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 |||
泣 | 斬 | 馬 | 謖 |
울 읍 | 벨 참 | 말 마 | 일어날 속 |
1. 개요
'울면서 마속을 베다'라는 뜻으로, \'규율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눈물을 머금고 처단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이다.삼국지에 나온다. 마속이 군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장합에게 대패하자, 제갈량이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아끼는 마속을 울면서 참수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당 이야기가 나오는 삼국지연의의 소제목이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孔明揮淚斬馬謖)'여서, '읍참마속 (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로 불리게 되었다.[1] 단, 해당 이야기를 기록한 삼국지 정사의 내용과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2. 출전
2.1. 정사
良弟謖,字幼常,以荊州從事隨先主入蜀,除緜竹成都令、越嶲太守。才器過人,好論軍計,丞相諸葛亮深加器異。先主臨薨謂亮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君其察之!」亮猶謂不然,以謖為參軍,每引見談論,自晝達夜。襄陽記曰:建興三年,亮征南中,謖送之數十里。亮曰:「雖共謀之歷年,今可更惠良規。」謖對曰:「南中恃其險遠,不服乆矣,雖今日破之,明日復反耳。今公方傾國北伐以事彊賊。彼知官勢內虛,其叛亦速。若殄盡遺類以除後患,旣非仁者之情,且又不可倉卒也。夫用兵之道,攻心為上,攻城為下,心戰為上,兵戰為下,願公服其心而已。」亮納其策,赦孟獲以服南方。故終亮之世,南方不敢復反。
建興六年,亮出軍向祁山,時有宿將魏延、吳壹等,論者皆言以為宜令為先鋒,而亮違衆拔謖,統大衆在前,與魏將張郃戰于街亭,為郃所破,士卒離散。亮進無所據,退軍還漢中。謖下獄物故,亮為之流涕。良死時年三十六,謖年三十九。襄陽記曰:謖臨終與亮書曰:「明公視謖猶子,謖視明公猶父,願深惟殛鯀興禹之義,使平生之交不虧於此,謖雖死無恨於黃壤也。」于時十萬之衆為之垂涕。亮自臨祭,待其遺孤若平生。蔣琬後詣漢中,謂亮曰:「昔楚殺得臣,然後文公喜可知也。天下未定而戮智計之士,豈不惜乎!」亮流涕曰:「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是以楊干亂法,魏絳戮其僕。四海分裂,兵交方始,若復廢法,何用討賊邪!」習鑿齒曰:諸葛亮之不能兼上國也,豈不宜哉!夫晉人規林甫之後濟,故廢法而收功;楚成闇得臣之益己,故殺之以重敗。今蜀僻陋一方,才少上國,而殺其俊傑,退收駑下之用,明法勝才,不師三敗之道,將以成業,不亦難乎!且先主誡謖之不可大用,豈不謂其非才也?亮受誡而不獲奉承,明謖之難廢也。為天下宰匠,欲大收物之力,而不量才節任,隨器付業;知之大過,則違明主之誡,裁之失中,即殺有益之人,難乎其可與言智者也。
마량의 동생 마속(馬謖)은 자(字)가 유상(幼常)이다. 형주에서 좇아 섬김으로써 유비를 따라 촉(蜀)에 들어왔고, 면죽(緜竹) · 성도령(成都令)과 월수태수에 임명되었다. 재주와 기량이 남을 뛰어넘었고, 군사 계획을 논하는 것을 좋아해서, 승상 제갈량은 더더욱 달리 소중하게 여겼다. 유비가 죽음에 임해서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되오. 그대는 그걸 살피시오!"라고 했다. 제갈량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고 매번 불러서 낮부터 밤까지 담론을 나누었다. 《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건흥 3년(서기 225년), 제갈량은 남중(南中)[2]을 정벌하였는데, 마속(馬謖)은 수십 리를 배웅하였다. 제갈량이 말했다. "비록 함께 상의한지가 몇년이 지났지만 오늘도 좋은 방법을 다시 베풀어 보시오." 마속이 대답했다. "남중은 험하고 먼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비록 오늘 격파하여도 내일 다시 배반할 뿐입니다. 이제 공께서 장차 나라를 기울여 북벌하여 굳센 도적을 다스리려 하시는데, 저들은 관부(官府)의 힘이 안에서 빌 것을 알아서 그 반역 또한 빠릅니다. 만약 남은 무리를 다 죽여서 후환을 없앤다면 이미 어진 자의 뜻이 아니고,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무릇 군대를 쓰는 도리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심리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니, 원컨대 공께서는 그 마음을 복종시켜야할 뿐입니다." 