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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姫島, ruby=ひめしま)][ruby(村, ruby=むら)] 히메시마무라 / Himeshima Villag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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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 기장(村章) | |
국가 | 일본 |
지방 | 규슈 |
도도부현 | 오이타현 |
면적 | 6.99 km² |
인구 | 1,692명[1] |
상징 | |
시화 | 들국화(ノジギク) |
시목 | 흑송(黒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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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시마촌청 |
[clearfix]
1. 개요
일본 오이타현에 위치한 유일한 촌(村). 오이타현에서 유일하게 섬으로 이루어진 지자체이다.2. 지리
히메시마섬은 구니사키반도 위에 위치하며, 스오 해협과 이요 해협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관내에는 3개의 산이 있으며, 야하즈(矢筈)산이 266m로 가장 높다.3. 역사
헤이안 시대부터 우사 신궁이 지배하던 곳이다. 그 뒤 전국시대에는 분고국을 다스리던 오토모씨가의 영역이 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하야미국의 기쓰키번에 속한 지역이었다.폐번치현 이후에는 기쓰키현에 속했다가 기쓰키현이 오이타현에 합병되면서 오이타현 히가시쿠니사키군의 히메시마무라가 되었다.
이후 1950년대 후지모토 가문의 후지모토 겐키치(藤本憲吉)와 시카노 가문의 시카노 가메타로(鹿野龜太郞)가 이 섬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이 두 가문과 그들을 지지하는 파벌은 6.25 전쟁 시기에 그 전쟁 못지 않게 치열하게 싸워댔는데 결국 1955년에 촌장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두 당주들 모두 동일하게 상대 가문의 씨를 완벽히 말려버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이 선거에서 후지모토 겐키치가 당선되었으며 당연히 후지모토 가문은 시카노 가문과 그 지지자들을 섬을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괴롭혀댔다. 결국 시카노 가문의 지지자들은 거의 다 섬을 떠났고 시카노 가문의 구성원들은 숨어 지냈다.
1957년, 촌장 후지모토 겐키치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사임했으며, 이에 시카노 가문에서 시카노 가메타로를 선거 없이 촌장에 취임시켰다. 하지만 촌장만 시카노 가메타로일 뿐 촌의원들[2]이 죄다 후지모토 가문의 일당들이었으며 시카노 가메타로는 완전히 바지사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바지사장으로 지내는 것을 견디다 못한 시카노 가메타로는 1959년 12월 촌장직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시카노 가문은 전부 섬을 떠났다.
시카노 가메타로가 투표 없이 촌장에 올랐다는 점을 내걸어 후지모토 겐키치의 장남 후지모토 쿠마오(藤本熊雄[3], 1911년 2월 26일 ~ 1984년 10월 25일)가 똑같이 선거를 치르지 않고 새 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이젠 촌장선거 안 한다라고 선언했다. 즉, 종신집권인 셈이다. 그리고 2016년까지 촌장투표는 없었으며, 그렇게 후지모토 쿠마오는 1984년에 사망할 때까지 종신집권 했다. 이후 후지모토 쿠마오의 아들이자 후지모토 겐키치의 손자인 후지모토 아키오(藤本 昭夫, 1943년 5월 24일 ~ )가 새 촌장에 취임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후지모토 쿠마오가 살아생전 히메시마무라의 경제를 개발시켰기 때문이었다.
후지모토 쿠마오는 촌장에 취임한 직후, 히메시마무라의 주 산업인 염전 산업이 망해가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히메시마무라의 공적자금 1억 8300만 엔을 단 한 푼도 남김없이 모두 투자해서 보리새우[4] 양식 사업에 뛰어들었다.[5] 그렇게 후지모토 쿠마오는 10년 이상 보리새우 양식에 매달리며 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일본의 보리새우 생산량의 10%를 생산하는 데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후지모토 쿠마오의 보리새우 회사에 취직해 직원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는 1949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일가친척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훗날 자유민주당 부총재에 오르는 등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촌장인 후지모토 가문의 든든한 빽이 되어줬다.
이렇게 돈도 많이 벌고 히메시마무라 내부에서 절대 권력도 휘두를 수 있게 된 후지모토 쿠마오 촌장은 히메시마무라의 유일한 항구를 접수한 뒤 1972년에 민간 해운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 해운사는 오직 단 한 척의 페리선으로만 운항을 했는데 그것이 '히메시마마루'라는 페리선이다. 그리고 나머지 선박은 모조리 입항을 금지시켰고 오직 히메시마마루만이 이 섬을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만들었다. 당연히 헬기를 비롯한 항공 수단도 입도(入島)를 금지시켰다. 이 히메시마마루는 명목상으로는 히메시마무라의 소유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후지모토 쿠마오 개인 사유물이었다. 그 선박이 유일한 통로였으니, 반(反) 후지모토 가문 성향을 띄면 섬에 얼씬거리지조차 못하게 했다. 이렇게 히메시마무라는 일본 속의 북조선이 되어갔다. 이후 후지모토 쿠마오는 모든 주민들의 재산을 평준화 시킨다는 이유로 공무원을 많이 고용하는 대신 급여는 크게 삭감해서 전 주민 7명 중 1명을 공무원으로 만들었다.
일이 이지경까지 가자 이젠 히메시마무라는 후지모토 가문에 100%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이용해 후지모토 쿠마오는 거의 주체사상급 세뇌를 해서 후지모토 쿠마오에 대한 대대적인 우상화를 실시했다. 히메시마무라에는 대학교와 고등학교는 없고, 초등학교 1개교, 중학교 1개교, 이렇게 학교가 단 2개교 뿐이지만 여기에서는 후지모토 쿠마오에 대한 우상화 과목까지 존재할 정도로 세뇌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섬 밖으로 나가야만 했고, 그렇게 섬 밖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이 아이들은 극심한 문화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실제로도 히메시마무라는 매년 10월 후지모토 쿠마오를 반쯤 신으로 숭배하다시피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후지모토 쿠마오의 아들인 후지모토 아키오가 촌장에 취임하자 자기 아버지 동상을 건립하는가 하면 가문의 재산을 아낌없이 들이부어 하수도 공사, 요양원 건립, 광케이블 설치, 무료 급식 등 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편 그걸 빌미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후지모토 가문 내부에서 후지모토 쿠마오식 지배에 반기를 든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후지모토 도시카즈(藤本敏和, 1949년 ~ )이다. 후지모토 도시카즈는 NHK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대한민국으로 건너가서 경희대학교 교수로 일한 재원이었다. 후지모토 도시카즈는 히메시마무라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서 후지모토 아키오에게 이를 말하고 히메시마무라의 상태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했으나 후지모토 아키오는 엿을 날리며 거절했다. 결국 2016년에 후지모토 아키오와 후지모토 도시카즈가 촌장선거로 맞붙었으나 당연히 이북식 지배체계에 익숙한 히메시마무라 주민들은 후지모토 아키오에게 몰표를 줬다. 그렇게 후지모토 도시카즈는 간단하게 낙선되었지만 완벽한 패배는 아니었다. 61년 만에 선거를 맛본 히메시마무라 주민들은 마음속에서 무언가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2020년 다시 촌장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이 때 역시 후지모토 아키오가 후지모토 도시카즈를 이겼으나 927표 대 594표로 표 차이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2024년 후지모토 아키오가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고 히메시마무라 출생인 다이카이 야스하루(大海靖治)가 새 촌장에 취임했으나, 일각에서는 이 '다이카이 야스하루'라는 자를 후지모토 아키오의 바지사장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같은 일로 인해 일본 내부에서 히메시마무라는 일본의 북조선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