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명예 훈장 수훈자 | |
<colbgcolor=#00518f><colcolor=white> 날짜 | 1953년 |
이름 | 히로시 미야무라 |
히로시 미야무라 ヒロシ・H・ミヤムラ|Hiroshi "Hershey" Miyamura | |
출생 | 1925년 10월 6일 |
사망 | 2022년 11월 29일 (향년 97세) |
복무 기간 | 1945년 ~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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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일본계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한국전 연천 전투의 영웅이자 퍼플 하트와 명예 훈장 수여자인 역전의 용사이다.2. 생애
1925년 10월 6일, 미국 뉴멕시코주 갤럽에서 출생하였다. 히로시의 부모는 모두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일본계 미국인 1세였다. 당시 갤럽은 탄광촌이 형성되어 있어 외국인 노동자들을 다수 받아들였기에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의 이민자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의외로 자기들끼리 뭉치려는 경향이 적었다. 인종차별 자체가 거의 없었고 동양인,흑인, 유럽계 백인들이 스스럼없이 미국인으로 서로를 인식하고 지냈던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히로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이민자들의 후손은 자기 자신을 이민자가 아닌 미국인으로서 인식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이 거의 없었던것이다. 허쉬라는 닉네임은 학교 선생님이 히로시라는 발음이 어려워 편하게 허쉬라고 부른게 기원이고 스스로도 자신의 이름을 허쉬라고 받아들인다.이후 1942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나이가 차자마자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를 자원했으나,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사실 당시 수만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계라는 이유만으로 억류되거나 수용시설로 옮겨지던 상황이었고 히로시는 오히려 갤럽시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한 덕분에 수용되지 않아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자신을 미국인으로 인식했기에 혼란을 겪게 된다.
이후 1945년 1월에서야 육군 사병으로의 입대가 허가되어 입대했고, 일본계 미국인들로만 구성된 부대인 육군 제442연대 100대대에서 기관총 사수 훈련을 받았으나 훈련이 종료되기전 전쟁이 종료되어 소집해제되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김영옥 대령의 부하였으나 2차대전에 참전하지는 못했다.
2.1. 6.25 전쟁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 소집되어 미군 육군 제3보병사단 7연대 2대대 H중대 기관총 사수를 맡았으며 분대장 직책도 겸하게 되었다.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살던중 한국전 발발 신문을 보고 갓 결혼한 부인을 두고 미련없이 재소집에 자원하였다.1951년 4월 24일 밤에 다른 분대 하나와 함께 연천군 대전리 인근의 450야드 (400m 가량) 정도 길이의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는데[1] 중공군이 야간행군을 통해 두 진지를 각각 포위하고 대대적인 돌격을 가했다. 이때 밤에 공세를 가한 것이라 눈치채기 어려웠는데, 중공군이 포위해놓고는 나팔과 꽹가리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어 미리 상황을 대략 알고 대처할 수 있었다.
하여간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던 중 다른 분대 진지는 결국 방어력이 다하고, 분대장마저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입은채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다. 결국 히로시의 진지에 모든 공격이 집중되던 와중 분대원 한명이 부상을 입자 히로시는 다른 분대원에게 부상자를 부축해서 빠져나가도록 지시하고, 혼자 진지에 남는다. 이후 기관총을 사용해 방어를 지속하다가 기관총 탄약이 바닥나자 히로시는 M1개런드 소총에 총검을 장착하고 역으로 중공군을 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밤이었기 때문에 원거리에서의 교전이 쉽지 않아 총검을 무기로 침투하여 신출귀몰하게 중공군을 그야말로 학살하고 다녔으며 수십명 이상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베어죽였다. 이때 미군의 박격포반은 기관총좌가 궤멸된 것으로 오판하고 효력사를 발사하기 시작했는데 히로시는 사방에서 중공군이 달려들고 아군의 박격포가 쏟아지는 이 아비규환 속에서도 엄폐하며 중공군을 도륙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잠잠해지자 진지로 돌아오던 중 매복한 중공군 병사의 기습을 받았는데, 중공군 병사는 무사히 사살했지만 중공군 병사가 쓰러지며 수류탄을 던진다. 이것을 즉각적으로 차내어서 중상을 입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래도 수류탄은 수류탄이어서 충격파에 쓰러졌는데, 하필이면 쓰러진 곳이 진지 철조망이어서 온몸에 찰과상을 입고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다.
이후 중공군 포로 수용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이동하기 전 중공군 진지에서 다른 분대 분대장과 조우했다. 이후 수용소까지 함께 걸어서 이동했다. 당시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매우좋지 않았던 중공군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당시 일본계, 중국계, 한국계 미군들은 상상 이상으로 중공군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이동거리가 450km에 달하고 포로 감시를 맡은 중공군이 조금이라도 뒤쳐진다 싶은 포로는 사살했기 때문에 열심히 걸어야 했는데, 히로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동료 분대장은 다리에 총상이 있어 걷는게 어려워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후 28개월 후에 석방되었다. 동료 분대장도 함께 살아남아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2.2. 훈장 수훈
이후 홀로 중공군의 거센 공세를 총검으로 방어하는 용맹을 보였음이 인정되어 1953년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그 외에도 유공훈장과 부상을 입은 병사에게 수여되는 퍼플 하트 훈장도 받았다.3. 기념 학교
뉴멕시코주 갤럽에 위치한 고등학교다. 2017년 졸업식에서 히로시 미야무라가 92세의 나이에도 직접 졸업 축하 연설을 했다.4. 기타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명예훈장] 4화 '히로시 "허시" 미야무라' 편에 따르면 평상시엔 매우 과묵하지만 상하 불문 할 말은 하는 성격이라 부대원들은 그를 형처럼 생각했다고 하며 명예훈장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의 경례를 받으며 수여되었다.현재는 김영옥 대령, 장진호 전투의 중국계 미국인 커트 리 (중국명은 리추웬) 해병대 중위와 더불어 동아시아계 미국인 출신 3대 전쟁영웅으로 미국 사회에서 대우받고 있다.
[1] 다른 분대의 분대장은 이를 두고 불가능한 방어라고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