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9 18:57:29

46(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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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29일

1983년 12월 12일

1984년 6월 23일

1985년 9월 14일

1986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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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Сорок шест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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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알려져 있는 앨범 아트 (모로즈 레코드 1996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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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201c><colcolor=#fff> 발매일 1982년 12월 12일
녹음 기간 1983년 가을
장르 소프트 록, 러시안 록
재생 시간 35:57
곡 수 12곡
프로듀서 알렉세이 비시냐(Алексей Вишня)
스튜디오 Яншива Шела(얀시바 셸라)
레이블 Яншива Шела(1983년 발매)
Moroz Records(1994년 재발매)
Maschina Records(2025년 재발매)
1. 개요2. 역사3. 트랙리스트
3.1. Троллейбус (트롤리버스)3.2. Камчатка (캄차카)3.3. Транквилизатор (신경안정제)3.4. Я Иду По Улице (난 거리를 걸어가)3.5. Дождь Для Нас (우리를 위한 비)3.6. Пора (때가 되었다)3.7. Каждую Ночь (매일 밤)3.8. Без Десяти (10분 전)3.9. Музыка Волн (파도의 노래)3.10. Саша (사샤)3.11. Хочу Быть С Тобой (너와 함께 있고 싶어)3.12. Генерал (장군)

1. 개요

소련의 록그룹 키노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으로, 사실상 1984년 앨범 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의 데모 앨범에 해당한다.

멤버들의 동의 없이 프로듀서였던 알렉세이 비시냐가 베포하였으며, 초이는 이 앨범을 키노의 정규 앨범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2. 역사

1집 '45'의 녹음 이후 키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정기적으로 어쿠스틱 콘서트를 열었고, 인맥을 쌓으며 새 앨범 녹음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집 당시 사용했던 스튜디오 '안트로프'가 아크바리움의 앨범 제작에 힘을 쏟고 있었기에 초이와 리빈은 그레벤시코프가 소개해 준 레닌그라드의 여러 스튜디오들을 돌아다니며 다음 앨범을 녹음할 곳을 찾아다녔다.

이후 이들은 1982년 말 레닌그라드의 드라마 소극장(Малый драматический театр)에서 "마지막 영웅"(Последний герой)[1]으로 알려진 새 앨범의 녹음을 시작하였다. 해당 소극장의 음향 감독인 안드레이 쿠스코프(Андрей Кусков)가 음향 작업을 맡았고, 이후 마이크 나우멘코의 밴드 "주파르크"(Зоопарк)의 드러머가 되는 발레리 키릴로프(Валерий Кирилов)가 드럼을 맡았다. 이 앨범에는 리빈의 노래를 포함해 약 12개 정도의 노래가 수록될 에정이었고, 밴드는 "여름"(Лето), "봄"(Весна), "노랫거리를 찾아서"(В поисках сюжета), "아침 일곱시 경"(Около семи утра), "마지막 영웅"(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등 다섯 곡을 녹음했다. 그러나 초이가 녹음 결과물과 드럼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에 이 앨범은 제작이 무산되었다. 이 녹음의 원본 마스터 테이프의 행방은 불명인데, 초이가 폐기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폐기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데, 초이 본이이 모스크바 혹은 레닌그라드 지하철 어딘가에 던져버렸다는 썰이 유명하다. 다행히 키릴로프가 녹화본을 떠놨기에 음원 자체는 살아남았고, 이후 1992년 모로즈 레코드에서 출시한 컴필레이션 앨범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Неизвестные песни)에 수록되며 공개되었다.[2]