제갈량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의 죄를 사면함으로써 남방을 복종시켰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시대에 남방은 감히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건흥 6년(228년), 제갈량은 기산(祁山)을 향해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때 나이 많은 장수로 위연과 오일 등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마땅히 선봉으로 명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사람들을 거스르고 마속을 뽑아 대군을 거느리고 앞에 있게 했다. (마속은) 위나라 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싸워 장합에게 격파당했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에 거점을 잃어, 군대를 한중으로 돌려 퇴각했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 마량이 죽을 때의 나이는 36세였고, 마속은 39세였다. 《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마속이 죽기 전 제갈량에게 준 글에서 "승상께선 저를 아들처럼 대하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했습니다. 원컨대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니, 당시 십만의 군중들이 눈물을 흘렸다. 제갈량은 스스로 제사에 임했고, 유족을 평생 홀로 모셨다. 장완(蔣琬)이 후에 한중에 와서 제갈량에게 말했다. "옛날에 초나라가 성득신(成得臣)을 죽인 뒤에야, 진문공이 기뻐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계책을 세우는 선비를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손자가 이른바 천하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운용하는 데 밝았기 때문이오. 이 때문에 양간이 법을 어지럽히자 위강이 그의 노복을 죽였소.[3] 온 세상이 분열되고 군대의 교전이 막 시작되었는데, 만약 다시 법을 폐한다면, 무얼 써서 적을 토벌하겠소?" 습착치(習鑿齒)[4]는 말한다. 제갈량이 나라에 올림(上國)[5]을 겸할 수는 없으니 어찌 마땅하지 않으리오! 무릇 진나라 사람은 순림보(荀林父)가 강을 건넌 일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법을 폐하고도 공을 거두었고, 초성왕은 성득신이 자신을 이롭게 함을 덮었기 때문에 그를 죽임으로써 거듭 패하게 되었다. 지금 촉나라는 구석의 거친 땅으로 재능이 나라에 올려지는 것이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니 은퇴한 둔한 말을 사용하는 셈이고, 밝은 법을 재능보다 앞세우는 것은 세 번 패할 수 있다는 군대의 도리가 아니니, 장차 일을 달성함에 있어서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또 유비가 마속을 경계하며 크게 사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그 재능이 아님을 일컫지 않는가? 제갈량은 경계를 받고도 뜻을 이어 받지 못했으니, 명백히 마속을 내쫓기 어려웠던 것이다. 천하의 재상이 되어 사물의 힘을 크게 거두길 바래서 재능을 헤아려 절도 있게 맡기지 못하고 소중함에 따라 일을 맡겼으니, 크게 잘못된 것을 안다면 유비의 경계를 어기는 것이고 절제를 못한 것이니, 곧 유익한 사람을 죽임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국지 三國志》〈촉서구 蜀書九ㆍ마량전 馬良傳〉
정사 삼국지에서는 단지 "마속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謖下獄物故,[6] 亮為之流涕[7])"라고만 하고, 더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정사 삼국지가 지어진지 약 2백 년 후 송나라 때의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송 황제의 명을 받아 서기 429년에 정사 삼국지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배송지주(裵松之註)이다. 이 배송지주는 습착치의 《양양기 襄陽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제갈량이 울었던 구체적인 이유가 나온다.建興六年,亮出軍向祁山,時有宿將魏延、吳壹等,論者皆言以為宜令為先鋒,而亮違衆拔謖,統大衆在前,與魏將張郃戰于街亭,為郃所破,士卒離散。亮進無所據,退軍還漢中。謖下獄物故,亮為之流涕。良死時年三十六,謖年三十九。襄陽記曰:謖臨終與亮書曰:「明公視謖猶子,謖視明公猶父,願深惟殛鯀興禹之義,使平生之交不虧於此,謖雖死無恨於黃壤也。」于時十萬之衆為之垂涕。亮自臨祭,待其遺孤若平生。蔣琬後詣漢中,謂亮曰:「昔楚殺得臣,然後文公喜可知也。天下未定而戮智計之士,豈不惜乎!」亮流涕曰:「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是以楊干亂法,魏絳戮其僕。四海分裂,兵交方始,若復廢法,何用討賊邪!」習鑿齒曰:諸葛亮之不能兼上國也,豈不宜哉!夫晉人規林甫之後濟,故廢法而收功;楚成闇得臣之益己,故殺之以重敗。今蜀僻陋一方,才少上國,而殺其俊傑,退收駑下之用,明法勝才,不師三敗之道,將以成業,不亦難乎!且先主誡謖之不可大用,豈不謂其非才也?亮受誡而不獲奉承,明謖之難廢也。為天下宰匠,欲大收物之力,而不量才節任,隨器付業;知之大過,則違明主之誡,裁之失中,即殺有益之人,難乎其可與言智者也。
