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14:36:28

홍파

<colbgcolor=#0047a0> 출생 1902년
함경남도 홍원군포면 남양리
사망 1977년 9월 25일
서울특별시
이명 홍계신(洪繼信)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파는 1899년경 함경남도 홍원군 경포면 남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하며, 1917년 홍원에서 행패를 부리던 조선인 순사를 살해한 뒤 북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191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 소년모험단에 결합하여 총무를 맡았다.

소년모험단은 무기 구입과 지부 설치를 위해 단원들을 각지로 파견했는데, 홍파는 중국 상해에 파견되어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간부들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 빨치산 부대 조직 방침을 협의하고 돌아왔다. 중국 장백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군비단의 무기 거래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개하고 있던 홍파는 한인사회당과의 협의 결과에 따라 군비단의 김찬, 박춘근과 논의하여 군비단의 근거지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이만으로 옮기도록 했다.

홍파는 1921년 조선으로 파견되어 함경남도 일대에서 군비단의 국내 거점을 만들고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1921년 12월에 체포되었다.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함경남도 청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2년 8월 탈옥해 연해주로 망명한 후 임병극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에 가담했다. 1923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적기단(赤旗團)에 참여했다. 적기단 결성 대회에서 행동 강령을 보고한 홍파는 적기단 부단장에 선출되었고, 만주 각지에 설치될 3개의 사령부 중 북만(北滿)사령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27년에는 박애가 주도하는 상해청년단에 합류하여 활동했으며, 다시 만주로 가서 흥경 지방에서 덕성(德成)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였으며, 양세봉·김학규의 부대에서 소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8년 11월 14일 '남만주청년총동맹'을 조직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봉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으며,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기소유예로 출옥하였다. 1936년에 다시 북지(北支)로 건너갔으며, 1942년 8월 한국광복군의 간부가 된 김학규와 연락이 되어 화북지구의 지하조직과 초모(招募)공작에 전념하였고, 1943년에는 배경진(裵京鎭)·김광언(金光彦) 등과 화북지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일군의 기밀을 탐지하는 등 광복군 소속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8.15 광복 후 1945년 9월 9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화북대표부 주석 조강(趙剛)의 비서로 임명되어 교민을 선무하였다. 이후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7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홍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