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20:57:39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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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중공업지부 그래픽 재구성(블루).png
<colbgcolor=#211b70><colcolor=#FFF>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Hyundai Heavy Industries' Labor Union[1]
약칭 <colbgcolor=#ffffff,#191919>현중노조, 금속노조 현중지부, 현중지부
약칭 ,/ (영),HHIUN / 사이트 명칭
창립일1987년 7월 28일
<colbgcolor=#ffffff,#191919>창립 [age(1987-07-28)]년
민주노총
가입
1996년 11월 27일[2] (금속연맹 가입)
2016년 12월 22일 (민주노총 재가입)
주소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000
지부장백호선 / 25대 집행부
수석부지부장박병선 / 25대 집행부
사무국장김동엽 / 25대 집행부
부지부장박진용 / 25대 집행부
대표색[3]
흰색 (#ffffff)
옅은 파란색 (#3d71b5)
/ 사이트 로고색
연한 민트색 (#eaf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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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하늘색 (#90c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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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수[4]7,560명 ,/ (2024년 8월),
{{{#!folding [ 구성 펼치기 ] 직원 대비 조합원수
7,759명 / 12,754명
,(60.84%),
조합원 구성
HD현대중공업 6,670명(85.96%)
HD현대건설기계 435명(5.61%)
HD현대일렉트릭 654명(8.43%)
총합 7,759명(100%)
[ruby(지부대의원 구성,ruby=(34대))]
( 전체 | 여성할당 & 당연직 )
HD현대중공업 77명 | 3명
HD현대건설기계 5명 | 1명
HD현대일렉트릭 8명 | 2명
총합 90명 | 6명
지회대의원 구성
( 전체 | 여성할당 & 당연직 )
HD현대중공업 *
HD현대건설기계 10명 | 0명
HD현대일렉트릭 14명 | 1명
총합 24명 | 1명
금속대의원 구성
( 전체 | 여성할당 & 당연직 )
HD현대중공업 31명 | 3명
HD현대건설기계 2명 | 0명
HD현대일렉트릭 3명 | 1명
총합 36명 | 4명
}}} ||
노조 적립금11,251,000,000원 ,/ (2019년),
총수입3,377,961,143원 ,/ (2019년),
조합비1,130,269,653원 ,/ (2019년),
상급단체

파일:금속노조.png

노조가현중노조가
TEL/FAXTEL. 052-202-5090
FAX. 052-233-8221
홈페이지파일:금속노조 로고.png
기관지민주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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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탄생2.2. 128일 파업2.3. 골리앗 파업2.4. 1994년 파업2.5. 노동법 날치기 사건2.6. 민주노총 제명과 재가입
2.6.1. 가입에 대한 반대
3. 현중노조가4. 출신 인물5. 계파 분류6. 역대 임원 선거7. 조직도 (23대)

[clearfix]

1. 개요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HD현대 산하 지부로써 HD현대중공업 조합원을 중심으로 HD현대일렉트릭지회, HD현대건설기계지회, 사내하청지회, 일반직[5] 지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역사