앨범 제작이 무산된 이후 초이와 리빈은 베이시스트 막심 콜로소프(Максим Колосов)와 협업하였다. 초이는 아크바리움의 첼리스트 프세볼로트 가켈(Всеволод Гаккель)의 활동 30주년을 기념하여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있을 예정이었던 아크바리움의 공연에 맞춰 일렉트릭 콘서트 라인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후 콜로소프의 친구였던 기타리스트 유리 카스파랸(Юрий Каспарян)도 키노에 합류했다. 1983년 2월 19일 키노의 두 번째 일렉트릭 공연이 열렸으나, 급조된 라인업과 미숙한 준비로 인해 공연은 전반적으로 엉망이었다.
Это был второй электрический концерт группы в её жизни. Первый состоялся почти год назад и, как и положено первому блину, вышел комом. Второй ком тоже вышел блином. Чёрте что с составом! Рыба ещё не исчез, но это был, так сказать, его прощальный ужин. С перепугу, или ещё из каких соображений он забыл застегнуть молнию на брюках. К тому же, очень активно двигался по сцене, видимо, решив стать шоуменом. Юрик Каспарян с остекленевшим взглядом и одеревеневшими ногами терзал свою «Музиму», а рядом стоял какой-то его приятель, который почему-то решил, что он бас-гитарист. С таким же успехом это могла сделать я или первый попавшийся водопроводчик. Я уже не помню, кто там был на барабанах; помню только, что весь состав Цою не помогал, а ужасно мешал и, несмотря на Витины старания, ничего хорошего не получилось. Слава Богу, что уже год, как существовал альбом «Сорок пять», иначе не миновать Цою насмешливых реплик из публики, или даже «подарков» в виде всяких предметов, летящих на сцену.
그 공연은 그룹 역사상 두 번째로 있었던 일렉트릭 공연이었다. 첫 번째 공연은 그로부터 약 1년 전에 있었고,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두 번째 공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라인업이 엉망이었다! 리바(Рыба)[3]는 당시까지 밴드에서 나가지 않았지만, 이 공연은 말하자면 그의 고별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당황해서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바지 지퍼도 잠그는 것을 잊었다. 거기에 쇼맨이 되기로 결심했는지 무대 위에서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유리 카스파랸은 굳은 표정과 경직된 다리로 '무지마(Музима)' 기타를 고문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웬일인지 자기가 베이시스트라고 생각한 그의 친구가 서 있었다. 그런 식이라면 나나 지나가는 배관공이라도 공연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드럼을 누가 맡았는지는 기억나지도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전체 라인업이 초이를 돕기는커녕 끔찍하게 방해만 했고, 빅토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1년 전부터 "45" 앨범이 있었기에 초이는 관객들의 비웃음이나 무대로 날아드는 물건 같은 '선물'은 피할 수 있었다.[M]

앨범 녹음의 무산 이전부터 초이와 리빈은 밴드의 방향이나 음악 세계 등에 있어 갈등을 빚어왔으나, 두 번째 일렉 공연 이후 이들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결국 이는 리빈의 탈퇴라는 형태로 종결되었고, 키노의 밴드 활동은 잠시 활동 소강기에 들어갔다. 리빈은 정기적으로 모스크바로 가서 음악가 세르게이 리젠코(Сергей Рыженко)와 그의 펑크 프로젝트 '푸트볼(Футбол)'에서 듀엣으로 공연했고, 초이는 휴식기를 선언하고 무대에서 잠적했다. 1983년 5월 제1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이 열렸을 때, 멤버들도 없는데다 그렇다고 어쿠스틱 기타로 공연을 하고 싶지도 않았던 초이는 관객으로만 참석했다. 대신 초이는 아크바리움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와 활발히 교류했고, 둘은 아내들과 함께 같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포도주를 마시고 동양 철학과 브루스 리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해 가을, 초이는 소련군의 징집 대상이 되었다. 당시 징집병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끌려갈 확률이 높았고, 특히 "동양계 혹은 동양계로 보이는 병사는 우선적으로 아프간에 간다"는 말이 돌던 상황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초이는 정신병원에 들어갔고 "백색 서류"[5]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신병원 생활은 예상보다 힘들었고, 초이는 여기서 영향을 받아 노래 "신경안정제"(Транквилизатор)를 작곡했다.
Раньше Цой очень успешно косил армию, учась в разных ПТУ. ПТУ привлекали его как раз с этой точки зрения, потому что оттуда в армию не забирали… Он просто не мог на два года уйти от рок-н-ролла в какие-то войска. Все кругом косили, все как-то нас поддерживали: „Ну подумаешь, сумасшедший дом! Ну посидишь там две недели!“. Вышло полтора месяца.
그 전까지 초이는 여러 직업기술학교(ПТУ)들을 다니며 군 복무를 매우 성공적으로 회피했다. 직업기술학교에 가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초이는 이를 좋아했다... 초이는 2년 동안 락앤롤을 떠나 군대에 갈 수 없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군대를 기피했고, 모두가 우리를 지지해 주었다. '정신병원이 뭐 어때서! 2주만 있다 오면 되지!' 다들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오기까지 1달 반이 걸렸다.[M]