마량의 동생 마속(馬謖)은 자(字)가 유상(幼常)이다. 형주에서 좇아 섬김으로써 유비를 따라 촉(蜀)에 들어왔고, 면죽(緜竹) · 성도령(成都令)과 월수태수에 임명되었다. 재주와 기량이 남을 뛰어넘었고, 군사 계획을 논하는 것을 좋아해서, 승상 제갈량은 더더욱 달리 소중하게 여겼다. 유비가 죽음에 임해서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되오. 그대는 그걸 살피시오!"라고 했다. 제갈량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고 매번 불러서 낮부터 밤까지 담론을 나누었다. 《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건흥 3년(서기 225년), 제갈량은 남중(南中)[2]을 정벌하였는데, 마속(馬謖)은 수십 리를 배웅하였다. 제갈량이 말했다. "비록 함께 상의한지가 몇년이 지났지만 오늘도 좋은 방법을 다시 베풀어 보시오." 마속이 대답했다. "남중은 험하고 먼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비록 오늘 격파하여도 내일 다시 배반할 뿐입니다. 이제 공께서 장차 나라를 기울여 북벌하여 굳센 도적을 다스리려 하시는데, 저들은 관부(官府)의 힘이 안에서 빌 것을 알아서 그 반역 또한 빠릅니다. 만약 남은 무리를 다 죽여서 후환을 없앤다면 이미 어진 자의 뜻이 아니고,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무릇 군대를 쓰는 도리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심리전을 하는 것이 상책이고, 군대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니, 원컨대 공께서는 그 마음을 복종시켜야할 뿐입니다." 제갈량은 그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의 죄를 사면함으로써 남방을 복종시켰다. 그러므로 제갈량의 시대에 남방은 감히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건흥 6년(228년), 제갈량은 기산(祁山)을 향해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때 나이 많은 장수로 위연과 오일 등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마땅히 선봉으로 명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사람들을 거스르고 마속을 뽑아 대군을 거느리고 앞에 있게 했다. (마속은) 위나라 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싸워 장합에게 격파당했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에 거점을 잃어, 군대를 한중으로 돌려 퇴각했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 마량이 죽을 때의 나이는 36세였고, 마속은 39세였다. 《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마속이 죽기 전 제갈량에게 준 글에서 "승상께선 저를 아들처럼 대하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했습니다. 원컨대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니, 당시 십만의 군중들이 눈물을 흘렸다. 제갈량은 스스로 제사에 임했고, 유족을 평생 홀로 모셨다. 장완(蔣琬)이 후에 한중에 와서 제갈량에게 말했다. "옛날에 초나라가 성득신(成得臣)을 죽인 뒤에야, 진문공이 기뻐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계책을 세우는 선비를 죽이는 것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손자가 이른바 천하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운용하는 데 밝았기 때문이오. 이 때문에 양간이 법을 어지럽히자 위강이 그의 노복을 죽였소.[3] 온 세상이 분열되고 군대의 교전이 막 시작되었는데, 만약 다시 법을 폐한다면, 무얼 써서 적을 토벌하겠소?" 습착치(習鑿齒)[4]는 말한다. 제갈량이 나라에 올림(上國)[5]을 겸할 수는 없으니 어찌 마땅하지 않으리오! 무릇 진나라 사람은 순림보(荀林父)가 강을 건넌 일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법을 폐하고도 공을 거두었고, 초성왕은 성득신이 자신을 이롭게 함을 덮었기 때문에 그를 죽임으로써 거듭 패하게 되었다. 지금 촉나라는 구석의 거친 땅으로 재능이 나라에 올려지는 것이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니 은퇴한 둔한 말을 사용하는 셈이고, 밝은 법을 재능보다 앞세우는 것은 세 번 패할 수 있다는 군대의 도리가 아니니, 장차 일을 달성함에 있어서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또 유비가 마속을 경계하며 크게 사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그 재능이 아님을 일컫지 않는가? 제갈량은 경계를 받고도 뜻을 이어 받지 못했으니, 명백히 마속을 내쫓기 어려웠던 것이다. 천하의 재상이 되어 사물의 힘을 크게 거두길 바래서 재능을 헤아려 절도 있게 맡기지 못하고 소중함에 따라 일을 맡겼으니, 크게 잘못된 것을 안다면 유비의 경계를 어기는 것이고 절제를 못한 것이니, 곧 유익한 사람을 죽임에 있어서 지혜로운 자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국지 三國志》〈촉서구 蜀書九ㆍ마량전 馬良傳〉