2.1. 탄생

1974년 발생한 현대조선폭동사건 이후, 현대중공업에는 이렇다할 노동운동의 움직임이 없다가 1987년 6월 항쟁6.29 선언 이후, 노동자들의 권익과 처우개선을 위한 노동조합 설립 추진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퍼졌고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울산의 현대그룹 계열사 사업장들에서 먼저 노동조합 설립이 시작되었다. 현대엔진[6]에 종사하던 권용목, 사영운, 오종쇄[7] 등을 중심으로 7월 5일 현대엔진노동조합이 먼저 출범했고, 이 움직임을 먼저 파악한 사측이 7월 21일 권오성 등을 중심으로 어용노조를 설립하자 이에 반하여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투쟁하면서 김필수, 장세근, 이재식, 박우신, 김진국, 김형권, 이채석, 정병모, 이영수, 조성훈, 유성렬 등 11인을 중심으로 '현대중공업 노조개편 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어용노조 퇴진 운동을 전개했고 노동자들도 이에 호응해 결국 어용노조 집행부가 퇴진했고 1987년 7월 28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그동안 사업장 내 노동자들은 급여는 적고, 노동강도는 높아 조지나 공장이란 멸칭을 거리낌없이 내뱉었고, 출근시 각 출입문에서 헌병 헬멧과 비슷한 안전모를 착용한 경비들이 노동자들의 머리가 길다고 붙잡아 바리깡으로 머리를 강제로 자르는가 하면, 사무직 간부들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생산직 사원들에게 반말을 쓰면서 하대하는 등 고압적으로 대하거나 말귀를 못알아 먹는다고 안전화로 조인트를 깐다던지, 쥐똥이 들어간 도시락을 노동자들에게 식사랍시고 제공하는 등 지금으로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 인권유린에 가까운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노조에 가입해 조합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어느새 1만명을 훌쩍 넘어버리고, 이들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선봉에 서서 활약한다.
파일:external/www.usjournal.kr/cb8975d618bd9e6278c9f503b194efc6.jpg
공설운동장 방면으로 행진 중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8]
1987년 8월 18일 가두행진 당시
7월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시위와 농성이 계속되고 현대그룹 다른 계열사로 파업이 확산되자 사측은 8월 17일 임시 휴업을 결정했고, 빗속에서 15,000여 노동자들은 정문에 있던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회사에 들어가 집단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8월 18일 휴업 조치에 항의하고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오토바이와 포크레인, 지게차, 덤프트럭, 소방차, 카고크레인 등의 중장비를 이끌고 경찰의 진압에 대비해 안전모와 보안경, 방독마스크 등으로 무장한 채 회사 정문을 나와 당시 울산지역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소, 현대종합목재[9],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 노동자들과 합세해 남목 고개에서 경찰 저지선을 뚫고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등의 노동자들과도 연대해 약 7만 여명이 울산공설운동장까지 대규모 행진을 진행했다.#, # 이들 노동자들은 현대그룹의 다른 계열사 노동조합들과 연대해 '현대그룹 노동조합 협의회'(현노협)을 출범시키고 공동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결국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사태 다음날 노동자들의 위세에 눌려 요구 조건 대부분을 수용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노조를 끝까지 허용 않는 등의 꼼수를 부렸고, 임금 협상마저 결렬되자 9월 2일 노동자들이 다시 선박 블록 운송용 트랜스포터 위에 선체 도색용 장비인 샌딩머신을 탑재한 중장비 등을 앞세우고 이번에는 신정동 울산시청까지 진출해 시청을 점거하고 다음날 회사로 돌아가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는 등 진통 끝에 9월 19일 노사가 임금협상과 단체협약에 서명하면서 56일간의 투쟁이 마무리되면서 일단락 되었다. 이후 울산은 노동자의 도시라는 명칭을 얻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형건 노조위원장 등 많은 조합원들이 구속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해고되었으며 조합원이던 채태창씨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고, 현대엔진 조합원이던 이상남씨는 수배중이던 현대중공업 노조간부를 강제로 잡아가려뎐 현대중공업 경비대의 차량을 저지하던중 이를 밀어부친 경지대의 봉고차량에 의해 큰 부상을 입고 장기간 투병끝에 사망하는 불의의 사건이 있었다. 노조 측에서는 이들을 노조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지금도 기일이 되면 추모를 하고 있다.

2.2. 128일 파업

파일: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jpg
확성기로 사내에서 선전전을 펼치는 노조 대의원들
1988년 1월 21일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3대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된 서태수가 다음날 교통사고를 당해 위원장이 유고가 되면서, 대행을 맡은 부위원장 심재경이 임금협약에서 노조원들과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사측과 협약 체결을 해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한 가운데, 1988년 6월부터 시작된 단체협상 과정에서 상여금 지급과 수당 인상, 토요일 오전 근무 등의 근무 조건 개선과 해고자 4명의 복직을 요구를 둘러싸고 난항이 계속되었고 1988년 12월 12일 파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에 사측에서는 노조 파괴 전문가인 '제임스 리'를 통해 노조 와해 공작을 전개해 1989년 1월 8일 현대중전기 노조 총회가 열렸던 석남산장에 괴한들이 난입해 현대중전기 노조원들을 집단 폭행하고, 울산 전하동 소재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현해협) 사무실에도 역시 괴한들이 난입해 해고자 등 23명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인 제임스 리 테러사건발생한다. 이에 맞서 1989년 1월 28일 현대중공업·현대엔진 노동자 및 시민 등 5천 여명은 28일 오후 2시에 현대중공업 체육관에서 `현대그룹 1·8 테러만행 규탄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집회를 마치고 오후 3시30분께 중공업 정문을 빠져나와 일산해수욕장까지 4km 가량 행진을 벌인 뒤 공권력·정주영씨 등 현대그룹 고위층·어용노조에 대한 화형식을 갖고 자진 해산했다.# 하지만 1989년 2월 21일 현대중공업 사내에서 선전활동을 하던 노조원들에게 총무부 직원들과 구사대가 식칼과 쇠파이프 등 흉기를 휘두른 식칼 테러사건 등이 발생해 2명이 중태에 빠지고 수십 명이 중경상을 입자 파업에 기름을 부었고 이런 탄압에 맞서 결국 노조는 1989년 4월 18일까지 무려 128일에 걸친 파업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친 사측 노조 집행부를 대체하기 위해 숙소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쟁의 행위 찬반 투표에서 전체 조합원 1만 8693명 중 1만 3425명(71%)이 파업에 찬성하며 본격적인 파업을 돌입하였다. 집행부 위원장(친 사측)이던 서태수도 결국 파업을 선언하였다. 서태수는 3일 만에 사측 안이였던 생산장려금 12만 원, 수당 1만 원 인상을 찬반 투표에 붙이려 하였지만 조합원들은 투표 진행을 거부해버렸다. 이후 서태수가 현대중공업 근처 전하동 산수장여관에 사무실을 차리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울산경찰서, 친 사측 대의원 등과 함께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12월 20일 ‘이원건 권한대행 체제 인정 및 쟁의 계속 여부’ 투표에서 조합원 1만 716명의 찬성표로 이원건 파업주도 세력(이하 이원건 집행부)의 출범과 동시에 친 사측 서태수 집행부와 대립하는 구도를 가지게 된다.
파일: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2.jpg
소조립 공장 안에서 선전전을 펼치는 조합원들
파업 97일째 되는 날인 3월 17일, 파업 지도부 측이 서태수 현 노조 집행부 불신임과 이원건 비상 대책 위원장의 소집권자 지명 요구 임시 총회 개최 요구서를 울산시에 접수시키자, 회사측은 경찰에 공권력 투입 요청을 하였고 치안본부에서는 18일 황일규 경남도경 경비과장을 울산에 급파하고 전투경찰 80개 중대 규모의 경력 증원을 하기로 했다. 이에 파업 지도부는 회사 정문과 시계탑 사거리, 노조 사무실 앞 2백여개의 텐트촌 입구에 사다리·철제 바리케이드 등으로 3중 바리케이드를 치고 40㎏들이 프로판가스 6개와 20ℓ짜리 신나 30 여개, 투척용 볼트와 너트 및 사제박격포를 제작해 이를 노조 사무실과 텐트촌 주변에 비치하고 안전모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정당방위대를 조직해 경찰에 맞섰다. 이에 사측은 이들의 파업은 근무지 이탈에 따른 병역법 위반[10] 이라 주장하며 직장 즉시 복귀를 요구하였다.