정신병원에서 나온 초이는 여러 미발표 곡들을 비축해 둔 상태였기에 시험 삼아 녹음을 해보기로 했고, "45" 녹음을 통해 알게 된 알렉세이 비시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7][8] 비시냐는 안트로프에서 "45" 녹음 당시 이를 토대로 음향 녹음 작업의 기초를 배웠고, 또 그레벤시코프에게서 기타 레슨을 받았다. 트로필로의 도움 아래 비시냐는 이런 저런 괜찮은 기기들을 여럿 손에 넣어 자신의 집에 소규모 비밀 스튜디오를 차려놓은 상태였고, 이를 숨기기 위해 "얀시바 셀라"라는 의도적으로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붙였다.
После этой больницы он стал совершенно не таким человеком, каким я его знал. Более того, он стал полной противоположностью того Витьки, с которым вы писали „Сорок пять“. И таким он сохранился до самой своей смерти. Именно тогда он стал тем ВИКТОРОМ ЦОЕМ, которого мы вот сейчас имеем. Со всех заглавных букв… У него была куча комплексов, это ни для кого не секрет. Каждый, кто его знал лично, это подтвердит. И, видимо, он решил разом от всех от них избавиться. И немножко перестарался в этом деле. Было иногда впечатление, что он просто сошёл с ума.
병원에서 나온 이후 초이는 내가 알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 나아가, 같이 "45"를 녹음했던 빅토르와 정반대의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런 모습으로 남았다. 바로 그 때 그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 "빅토르 초이"가 되었다... 그에게는 많은 콤플렉스가 있었고, 이는 전혀 비밀이 아니었다.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그 모든 것에서 한 번에 벗어나기로 결심했던 것 같지만, 그게 약간 과했던 것 같다. 때로는 그가 그냥 미쳐버린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V]

1983년 가을 초이는 카스파랸과 노래를 녹음했다. 초이가 기타와 보컬을, 카스파랸이 기타를 녹음했다. 비시냐는 녹음 외에도 TV 포장 상자를 관장기(клизма)의 고무 벌브로 덧씌운 드라이버로 두드려가며 리듬을 맞춰주었다.[10] 녹음은 이틀 만에 끝났고, 녹음한 반주에 초이의 보컬을 오버더빙해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녹음 자체는 상당히 간단하고 또 아마추어스럽기까지 했는데, 사실 이 녹음은 원래 초이가 자신의 노래를 가지고 당시까지 미숙한 기타리스트였던 카스파랸이 집에서 연습할 수 있게 만든 일종의 가이드 녹음이었기 때문이었다.
… если бы не записали у меня втроём «46» — Тропилло бы не услышал убогость материала заранее, и не нагнал бы на перепись этих песен (в 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 Бутмана, Губермана, Курёхина и ещё чёрта в ступе. Он вообще не стал бы его записывать — ибо не нравился он особо Тропилле. Когда я сказал Андрею, что в восторге от «Кино», он посмеялся надо мной: „ну и нормально — ты же любишь свою Аббу — будешь писать «Кино».
… 만약 우리 셋이서 '46'을 녹음하지 않았다면, 트로필로는 사전에 녹음이 얼마나 빈약한지 듣지 못했을 것이고, 이 노래들을 ('나찰니크 캄차트키'에서) 다시 녹음하기 위해 부트만, 구베르만, 쿠료힌, 그리고 그 외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녹음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트로필로는 키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안드레이(트로필로)에게 키노에 열광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나에게 비웃으며 말했다. "뭐 상관 없소. 당신은 당신네 ABBA를 좋아하지 않소? 당신은 '키노'나 녹음하게 될 거요."[V][12]

"46"의 노래는 대체로 이전 앨범의 특징인 도시적 낭만주의의 노선을 이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노래 자체는 "45" 시절보다 더 어둡고 차가운 느낌이 두드러지며, 이는 특히 전반적으로 거칠게 녹음된 음색과 카스파랸의 다소 단조로운 연주로 인해 극대화된다.
Юрка Каспарян в то время не блестяще играл на гитаре, но Витька его всегда защищал, исходя из того, что это правильный человек, а играть научится. И был абсолютно прав, как опыт показал.
유리 카스파랸은 그 당시 기타를 훌륭하게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빅토르는 그가 맞는 사람이고 연주는 차차 배워나가게 될 것이라며 항상 그를 변호했다. 그리고 경험이 보여주듯, 그의 말이 맞았다.[13]