《양양기 襄陽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합에게 대패하고 감옥에 간 마속이 제갈량에게 글을 써서 "승상은 저를 아들로 대하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로 대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우 임금의 고사를 들어 자식을 부탁했고, 이에 제갈량은 마속이 죽은 뒤 유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한중에 와서 마속이 죽은 것을 알게 된 장완이 제갈량에게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선비를 죽이는 것이 애석합니다."라고 말하자,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손자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운용하는 데 밝았기 때문이오. 온 세상이 분열되고 군대의 교전이 막 시작되었는데, 만약 다시 법을 폐한다면, 무얼 써서 적을 토벌하겠소?" 이 내용을《양양기》에 실은 습착치는 제갈량이 대략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며 비판하는데, '첫째, 촉나라는 인재가 별로 없어서 실수를 저질러도 3번의 기회를 줘야 하는데 죽였다. 둘째, 유비가 크게 사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제갈량이 그를 너무 아껴서 크게 사용하였다.' 즉, 제갈량은 마속을 크게 사용하지 말라는 유비의 당부를 어긴 셈이 되므로 이 실책을 덮기 위해 훗날 촉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마속을 죽일 수밖에 없었으므로,[8] 근본적인 잘못은 제갈량에게 있다는 것이 습착치의 지적이다.
2.2. 삼국연의
忽報馬謖、王平、魏延、高翔至,孔明先喚王平入帳責之曰:「吾令汝與馬謖同守街亭,汝何不諫之,致使失事?」平曰:「某再三相勸,要在當道築土城把守。參軍大怒不從,某因此自引五千兵離山十里下寨。魏兵驟至,把山四面圍合,某引兵衝殺十餘次,皆不能入。次日土崩瓦解,降者無數。某孤軍難立,故投魏文長求救。半途又被魏兵困在山谷之中,某奮死殺出。比及歸寨,已被魏兵占了。及投列柳城時,路逢高翔,遂分兵三路去劫魏寨,指望克復街亭。因見街亭並無伏路軍,以此心疑。登高望之,只見魏延、高翔被魏兵圍住,某即殺入重圍,救出二將,就同參軍併在一處。某恐失卻陽平關,因此急來回守。非某之不諫也。丞相不信,可問各部將校。」
孔明喝退,又喚馬謖入帳,謖自縛跪於帳前。孔明變色曰:「汝自幼飽讀兵書,熟諳戰法。吾累次叮嚀告戒街亭是吾根本,汝以全家之命,領此重任。汝若早聽王平之言,豈有此禍?今敗軍折將,失地陷城,皆汝之過也!若不明正軍律,何以服眾?汝今犯法,休得怨吾。汝死之後,汝之家小,吾按月給與祿米,汝不必挂心。」叱左右推出斬之。謖泣曰:「丞相視某如子,某以丞相為父。某之死罪,實已難逃,願丞相思舜帝殛鯀用禹之義,某雖死亦無恨於九泉!」言訖大哭。孔明揮淚曰:「吾與汝義同兄弟,汝之子即吾之子也,不必多囑。」
左右推出馬謖於轅門之外,將斬。參軍蔣琬自成都至,見武士欲斬馬謖,大驚,高叫留人,入見孔明曰:「昔楚殺得臣而文公喜。今天下未定,而戮智謀之士,豈不可惜乎?」孔明流涕而答曰:「昔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今四方分爭,兵交方始,若須廢法,何以討賊耶?合當斬之。」
須臾,武士獻馬謖首級於階下。孔明大哭不已。蔣琬問曰:「今幼常得罪,既正軍法,丞相何故哭耶?」孔明曰:「吾非為馬謖哭。吾思先帝在白帝城臨危之時曾囑吾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今果應此言,乃深恨己之不明,追思先帝之明,因此痛哭耳!」大小將士,無不流涕。馬謖亡年三十九歲。
갑자기 마속, 왕평, 위연, 고상이 왔다고 알리니, 공명이 먼저 왕평을 천막 안으로 불러들여 꾸짖으며 말했다. "내 그대에게 마속과 더불어 가정(街亭)을 지키라 하였거늘, 어찌 제대로 간언하지 않아 일을 그르치기에 이르렀소?" 왕평이 말했다. "제가 거듭 길목에 토성을 쌓고 지켜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참군이 크게 화를 내며 따르지 않기에, 이로 인해 저 스스로 5천 병력을 이끌고 산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목책을 세웠습니다. 위나라 병사들이 몰려와, 산을 사방으로 포위하므로, 제가 병력을 이끌고 십여 차례 나 돌격하였으나, 번번이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마치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이 무너져, 항복한 이들이 무수하였습니다. 저의 군대는 고립되어 버티기 어려운지라, 위문장(위연)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갔습니다. 도중에 산골짜기 안에서 위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제가 죽을힘을 다해 뚫고 나왔습니다. 