3월 21일에는 두 집행부[11]는 노동부의 중재로 노조 정상화 협상에 들어갔지만 입장의 차이[12]로 결렬되어 버렸고, 서태수 집행부는 운영 위원회를 소집해 이원건과 등 이원건 집행부의 34명 노조원의 자격을 박탈하고 이들에 대해 3개월 간의 조합원 권리 처분을 내리는 등 모두 98명을 징계, 처분했다.[13]

노태우 정부의 지시로 1989년 3월 30일 1만 5천 명의 경찰 경력이 육·해·공 3면 입체작전을 통해서 현대중공업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14]하게 되자, 4월 1일 서태수는 이에 단체협약 교섭과정에서 노조원끼리 분열하고 공권력 개입이라는 파국을 초래한 데 대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연행 노동자 전원 석방과 노사화합을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다이아몬드 호텔에서 자진 사퇴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대책위까지 만들어가며 전하동 오좌불 숙소, 만세대 아파트, 일산동 중전기문[15] 등지에서 화염병을 투척해 전하2파출소와 중전기문 경비실을 공격하고 투석전을 전개해 경찰과 맞서는 등 4월 16일까지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결국 노조는 임시대의원회의를 거쳐 새 집행부를 결성한 뒤, 사측과 단체협약 협상에 나섰고 7월 4일에야 타결되면서 종료되었다. 이 파업에서 47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구속됐고, 55명이 해고되는 등의 진통을 겪었다. 이 파업 이후 사측에서 임금 인상 및 사업장 작업환경 개선, 근로자 처우 및 복지 개선에 본격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3. 골리앗 파업

파일:0552a451712cab777e729a744225dcf3.jpg
단체협상 승리하여 내집마련 쟁취하자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1990년 2월 5일, 1989년 128일 파업 이후 구속된 이원건 등 파업지도부에 대한 항소공판에서 이들이 4~8년의 징역을 구형 받자 조합원들이 항의 차원에서 7일~8일에 집단 조퇴 및 월차를 사용하는 등 단체행동으로 반발하자 1990년 2월 7일, 사측이 노조집행부에 대해 업무방해 및 노동쟁의조정법 위반으로 울산경찰서에 고소했고, 이에 따라 경찰이 이영현 위원장을 구속하고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을 수배 조치하자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에 반해 쟁의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지만, 대의원대회는 쟁의발생 결의를 논란 끝에 84 대 116으로 부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용목과 윤재건에 이어 4월 20일 수배 중이던 우기하 마저 구속되어 버리면서 4월 21일 조선사업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파업이 전개되었다.

