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 영상 |
1. 개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은 1986년 9월 20일 14시에 서울특별시 강동구 잠실동[1]에 있는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막하였다. 화창한 날씨였던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과 달리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 당시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어서[2] 개회식 영상을 보면 우산을 쓰고 있는 관중들이 많이 보였다.[3][4]이 개회식에서 했었던 공연들은 2년 후 1988 서울 올림픽 개, 폐회식에서 재사용된 것들이 많다. 개회식에서는 태권도 시범, 용고행렬, 매스게임, 대회기 입장 때 취타대 동반 입장이 있고, 다음 공연으로 넘어갈 때 영상과 함께 송출됐던 다듬이질 소리가 폐회식 오작교 공연의 다리놓기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2. 식전행사
개막식이 시작되기 직전 전광판에서 세고 있던 10초의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에밀레종이 울리면서 식전행사가 시작되었다.영고를 시작으로 청실홍실 그리고 어린 소녀들이 나오는 꼭둑각시,[5][6] 그리고 대규모 매스게임인 손님 맞이 파트[7]가 진행되었고 마지막에 제10회 아시안 게임 대회 로고와 함께 10' SEOUL 이라는 글자로 마무리 하였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내외가 경기장에 입장하고 고적대가 입장하며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마지막에 남대문 모양으로 퍼포먼스를 완성하고 대형 태극기를 펼치면서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기수단의 입장과 동시에 선수단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이때 관중들은 아시안 게임 로고와 대회 표어 'EVER ONWARD'(영원한 전진) 그리고 'WELCOME'(환영) 카드섹션을 선보였다. 여담으로 한국 선수들이 입장할 때는 신아리랑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3. 공식행사
영파여고 학생 300명이 아시안 게임 엠블럼이 그려진 깃발을 앞세우고 먼저 입장했다. 그 다음 한글 가나다순에 따라 네팔 선수단이 가장 먼저 입장했고 마지막 27번째로 대한민국 선수단이 이민우 역도선수[8]를 기수로 하여 입장했다. 선수들이 전원 입장하고 1회 대회기 전달에 이어 이후 박세직 조직위원장의 대회사와 OCA 회장의 환영사를 연설된 다음 전두환 대통령이 개회선언을 하자 팡파르가 울리면서 공수특전단의 공중 퍼레이드를 벌였다.[9]대회기가 게양되고 성화찬가와 함께 성화가 점화되고 김호철 배구선수와 김진호 양궁선수의 선수선서를 끝으로 선수들이 퇴장하면서 공식행사는 끝을 맺는다.
4. 식후행사
아침의 나라를 시작으로 신천지, 겨울꽃, 봄처녀, 약동, 고놀이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지막 '영원한 전진' 파트에는 손님 맞이 파트의 출연진이 다시 출연하여 OCA 로고와 참가국 국기를 나타내며 개회식 출연진 전원으로 하여금 서울의 찬가와 아침의 나라에서 부분을 결합한 주제가를 제창하며 개회식이 막을 내린다.5. 재조명
서울 아시안게임 이후 38년 만에 장대비 속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의 개회식에 오만가지 혹평이 쏟아지면서 똑같이 장대비 속에서 열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이 재조명되고 있다. 1986년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 듣보잡이었고 그나마 한국을 조금 안다는 외국인들은 북한의 악선전으로 인해 한국을 여전히 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서울 아시안게임 전까지 대규모 국제 종합대회를 개최해 본 적이 전혀 없었는데, 서울 아시안게임 개회식을 장대비 속에서 이렇다 할 사고 없이[10] 무사히 훌륭하게 치러낸 대한민국이 실로 대단할 따름이다.6. 여담
위의 영상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개회식의 사회는 KBS의 원종관(한국어) 아나운서와 차명희(영어) 아나운서가[11] 맡았다.[1] 잠실동이 송파구로 편입된 것은 1988년이었다.[2] 당시 대만 인근에서 북상하는 태풍 '애비'의 영향으로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개회식 당일 서울에 11.6mm의 강수량이 관측되었다. 이 날 호남과 제주 지역에는 최대 100mm 남짓의 강수량이 관측되기도 했다.[3] MBC 개막식 영상을 보면 선수들이 퇴장 할때 앵커가 빗발이 굵어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한뉴스 영상으로도 땅이 젖어있는 걸 볼 수 있다.[4] 이후 2024 파리 올림픽의 개회식이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치러졌다.[5] 잠신초등학교와 삼전초등학교 2~5학년 여자어린이 1200명이 출연했다.[6] 당시는 꼭둑각시가 맞춤법에 맞는 표현이었다. 현재는 꼭두각시가 맞는 표현이다.[7] 세종대학교, 서울여고, 창덕여고 학생 1300명이 동원되었다.[8] 이듬해인 1987년 민속씨름 선수로 전향한다. 이 때문에 이 대회 금메달로 얻은 병역특례를 취소당했는데, 체중과다로 결국 입대하지는 않았다. 서울 아시안 게임 20주년이던 2006년 9월 9일 사망했다.[9] 2년 뒤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도 공중 낙하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아시안 게임 개회식의 낙하 여건이 올림픽 개회식보다 더 나빴다. 올림픽 때는 맑은 날씨에 운동장 한가운데로 낙하하면 됐지만 아시안 게임 때는 비가 내렸고 도열해있는 선수단 앞 육상 트랙으로 착지를 해야 했다. 결국 일부 대원들이 착지 과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이 있었으나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기에 금방 일어났고 전원이 성공적으로 낙하한 뒤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례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쳤다.[10] 출연자 중 몇몇이 비에 젖은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진 정도였다. 하지만 행사 진행에 큰 지장을 줄 정도의 대형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11] 두 사람은 나란히 2년 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도 개회식 한국어 장내 방송과 영어 장내 방송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