이윽고 목책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위나라 병사들이 점령한 뒤였습니다. 다시 열류성으로 가고 있을 때, 도중에 고상을 만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위나라 목책을 습격하러 가면서, 가정을 되찾고자 희망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가는 길에 적의 복로군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이 때문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위연과 고상이 위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제가 즉시 두터운 포위를 뚫고, 두 장수를 구출한 뒤, 곧 참군과 함께 군대를 한 데 합쳤습니다. 저는 양평관마저 빼앗길까 두려워서, 서둘러 돌아와 수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간언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승상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각부 장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공명이 물러나라고 외치고는, 또 마속을 천막에 불러들이니, 마속이 스스로 몸을 결박한 채 천막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공명이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충분히 읽고 전법을 외우는 것에 익숙하오. 내가 누차에 걸쳐 신신 당부하기를 가정(街亭)은 우리의 근본이라고 간곡히 경고를 하였고, 그대도 온 집안의 목숨을 걸고 이러한 중임을 맡았소. 그대가 일찍이 왕평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재앙이 있었겠소? 이제 패전하여 장수를 꺽고 땅을 잃어 성이 함락된 것은, 모두 그대의 잘못이오! 만약 군율을 분명하고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들을 복종시키겠소? 그대가 이제 법을 어긴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그대가 죽은 뒤, 그대의 가족에게는 내가 월급을 살펴 녹미를 줄 것이니, 그대는 마음에 걸릴 필요가 없소." 좌우의 사람들에게 소리쳐 마속을 끌어내어 베라고 하자, 마속이 울면서 말했다. "승상께서 저를 아들처럼 보시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저의 죽을 죄는 실로 이미 피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승상께서 순 임금이 곤(鯀)을 죽이고 우 임금을 썼던 뜻[9]을 생각하신다면, 저는 비록 죽더라도 구천에서 한이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나와 그대는 그 뜻이 형제와 같소. 그대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이니, 많은 걸 부탁할 필요는 없소."
좌우의 사람들이 마속을 군영 밖으로 끌고나가 베려고 하였다. 참군 장완이 성도에서 오다가, 무사가 마속을 베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을 제지한 뒤에, 들어와 공명을 보고 말했다. "지난날 초나라가 장군 득신을 죽이자 진나라 문공이 기뻐했습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모 있는 선비를 죽인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공명이 눈물을 떨구며 답했다. "지난날 손자가 이른바 천하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분명하게 시행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방이 나누어져서 다투고, 병사들의 교전은 막 시작하는데, 잠깐 법을 폐한다면 무엇으로 도적을 토벌하겠소? 베는 것이 합당하오."
잠시 뒤 무사가 마속의 수급을 섬돌 아래 갖다 바치니, 공명이 크게 소리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장완이 물었다. "이제 유상(마속)이 죄를 지어, 이미 군법대로 엄정히 다스렸거늘,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소리내어 우십니까?" 공명이 말했다. "나는 마속을 위해 운 것이 아니오. 나는 선제께서 백제성에서 위기에 처하셨을 때 일찍이 내게 당부하시며,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과하니, 크게 써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을 생각하였소. 이제 과연 그 말씀대로 됐으니, 이에 나의 현명하지 못함을 심히 뉘우치며 선제의 현명하심을 떠올린 것이오. 이로 인해 통곡할 뿐이니!" 지위가 높고 낮은 장수와 병사들이,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속은 39세에 죽었다.