결국 대의원대회마저 4월 22일 이를 노동탄압으로 간주하고 4월 25일부터 총파업을 벌였다. 이에 사측은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였고 백골단 등 경찰 1만 2천여 명이 투입되자 노동조합에서는 사내에 있는 선박 건조용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투쟁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4월 26일 밤부터 골리앗 점거농성 결사조 78명을 82미터 높이의 골리앗으로 올려 보내 농성 준비를 하였다. 1990년 4월 28일 새벽 3시 45분 경찰은 이른바 미포만 작전개시하였다. 이날 경찰은 불도저, 다연발 최루탄 발사차, 헬기, 화학차, 소방차, 구급차, 그리고 73개 중대, 1만명의 전투 경찰을 동원해 진압작전을 게시하였다. 새벽에 동구 전하동 현대중공업을 향해 경찰 대병력이 이동하기 시작하자, 중구[16] 양정동 소재 현대자동차의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던지면서 경찰 차량 행렬을 습격해 경찰 지프를 뒤집고, 경찰 버스 타이어에 바람을 빼고 방화하는 등 경찰의 현대중공업 진입을 저지하기도 했다.

한편 현대중공업에서는 정문과 시계탑 사거리 등에 경찰 진입 저지용으로 대조립공장에서 사용하던 핀지그와 족장용 사다리, 족장판과 나무 반목 등을 쌓아 바리케이트를 형성했고 쇠파이프와 안전모, 방독마스크와 사정거리 120m의 사제 박격포인 ‘민주박격포’ 6문으로 무장한 정당방위대가 정문 방어벽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지르고 화염병을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저항하였지만 불도저를 앞세운 경찰의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15분 만에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78명의 노동자들은 사내 골리앗크레인을 점거한 채 고공 농성을 이끌어 갔다. 골리앗 농성은 울산 지역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감정을 자극시키면서 연일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5월 3일까지 가두시위 관련 연행자가 730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규모 가두시위가 계속되었고,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골리앗에서는 식량부족에 직면하자 마침내 5월 6일부터는 농성자 전원이 단식에 돌입하면서, 저항 의사를 밝히자, 사측에서도 5월 7일에 교섭에 응하였지만 이마저 결렬된 상황에서 골리앗 크레인은 단식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남아있던 라면, 쌀, 물 등의 보급품을 모두 아래로 내려보냈다. 투신사고에 대비해서 경찰은 크레인 아래에 폭 9m·길이 150m 크기의 대형 그물망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5월 8일에는 가족들이 식수, 쌀, 과일, 의약품 등을 전달하려 했지만 사측에서는 그들의 반입을 막아서며 가족 30여명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사측 경비원 100여명 사이에서 몸싸움이 벌어졌었다.#
파일:노동자-골리앗-크레인.jpg
5월 10일 오후 2시 30분,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노동자 51명은 “현중노조가”를 부르며 골리앗에서 내려와 전원 경찰에 연행되었다. 현재까지도 골리앗 투쟁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상징이 되었다.
“새벽과 한 밤중에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무력 진압에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와 우리의 비애에 울분을 느끼고 급기야 투신하려는 동지들을 서로가 감싸 안으며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저 밑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노조가 유린되고 정부에 의해 천대받는 현실에서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골리앗 파업을 벌이던 노동자들의 의사

2.4. 1994년 파업

1994년 4월 20일 사측과 임단협에 나선 노조는 기본급 12.9% 인상과 더불어 해고자 복직과 간부사원 우대 철폐 등의 요구조건을 내세우면서 사측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후 3번의 협상이 있었으나 사측의 제시안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노동자 1명이 산재로 사망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어 5월 26일부로 임시 대의원회의에서 쟁의 발생을 결의해 6월 23일 조합원 쟁의 찬반투표에서 72%의 찬성을 얻고 3시간 부분 파업을 시작한 뒤, 다음날 임단협이 결렬되었고 27일 임단투 승리를 위한 중앙쟁대위 출범식을 사내 운동장에서 개최하면서 하루 전면 파업을 하는 등 투쟁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후 현총련 의장이자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인 이갑용은 사측에 성실 교섭 자세를 촉구했지만, 이에 사측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 계속 파업이 진행되다가 김일성 사망, 철도 파업 등 국가적으로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 따라 1주일 정도 파업을 중단하고 사업장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된 협상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자 7월 15일부터 다시 부분 파업에 돌입해, 21일부터 전면 파업에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사측이 21일부터 무기한 직장폐쇄로 맞받아쳤다. 이에 노조에서 일부 조합원들이 3안벽에 정박해 인도 전 마무리 작업 중인 LNG선을 점거하고 장기간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날 7천여명의 조합원들이 직장폐쇄 조치에 맞서 저지선을 뚫고 사내 운동장에 집결해 동조 파업에 들어가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또한 정부 측에서 노동부를 통해 공권력 투입을 자제하는 대신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파업 기간에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말 것과, 파업 후 손실보전금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경우 세제 혜택에서 제외시키겠다고 사측을 압박해 실제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 조합원들이 금전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기도 했다.

