이 거금을 내어 이를 도우고도 일찍이 일을 타인에게 자랑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더욱 공을 높이 보았다. 광복 후 시사일변함을 보고 서울의 우거(寓居)에서 OO하여 고장(故庄)으로 돌아온 후 다시 육이오의 난을 겪게 되어 크게 지친 공은 O생의 사업으로 심열을 기울인 학교에서마저 손을 떼고 종래 원림에 은거하는 몸이 되었다. 이어 존조보본에 전념하여 선묘를 개수하고 석의를 갖추며 또한 재종족과 논의하여 진양성중에 충의당과 경충사를 지어 선조를 모시니 이것이 공의 평생의 대업이다.
1966년 병오 8월 19일에 몰하니 향년 칠십일이오 대천 구태동산 경자원에 장사하였다. 배는 광주이씨 상용의 따님이오 숭덕재 윤경의 후이며 O순정O하여 군자의 배필로서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묘는 사곡뒤 서록해좌이다. 일자 석근은 훌륭히 가업을 잇고 밀양박씨 낙촌충원의 후인 태식의 따님을 취하여 아들 병길, 병훈, 병환, 병O를 두었고 병길은 일남일녀, 병훈은 이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하여 가로대 우석을 벗하였으니 부하면서 청하여도다. 일생에 선을 행하면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도다. 살아서 순하였으니 돌아가서도 평안하리라.
성균관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여주 이우성 찬
무술년 2월 17일[25] 문집의 서문은 회봉(晦峯) 하겸진이, 발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썼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해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경상국립대학교 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에서 소장 중에 있다.[26] 회사 감사로 영남춘추 발행인이고, 형평운동(백정의 계급해방운동)가인 신현수선생이 등기되어 있다.[27] 이 회사는 김진수(金鎭壽)가 대표취체역으로 1937년 8월 11일 설립, 1937년 11월 17일 등기한 회사이다. 1937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일본군에게 헌금한 내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진수는 친일 관련 인사로 보인다.[28] 1899년생. 포해 김정규는 합천 초계 출신으로1924년 대구노동공제회 집행위원이었다. 일본에 유학해 주오(中央)대학, 메이지(明治)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여 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해방운동』 동인이 되었다. 1926년 2월 조선공산당 일본부 책임비서로 활동 중, 그해 7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만기출소 후 신간회 활동도 한 민족지사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대구출신 민족시인 이상화(시인)에게 받은 12폭 병풍을 김정규지사 후손이 2020년 대구시에 기증했다. 대구시에 기증된 병풍은 '금강산 구곡담 시'를 담은 10폭 병풍으로 죽농 서동균이 행초서로 쓴 서예 작품이다. 병풍의 마지막 폭에 1932년 죽농 서동균이 글씨를 쓰고 시인 이상화가 포해 김정규에게 선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29] 1894년생, 호는 몽공(夢空), 합천지역 독립운동가[30] 역사비평 1989년 5월 기사 참조.[31] 1919년 3.1 운동 당시 괴산면 면서기로 있다가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내 장날 홍명희가 만세운동을 벌인 후 다음 장날인 3월 24일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洪性憙), 소수면 서기 김인수(金仁洙) 등과 의논하고 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는 "홍성희와 구창회는 공모하여 3월 24일 괴산 장날에 한국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운동을 하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라고 판결하였다. 구창회는 그해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출옥 후 시대일보 판매부 직원으로 근무했다. 1924년 화요회에 가입했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시대일보사 내에 조직된 경성부 제4야체이카, 언론기관 프랙션 등에 배속되었다가, 그해 7월 체포되어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9년 3월 17일 출옥하였다. 그러므로 같은 시기 경성부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강병도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강병창 등과 이미 면식이 있던 사이로 보인다.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참고.[32] 진주지역 실업가 중 구창회가 있으나 한자 이름이 다르다.[33] 해방 후 이력 : 조선인민공화국 재무부 대리,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 상임위원, 사회노동당 중앙기관지 부장, 사회과학대사전 편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