《삼국연의 三國演義》〈96.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孔明揮淚斬馬謖〉
제96회에서 다루며, 전개는 대체로 정사와 비슷하다. 몇몇 차이점을 들자면,孔明喝退,又喚馬謖入帳,謖自縛跪於帳前。孔明變色曰:「汝自幼飽讀兵書,熟諳戰法。吾累次叮嚀告戒街亭是吾根本,汝以全家之命,領此重任。汝若早聽王平之言,豈有此禍?今敗軍折將,失地陷城,皆汝之過也!若不明正軍律,何以服眾?汝今犯法,休得怨吾。汝死之後,汝之家小,吾按月給與祿米,汝不必挂心。」叱左右推出斬之。謖泣曰:「丞相視某如子,某以丞相為父。某之死罪,實已難逃,願丞相思舜帝殛鯀用禹之義,某雖死亦無恨於九泉!」言訖大哭。孔明揮淚曰:「吾與汝義同兄弟,汝之子即吾之子也,不必多囑。」
左右推出馬謖於轅門之外,將斬。參軍蔣琬自成都至,見武士欲斬馬謖,大驚,高叫留人,入見孔明曰:「昔楚殺得臣而文公喜。今天下未定,而戮智謀之士,豈不可惜乎?」孔明流涕而答曰:「昔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今四方分爭,兵交方始,若須廢法,何以討賊耶?合當斬之。」
須臾,武士獻馬謖首級於階下。孔明大哭不已。蔣琬問曰:「今幼常得罪,既正軍法,丞相何故哭耶?」孔明曰:「吾非為馬謖哭。吾思先帝在白帝城臨危之時曾囑吾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今果應此言,乃深恨己之不明,追思先帝之明,因此痛哭耳!」大小將士,無不流涕。馬謖亡年三十九歲。
갑자기 마속, 왕평, 위연, 고상이 왔다고 알리니, 공명이 먼저 왕평을 천막 안으로 불러들여 꾸짖으며 말했다. "내 그대에게 마속과 더불어 가정(街亭)을 지키라 하였거늘, 어찌 제대로 간언하지 않아 일을 그르치기에 이르렀소?" 왕평이 말했다. "제가 거듭 길목에 토성을 쌓고 지켜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참군이 크게 화를 내며 따르지 않기에, 이로 인해 저 스스로 5천 병력을 이끌고 산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목책을 세웠습니다. 위나라 병사들이 몰려와, 산을 사방으로 포위하므로, 제가 병력을 이끌고 십여 차례 나 돌격하였으나, 번번이 진입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마치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이 무너져, 항복한 이들이 무수하였습니다. 저의 군대는 고립되어 버티기 어려운지라, 위문장(위연)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갔습니다. 도중에 산골짜기 안에서 위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제가 죽을힘을 다해 뚫고 나왔습니다. 이윽고 목책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위나라 병사들이 점령한 뒤였습니다. 다시 열류성으로 가고 있을 때, 도중에 고상을 만나,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위나라 목책을 습격하러 가면서, 가정을 되찾고자 희망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가는 길에 적의 복로군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이 때문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위연과 고상이 위나라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어서, 제가 즉시 두터운 포위를 뚫고, 두 장수를 구출한 뒤, 곧 참군과 함께 군대를 한 데 합쳤습니다. 저는 양평관마저 빼앗길까 두려워서, 서둘러 돌아와 수비하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간언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승상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각부 장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공명이 물러나라고 외치고는, 또 마속을 천막에 불러들이니, 마속이 스스로 몸을 결박한 채 천막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공명이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충분히 읽고 전법을 외우는 것에 익숙하오. 내가 누차에 걸쳐 신신 당부하기를 가정(街亭)은 우리의 근본이라고 간곡히 경고를 하였고, 그대도 온 집안의 목숨을 걸고 이러한 중임을 맡았소. 그대가 일찍이 왕평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재앙이 있었겠소? 이제 패전하여 장수를 꺽고 땅을 잃어 성이 함락된 것은, 모두 그대의 잘못이오! 만약 군율을 분명하고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들을 복종시키겠소? 그대가 이제 법을 어긴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그대가 죽은 뒤, 그대의 가족에게는 내가 월급을 살펴 녹미를 줄 것이니, 그대는 마음에 걸릴 필요가 없소." 좌우의 사람들에게 소리쳐 마속을 끌어내어 베라고 하자, 마속이 울면서 말했다. "승상께서 저를 아들처럼 보시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저의 죽을 죄는 실로 이미 피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승상께서 순 임금이 곤(鯀)을 죽이고 우 임금을 썼던 뜻[9]을 생각하신다면, 저는 비록 죽더라도 구천에서 한이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말했다. "나와 그대는 그 뜻이 형제와 같소. 그대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이니, 많은 걸 부탁할 필요는 없소."