이후 사측이 협상 재개를 선언해 교섭에 나서면서도 협력업체 사장단을 동원해 파업 철회 집회를 태화강 둔치에서 여는 등 강온 작전으로 노조 측을 압박했고 무노동 무임금 원칙으로 반토막 난 급여를 받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파업 중단과 파업 지속 등을 주장으로 한 노-노 갈등이 발생하는 등 분열 조짐이 보였고 그 사이 부족한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파업기간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 폭발사고를 당해 위독해진 조합원의 사연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졌고 조합원 음독 자살 시도와 노조원간 폭행 사건 등의 사고가 연달아 터지자 사측과 노조가 직장폐쇄 철회 및 협상 재개를 선언해 진통을 거듭하다 8월 23일 기본급 11.3% 인상, 상여금 700%, 지역복지수당 5천원 인상, 귀향여비 2만원 인상, 월급제 추후 협의 등의 임단협안과 무노동 무임금 수용, 노조집행부에 대한 사측의 고소고발 취하 등의 조건에 합의해 8월 25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찬성 55.4%로 가결되어 마무리 되는가 싶었지만 무노동 무임금에 따른 상여금 삭감 등이 문제가 발목을 잡아 대의원들이 임단협 조인 거부 및 다시 파업에 나서는 등 혼란 속에 김정국 사장과 이갑용 위원장의 9월 17일 1:1 담판으로 마무리 되었다.

파업 노선을 둘러싸고 노조원 간 이견에다 폭력 사태를 경험한 뒤 노조를 탈퇴하는 사람들이 다수 발생하는 등 노노 갈등이 심화되었고 파업 주도 노조 간부들 중 11명이 구속 기소되어 4명이 징역형을, 나머지는 집행유예를 받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태 이후 현대중공업에서 전면파업은 점점 사라져갔다.

2.5. 노동법 날치기 사건

1996년 11월 27일 현대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1996년 말 국회에서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해 통과시킨 사건에 저항하며 총파업을 전개한다. 하지만 사측은 이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파업에 참여했던 조선사업본부 조합원 1,260명 전원에 경고 또는 견책 처분을 통고하는 등 징계 처분을 했고 장기간 파업에 참여했던 조합원 32명은 중징계를 내리고 노조 정책실장은 해고, 부위원장은 8주 정직 처분을 하는 등 강경하게 나왔고 이에 노조측에서는 법원에 징계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2.6. 민주노총 제명과 재가입

파일:현중노조 금속연맹 재명.png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에서 제명되던 순간
2004년 2월 14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였던 박일수 씨가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철폐를 요구하며 유서를 남기고 사내에서 분신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주노총이 현대중공업 노조 중심의 분신대책위 구성 제의를 거부하자 현대중공업 노조는 민주노총이 분신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고 한다며 2월부터 8개월 동안 금속연맹비(3억8000여만원)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사이 현대중공업 노조측이 박일수 씨 분신 사건 직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사내 크레인 점거 사태에서 하청노동자가 아닌 사측편을 들었고, 박일수 씨가 안치된 병원 영안실에 난입해 시신을 부검해봐야 한다며 강제로 울산대학교병원으로 옮겼고 유가족에 현대중공업과의 합의를 종용해 반 노동자적 행위를 하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17]을 하자 이에 2004년 9월15일, 민주노총 산하에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이하 금속연맹)의 위원장 백순환은 레이크힐스 관광호텔에서 연맹규약(제57조) 위반에 대해 금속연맹에서 현대중공업 노조 제명을 두고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었다. 결과는 264여 명[18]의 대의원 가운데 87.9%인 232명 찬성으로 현대중공업 노조의 제명이 결정되었다. 현중노조 또한 연맹에서 제명될 경우 독자노선을 통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또한 같은 해 12월, 2003년에 설립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에 하청 노동자의 노조 가입을 환영하는 성명마저 발표하면서 민주노총이 현대중공업 노조와는 완전히 척을 지는 듯했다.
파일: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전 로고.png
금속노조 가입 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로고
금속노조 가입 [age(2017-02-20)]년
2002년 13대 집행부에서 발생한 '노조 창립기념품 비리사건' 후 집행부 전원이 사퇴하고 이후 실리 노조를 표방한 14대 최윤석 집행부를 이어 탁학수, 오종쇄, 김진필 등 온건파가 노조를 10여 년 장악하면서 조선업 호황기와 맞물려 상여금의 대폭 상승, 자녀 학자금 지급 19년 연속 무분규 등으로 각종 격려금 지급 등 겉으로 봤을때 큰 성과가 있었던 것 처럼 보였지만, 그사이 안에서는 노조 집행부가 사측의 호혜주의 정책에 길들여져 임단협때마다 줄어드는 임금 상승률[19], 사측의 현장 간섭[20]의 심화에도 찍소리 못했고, 줄어드는 직영 노동자 대신 늘어나는 하청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외면 등의 악재를 덮어두기에만 급급해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특히 조선업 불황이 시작되면서 하청 노동자들이 먼저 쫒겨나갔고 이후에도 불황이 심화되자 정규직 직영 노동자들에게도 희망퇴직 등을 빙자한 엄혹한 구조조정의 현실이 눈 앞에 다가오자 노조원들 사이에 다시 강성 노조가 나와야 뭔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오갔고 결국 2012년 20대 위원장 선거에서 과거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등에서 앞장섰던 정병모 후보가 당선되면서 노조 집행부가 강성으로 전환되었다.