상술했듯 초이는 "46"을 단순 데모 앨범 혹은 리허설 녹음으로만 간주했으나, 그해 12월 비시냐는 초이의 허락 없이 이를 마그니토알봄(테이프 앨범)으로 제작해 유포하였다.[14] 빅토르는 이에 화를 냈으며 결국 체념과 함께 수용하긴 했으나, 생전 한 번도 "46"을 키노의 공식 앨범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후 "46"에 수록된 노래들은 "난 거리를 따라 내려가"(Я иду по улице)[15], "때가 되었다"(Пора), "10분 전"(Без десяти)을 제외하면 전부 다른 앨범에서 재녹음 · 재수록되었다.[16]

1996년 모로즈 레코드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해 재발매된 앨범에는 1983-85년 사이 크바르티르니크에서 부른 "한 마리 새가 되어"(Стань птицей)», "셀바"(Сельва)[17], "나는 보일러공이 되고 싶어"(Я хочу быть кочегаром) 세 곡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이 중 "한 마리 새가 되어"는 2025년 마시나 레코드 재판본에도 수록되었다.

3. 트랙리스트

3.1. Троллейбус (트롤리버스)

3.2. Камчатка (캄차카)

3.3. Транквилизатор (신경안정제)


3.4. Я Иду По Улице (난 거리를 걸어가)


3.5. Дождь Для Нас (우리를 위한 비)


3.6. Пора (때가 되었다)


3.7. Каждую Ночь (매일 밤)


3.8. Без Десяти (10분 전)


3.9. Музыка Волн (파도의 노래)


3.10. Саша (사샤)


3.11. Хочу Быть С Тобой (너와 함께 있고 싶어)


3.12. Генерал (장군)


[1] 1989년 키노가 제작한 리믹스 앨범과는 제목만 같을 뿐 관련이 없는 앨범이다.[2] 이 앨범에 수록된 "В поисках сюжета" 트랙은 불완전한데, 앞 58초 정도의 부분이 전부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키릴로프가 집에서 작업하던 중 기르던 고양이가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본 테이프를 훼손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썰이 있는데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이 트랙은 불완전 상태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다른 사본이 발견되어 2025년 마시나 레코드 재판본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3] 알렉세이 리빈의 별명[M] 초이의 아내 마리아나 초이(Марианна Цой)의 회고.[5] белый билет. 건강 상태 또는 기타 사유로 군 복무에 부적합하거나 군대에 복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발급되는 서류. 실제 병역 대상자는 "빨간 서류(군사증)"을 발급받았다.[M] [7] 이에 대해서는 비시냐가 먼저 초이에게 녹음을 제안했고, 초이는 처음에는 이 제안에 회의적이었으나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는 의견도 있다.[8] 소련 시절 초이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이런 무허가 사설 스튜디오가 아니면 녹음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소련 시절 공식적으로 운영되던 스튜디오는 국영 음반사(이자 소련의 유일한 음반사이기도 했던) "멜로디야" 산하 스튜디오밖에 없었는데, 여긴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음악가로 직업을 인정받은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V] 비시냐가 리빈과 나눈 대화의 일부.[10] 이 과정에서 초이와 카스파랸은 음악가로서 거의 "제로" 수준이었고, 녹음이 끝날 무렵에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둘 모두 한 번도 재녹음을 요청하지 않아 본인은 꽤 놀랐다고 비시냐는 증언했다.[V] [12] 안드레이 트로필로는 당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에게 있어 필수적이었던 사설 스튜디오 환경을 제공해 준 인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입맛에 따라 밴드를 고르고(카스퍄란은 이를 "물관리"(фейсконтроль)라는 단어로 비판했다) 이들의 저작권을 슬쩍 가져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키노와 트로필로 간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으나, 그럼에도 "키노" 더 나아가 빅토르 초이란 인물 또한 결국 그레벤시코프와 안트로프가 없었다면 그냥 레닌그라드의 무명 밴드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다.[13] 보리스 그레벤시코프의 회고.[14] "46"이라는 앨범 제목도 비시냐가 선택한 제목이다.[15] "Транквилизатор"와 함꼐 정신병원 시절 작곡한 노래라고 한다.[16] 이 세 곡은 이후 크바르티르니크에서 2-3번 정도 부른 것이 전부이다.[17] 세르게이 쿠료힌의 노래. 초이가 부른 노래 중 몇 안 되는 레게 스타일의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