좌우의 사람들이 마속을 군영 밖으로 끌고나가 베려고 하였다. 참군 장완이 성도에서 오다가, 무사가 마속을 베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큰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을 제지한 뒤에, 들어와 공명을 보고 말했다. "지난날 초나라가 장군 득신을 죽이자 진나라 문공이 기뻐했습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모 있는 선비를 죽인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공명이 눈물을 떨구며 답했다. "지난날 손자가 이른바 천하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법을 분명하게 시행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방이 나누어져서 다투고, 병사들의 교전은 막 시작하는데, 잠깐 법을 폐한다면 무엇으로 도적을 토벌하겠소? 베는 것이 합당하오."
잠시 뒤 무사가 마속의 수급을 섬돌 아래 갖다 바치니, 공명이 크게 소리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장완이 물었다. "이제 유상(마속)이 죄를 지어, 이미 군법대로 엄정히 다스렸거늘,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소리내어 우십니까?" 공명이 말했다. "나는 마속을 위해 운 것이 아니오. 나는 선제께서 백제성에서 위기에 처하셨을 때 일찍이 내게 당부하시며,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과하니, 크게 써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을 생각하였소. 이제 과연 그 말씀대로 됐으니, 이에 나의 현명하지 못함을 심히 뉘우치며 선제의 현명하심을 떠올린 것이오. 이로 인해 통곡할 뿐이니!" 지위가 높고 낮은 장수와 병사들이,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속은 39세에 죽었다.
《삼국연의 三國演義》〈96. 공명이 눈물을 뿌리며 마속을 베다 孔明揮淚斬馬謖〉
- 연의에서는 가정에서 패배한 마속이 순순히 군영으로 와서 죄를 달게 받는다.[10] 하지만 정사에서는 〈상랑전〉에 마속이 도망쳤다는 기록[11]이 있어서 체포인지 자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순순히 잡히지 않은 건 확실하다.
-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다른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마속을 직접 취조한 후 참수형을 명한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주살되었다(왕평전)[12]거나 옥에 갇혀서 죽었다(마량전)[13]는 등 기록이 갈린다.
- 연의에서는 참수형이 결정되자 마속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죄는 인정하지만 가족을 부탁한다고 직접 제갈량에게 말한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마속이 옥중에서 편지[14]를 보냈으므로 직접 대면했을 가능성은 낮다.
- 연의에서는 마속이 죽은 후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주위 사람들에게 유비의 충고를 뒤늦게 언급하면서 자신은 마속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책을 탓하기에 우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유비의 충고와 제갈량의 눈물을 직접적으로 관련짓지는 않으며, 단지 마속이 죽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렸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 연의에서는 마속이 죽기 전 이를 본 장완이 만류하지만 제갈량이 군법을 준수하기 위해 마속을 참수한다. 정사에서는 마속이 죽은 뒤에야 장완이 한중에 와서 제갈량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고 제갈량은 군법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사의 다른 편 주석에서 이막도 마속을 죽이지 말라고 했다며 추가로 언급된다.[15]
3.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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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여담
[1] 마찬가지 이유로 해당 소제목을 그대로 옮겨서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이라고 하며, 다른 표현으로 '휘루참지(揮淚斬之)'라고도 한다.[2] 남중은 오늘날 운남 지역을 가리킨다.[3] 춘추시대 진나라 제후 도공에게는 충성스러운 신하 사마위강이 있었다. 하루는 도공의 동생 양간이 군법을 어기자 위강은 차마 양간을 처벌하지 못하고, 대신 군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의 노복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양간은 형 도공에게 모함하여 위강이 도리어 체포되었으나, 양설의 변호로 위강이 그런 일을 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도강은 그 뒤 위강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4] 《양양기 襄陽記》를 지은 사람이다.[5] 나라에 인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6] 여기서 '물고(物故)'라고 나오는데, 물고(物故)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죽음. 또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죽임.'을 뜻한다.