시간이 흘러 2016년 21대 백형록 집행부는 임금·단체협약 교섭과 승리와 사측의 조선업 불황을 빙자한 희망퇴직, 분사 구조조정에 맞서 조직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상급 노동단체 재가입을 추진해 왔었다.

이후 현대중공업 노조는 2016년 12월 20일부터 3일간 진행한 '금속노조 가입 조직형태 변경 찬반투표' 결과, 전체 조합원 1만4,440명 가운데 1만1,683명이 투표, 8,917명(76.3%)이 찬성해 가결됐다고 22일 밝혔고, 2017년 2월 20일 금속노조는 오후 서울 정동 노조 대회의실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현대중공업 조직편제 승인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로서 현대중공업 노조는 전국금속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 금속노조 산하지부가 되었다. 12년만에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복귀하게 되면서 금속노조의 조합원도 16만명으로 급증하게 되었다.

노조는 앞서 2001년 6월에도 산별노조 전환을 추진하다가 현장노동조직 간 갈등으로 부결된 바 있었는데 이 전례를 비추어 보아도 3년만에 입장 차이가 크게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원인으로는 회사의 기업 지배구조 개편에 따른 분사 위기와 더불어 조선 산업 전체에 구조조정 위기가 가중되면서 조합원들의 불안감 속 산별전환이라는 의제에 힘을 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도부도 임금 및 단체협약에 진전이 없자 교섭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사측의 구조조정에 맞설 수 있는 투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산별노조 가입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추진하여 초단기간 가입을 성사시켰다.

2.6.1. 가입에 대한 반대

민주노총 가입과 금속산별 전환에 대한 찬반여론은 극명하게 갈렸다.

금속연맹 및 민주노총이 현대중공업 노조 제명에 적극적이였던 과거 전례를 들어서 우리를 제명한 금속노조에 왜 다시 가냐?라는 입장은 당연히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현장 희망'이라는 조직에서는 '금속노조에 연간 20억원씩 주면서까지 가야 하나'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여 “금속노조에 가입하는 순간 노조의 재정적자가 불 보듯 뻔하다”면서 “금속노조에 가입하면 현대중공업 노조는 연간 38억원의 노조비를 납부해야 한다. 이 중 현대중공업 노조는 18억원만 행사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금속노조 가입에 대한 의구심을 표출하기도 했었다.

노조 집행부는 30일 "간부와 대의원들이 출근투쟁이나 현장활동을 통해 조직형태 변경의 중요성을 조합원에게 알리고, 조합원 총회를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면서 산별전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입장차이를 보였다. 이에 '현장 희망'은 금속노조 가입을 추진시키는 지도부 입장에서는 금속노조의 장점만을 강조하지만 단점도 있다면서 반대 입장 확실하게 했다. 또한 금속노조에 가입하면서 춘투(봄에 일어나는 투쟁)이 분사라는 상황 속에서 치열히 벌어질 것을 염려하는 입장부터 앞서 금속노조에 가입했던 현대중공업 일반직지회(사무직 노조)도 챙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현대중공업 노조(생산직)를 챙길 여유가 있겠냐는 의문도 많았었다.

위 사례들을 비추어 봤을때 노조의 강경화를 의식하는 다소 실리적인 입장부터 재정 문제와 같은 현실적 입장, 과거 전례와 일반직 사례를 통한 다소 강경한 입장까지 반대하던 조합원들이 전 스펙트럼에서 고루 분포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 현중노조가

<rowcolor=#fff> 현중노조가
글, 곡 무명
<rowcolor=#fff> 1절
<rowcolor=#fff> 폭력과 탄압의 굴레를 뚫고 우뚝선 현중의 형제여!
<rowcolor=#fff> cross the bridle of violence and oppression Brothers of HII who stands tall
<rowcolor=#fff>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노동자 해방으로!
<rowcolor=#fff> let's go, go, run to the Labor' liberation
<rowcolor=#fff> 가진 자들의 폭력이 판친다 해도 우리는 목숨바쳐 싸워 나가리!
<rowcolor=#fff> Even if the violence of occupier is rampant We will fight with our lives!
<rowcolor=#fff>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rowcolor=#fff> Liberation! for liberation!, Fight! for fight!
<rowcolor=#fff> 노동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rowcolor=#fff> HII Union at the forefront of Labor Liberation!
<rowcolor=#fff> 2절
<rowcolor=#fff> 미포만에 떠오른 태양 어머님의 뜨거운 눈물
<rowcolor=#fff> The Sun rises in Mipo Bay, Mother's warm tears
<rowcolor=#fff> 가자! 가자! 달려 나가자! 민중의 해방으로!
<rowcolor=#fff> let's go, go, run to the peoples' liberation
<rowcolor=#fff> 동지여! 기억하는가? 89년 봄 우리는 목숨 바쳐 싸워 나가리!
<rowcolor=#fff> comrade, Do you remember? 89's spring We will fight with our lives!
<rowcolor=#fff> 해방! 해방을 위해! 투쟁! 투쟁을 위해!
<rowcolor=#fff> Liberation! for liberation!, Fight! for fight!
<rowcolor=#fff> 민중해방 선봉에 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rowcolor=#fff> HII Union at the forefront of peoples' Liberation!