[7] 亮為之流涕는 "제갈량이 하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로 번역되고, 이를 다듬어서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로 번역한다.[8] 마속이 먼저 제갈량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것 자체가, 제갈량이 유비의 당부를 어겼다는 사람들의 지적을 무마시키기 위한 마속의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 아무튼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훗날 정사에 실릴 정도로 유비의 당부가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에도 이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이 있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9] 곤(鯀)은 우 임금의 아버지로 홍수를 다스리다가 실패하고 순 임금에게 죽임을 당했다.(또는 귀양보내졌다.) 이후 순 임금은 우 임금에게 홍수를 맡겼다. 즉, 마속 자신은 죄를 지어 죽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중책을 맡겨 달라는 얘기이다.[10] 연의에는 패배한 마속이 어떻게 왕평과 합류했는지 그 자세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마속은 갑자기 제갈량의 군영에 왕평 등과 함께 등장하는데 마치 마속이 순순히 제 발로 찾아온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11] 삼국지 촉지 상랑전에 나온다. 五年,隨亮漢中。朗素與馬謖善,謖逃亡,朗知情不舉,亮恨之,免官還成都。(5년에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갔다. 상랑은 본디 마속과 사이가 좋아서, 마속이 도망갔을 때 상랑은 사정을 알고도 들추어내지 않았다. 제갈량이 그걸 원망해서 관직에서 면직시키고 성도(成都)로 돌려보냈다.)[12] 삼국지 촉지 왕평전. 建興六年,屬參軍馬謖先鋒。謖舍水上山,舉措煩擾,平連規諫謖,謖不能用,大敗於街亭。衆盡星散,惟平所領千人,鳴鼓自持,魏將張郃疑其伏兵,不往偪也。於是平徐徐收合諸營遺迸,率將士而還。丞相亮旣誅馬謖及將軍張休、李盛,奪將軍黃襲等兵,平特見崇顯,加拜參軍,統五部兼當營事,進位討寇將軍,封亭侯。(건흥 6년, 참군 마속의 선봉에 속했다.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번거롭게 조치했다. 왕평은 마속에게 잇따라 법도를 간하였으나 마속은 능히 쓰지 아니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했다. 사람들이 죽고 별이 흩어졌는데 오직 왕평만이 천 명을 거느린 바, 북을 울리면서 스스로 버티니 위나라 장군 장합이 그 복병을 의심하여 접근전을 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왕평은 남고 흩어진 모든 군영을 서서히 합치고 거둬서 장수와 병졸들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승상 제갈량은 이미 마속과 장군 장휴 · 이성을 주살(誅: 벨 주)했고, 장군 황습 등의 병사를 빼앗었으나, 왕평은 특별히 높혀 드러내어 보였으니 참군(參軍)으로 벼슬을 높혀 오부를 거느리고 겸하여 군영의 일을 맡게 했고, 직위를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올리고 정후(亭侯)에 봉하였다.)[13] 삼국지 촉지 마량전. 建興六年,亮出軍向祁山,時有宿將魏延、吳壹等,論者皆言以為宜令為先鋒,而亮違衆拔謖,統大衆在前,與魏將張郃戰于街亭,為郃所破,士卒離散。亮進無所據,退軍還漢中。謖下獄物故,亮為之流涕。(건흥 6년(228년), 제갈량은 기산(祁山)을 향해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때 나이 많은 장수로 위연과 오일 등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들을 마땅히 선봉으로 명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사람들을 거스르고 마속을 뽑아 대군을 거느리고 앞에 있게 했다. (마속은) 위나라 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싸워 장합에게 격파당했고,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에 거점을 잃어, 군대를 한중으로 돌려 퇴각했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임을 당했다(物故: 감옥에서 죄인에게 계속 고문을 가하는데 이때문에 감옥에서 죽는 것을 말함). 제갈량은 눈물을 흘렸다. 마량이 죽을 때의 나이는 36세였고, 마속은 39세였다.)[14] 삼국지 촉지 마량전의 주석에 나온다. 襄陽記曰:謖臨終與亮書曰:「明公視謖猶子,謖視明公猶父,願深惟殛鯀興禹之義,使平生之交不虧於此,謖雖死無恨於黃壤也。」于時十萬之衆為之垂涕。(《양양기 襄陽記》에서 말하길, 마속이 죽기 전 제갈량에게 준 글에서 "승상께선 저를 아들처럼 대하셨고, 저는 승상을 아버지처럼 대했습니다. 원컨대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흥하게 한 뜻을 깊이 생각하시어 평생의 사귐이 이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시면,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니, 당시 십만의 군중들이 눈물을 흘렸다.)[15] 삼국지 촉지 양희전에 주석으로 나온다. 建興六年,亮西征。馬謖在前敗績,亮將殺之,邈諫以「秦赦孟明,用霸西戎,楚誅子玉,二世不競」,失亮意,還蜀。(건흥6년, 제갈량이 서방을 정벌하였다. 마속이 앞에 있어 사업을 패했다. 제갈량이 죽이려고 하자, 이막이 "진나라는 맹명(孟明)을 용서하여 서융(西戎)의 우두머리로 썼고, 초나라는 자옥(子玉)을 주살하여 두 번 다시 천하를 다투지 못했습니다."라고 간해서, 제갈량의 뜻을 잃고는 촉으로 돌아왔다.)[16]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 가능하다. 孔明泣斬馬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