4. 출신 인물

5. 계파 분류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계파
실리파(온건파) 민주파(강경파)
민주혁신연대
(약칭 민혁이)
참노회

,유상구,
전노회

,백형록,
,정병천,
분과동지회

,박근태,
,조경근,
,염성길,
현대중공업 노동자 민주 연합회의
(약칭) 현노민연

,백호선,
미래로

,서필우,
노민투

,김진필,
,오종쇄,
통합현장연대
: 현재 집권 중인 계파 / (언론에서 언급 빈도가 높은 계파들임)

민주파가 지속적으로 집권하다가 노민투(실리파)가 위원장직을 차지하면서 12년 동안 실리파의 지속적인 집권이 이뤄지다가, 전노회, 분과동지연대회의, 청년노동자회 3개의 강성 계파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연대'(민노연)을 결성하여 반노민투 전선을 구축하였고, 끝내 '미래로' 출신 서필우 후보를 재치고 전노회의 정병모 후보가가 당선되면서 12년의 실리파 집권은 막을 내리고 민주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후에도 분과동지연대회의 출신의 백형록에 이어 박근태 후보가 민주현장연대(중도연합)의 황재윤와 '우리 함께 변화와 혁신' 소속의 오영성 후보, '현장연합합동지회(실리파)'의 김해용 후보를 모두 재치고 49%를 득표하면서 4파전 선거에서 엄청난 우위를 보여줬고 그 이후에도, 분과동지연대회의 출신의 조경근 후보, 전노회 출신의 정병천이 집권하면서 지속적인 강세를 이어나가고 있다.

6. 역대 임원 선거


21대 임원 선거

백형록 후보조 당선
총투표지수 15,638표 中 9,597표 ( 61.37% ) 득표
제 21대 임원선거 개표현황
회차 투표자수 % 기호 1번
백형록
% 기호 2번
서필우
% 기권 % 무효 %
1차 2,512 14.85% 1,383 55% 1,109 44% 0 0% 20 1%
2차 4,665 27.58% 3,107 66.6% 1,501 32.2 0 0% 57 1.2%
3차 2,710 16.02% 1,874 69.1% 823 30.4% 0 0% 13 1.1%
4차 2,215 13.09% 1,071 48.3% 1,120 50.6% 0 0% 24 1.1%
5차 3,536 20.90% 2,162 61.2% 1,348 38.1% 0 0% 26 0.7%
15,638 92.45% 9,597 61.37% 5,901 37,7% 0 0% 140 0.90%

22대 임원 선거

박근태 후보조 당선
총투표지수 11,093표 中 6,908표( 62.27% ) 득표
금속노조 현중지부 제2기(22대) 임원선거 개표현황
2017.10.27
기권 1,789 13.88%
무효 112 1.01%
회차 조합원수 투표자수 기호1 기호2 기호3 기호4
1차 2,598 2,191 17.00% 1,211 55.27% 555 25.33% 235 10.73% 168 7.67%
2차 2,232 2,060 15.99% 917 44.51% 789 38.30% 159 7.72% 153 1.33%
3차 2,507 2,076 16.11% 1,060 51.06% 534 25.72% 280 13.49% 190 9.15%
4차 3,001 2,647 20.54% 1,313 49.60% 480 18.13% 531 20.06% 301 11.37%
5차 2,549 2,124 16.48% 940 44.26% 564 26.55% 408 19.21% 198 9.32%
합계 12,887 11,098 86.12% 5,441 49.03% 2,922 26.33% 1,613 14.53% 1,010 9.10%

23대 임원 선거

조경근 후보조 당선
총투표지수 9,475표 中 5,145표 ( 54.30% ) 득표
임원선거 개표 집계결과 전체 조합원 수 10,276명/투표율 92.21% 기권: 1표
(0,01%)
투표자 수 9,475명 기권자 수 759명 무효표: 428표
(4.52%)
개표차수 1차 2차 3차 4차 5차 합계
기호 1번 1,361표 (64.08%) 1,273표 (58.47%) 821표 (41.68%) 851표 (49.71%) 839표 (56.23%) 5,145표 (54.30%)
기호 2번 698표 (32.86%) 820표 (37.67%) 1,047표 (53.15%) 744표 (43.46%) 592 (39.68%) 3,901표 (41.17%)
파일:금속노조 로고.png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24대 임원 선거

정병천 후보조 당선
총투표지수 7,749표 中 4,082표 ( 52.68% ) 득표
임원선거 개표 집계결과 전체 조합원 수 8,508명/투표율 91.08%
투표자 수 7,749명 기권자 수 759명
개표차수 1차 2차 3차 4차 합계
기호 1번 843표 (10.88%) 634표 (8.12%) 683표 (8.81%) 669표 (8.63%) 2,826표 (36.74%)
기호 3번 993표 (12.81%) 1,052 (13.58%) 925표 (11.94%) 1,112표 (14.35%) 4,082표 (52.68%)
무효표 174표 (2.25%) 271표 (3.50%) 221표 (2.85%) 173표 (2.23%) 839표 (10.83)
기권 1표 (0.01%) 1표 (0.01%) 0표 (0.00%) 0표 (0.00%) 2표 (0.03%)
총합계표 2,011표 (25.95%) 1,955표 (25.23%) 1,829표 (23.60%) 1,954표 (25.22%) 7,747표 (100,00%)
파일:금속노조 로고.png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중공업지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7. 조직도 (23대)


(단순 조직도를 보여주기 위한 자료입니다.)
파일:현대중공업지부23대집행부조직도.jpg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23대 집행부 조직도이다. 출처: http://www.hhiun.or.kr/Org

[1] #[2] 2004년 9월 15일 제명[3] 공식적으로 정해지진 않았다.[4] 749명 (2021년 12월 3일 8,508명)
2014년 이후 조합원이 꾸준히 줄다가 2016년 이후 직원수가 2만 1351명에서 1만5851명 급감하면서 조합원수도 급감하였다. 그러다 2019년 이후 다시 한 번 급감하여 7천여 명 선을 유지 중이며, 21년 후반기에 8천 명대를 돌파했다가 다시 한 번 줄어, 현재는 7천8백여 명에 이른다.
그래도 전체 직원수 12,754명 ,/ (2022년 12월),인 것을 감안하면 전체 직원 중 절반 이상이 가입하고 있다.

,"직원 대비 조합원수", "조합원 구성"의 자료는 Catch 채용 공고 사이트의 자료및 현중노조 홈페이지에서 제공된 자료에 근거함을 밝힙니다.,,
[5] 사무기술직.[6] 현재의 HD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부. 1989년 현대중공업에 합병됨.[7] 17대, 18대 노조위원장 역임. 재임 기간인 2009년 임금 협상을 사측에 위임하는 등 친 기업 행보를 보여 정병모 등 강경파 조합원들에게 어용이라고 비난받기도 했다.[8] 양정동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9] 현재의 현대리바트[10] 현대중공업이 방위산업체로 지정되어 있고, 노동자 중 일부는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1] '서태수 집행부'와 '이원건 집행부'[12] 서태수 측: 이 갈등은 이원건 측의 실세는 인정하지만 법적으로 원래 위치(서태수는 위원장, 이원건은 부위원장)로 돌아와 협상해야한다고 주장
이원건 측: 권한대행에게 조합장 권한을 위임했고, 지난달 6일 열린 총회에서 서씨가 불신임당했기에 우리측(이원건 측)이 정당한 집행부임을 주장
[13] 노조 규약상 해당 징계에 대해서는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해야하는 것이다.[14] ‘울산30작전’, 암구호 ‘아침이슬’[15] 현재 일산문.[16] 이 시절엔 북구가 신설되기 전이었다.[17] 이 사건에 대한 현대중공업 노조의 사과와 반성 및 추모는 2014년에 가서야 이뤄진다.[18] 참가자 수는 480여 명이였다.[19] 모 사장 시절 잘 될때 미래를 대비하자며 임금 인상률을 줄이더니 이후 실제 불황이 닥쳐왔을 때는 '회사가 위기입니다. 사우 여러분의 고통 분담이 절실히 필요한 때 입니다.'라며 임금과 처우 조건이 대폭 줄었다.[20] 바쁠땐 잔업·특근의 강제 참여, 연월차 사용 금지, 일 없을 땐 5시 조기 퇴근(이 시절엔 08:00~18:00까지가 기본 근무 시간이었다.)및 잔업 특근 통제, 연월차 강제 사용 등의 정책과 산재 은폐 분위기 속 산재 신청 노동자들의 현장 복귀 후 잔업 및 특근 통제, 각 부서 운영과장이 부서 내 강성 노조원을 분류해 '면담'이란 이름하에 승진과 편한 보직 등의 혜택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노동운동을 하지 말 것을 강요하거나 아예 한 술 더 떠서 사측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노조 집행부 선출을 위해 노조위원장과 노조 대의원 선거때 자유당 시절 때나 했던 사측 관리자 앞에서의 공개 투표 등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나 벌어졌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