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11 20:16:04

헨리 토이보넨


파일:henri toivonen.jpg
란치아 마티니 레이싱
헨리 파울리 토이보넨
(Henri Pauli Toivonen)
출생 1956년 8월 25일
사망 1986년 5월 2일 (향년 29세)
출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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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väskylä
데뷔 1975년 1000 레이크 랠리
활동 기간 1975년 ~ 1986년
소속팀(WRC) 탈보 (1980~1981)
오펠 (1982~1983)
포르쉐 (1984)
란치아 (1985~1986)
주요 경력 랠리 우승 : 3회
포디엄(시상대) : 9회
스테이지 우승 : 185회
WRC 참가 : 40회
코드라이버 안테로 린드크비스트(Antero Lindqvist)
유하 파야넨(Juha Paajanen)
유하니 코르호넨(Juhani Korhonen)
필 볼랜드(Phil Boland)
폴 화이트(Paul White)
프레드 갤러거(Fred Gallagher)
유하 피로넨(Juha Piironen)
닐 윌슨(Neil Wilson)
세르지오 크레스토(Sergio Cresto)

1. 개요2. 선수 경력
2.1. 초기 경력2.2. 탈보 (1980~1981)2.3. 오펠 (1982~1983)2.4. 포르쉐 (1984)2.5. 란치아 (1985~1986)
2.5.1. 에스토릴 서킷의 전설
3. 사망
3.1. 사고의 여파와 의문
4. 여담


1. 개요

핀란드 출신의 랠리 드라이버. 아버지(파울리 토이보넨)와 동생(해리 토이보넨) 또한 레이싱 드라이버인 모터스포츠 명문가 출신이다.

본래 서킷 레이싱 유망주였으나 안전을 우려한 가족들의 권유로 랠리로 전향했다. 이후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며 그룹 B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으나, 1986년 투르 드 코르스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한 드라이버의 사망을 넘어, 과열 양상으로 치닫던 그룹 B 카테고리의 즉각적인 폐지를 불러온 역사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2. 선수 경력

2.1. 초기 경력

다섯 살 때부터 운전을 배웠으며, 랠리계의 거물이었던 아버지의 인맥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서킷 레이싱을 지향했다.

카트(Kart)로 레이싱에 입문하여 투어링카로 전향해 핀란드 컵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포뮬러 V(Vee)로 옮겨 데뷔 시즌에 스칸디나비아 챔피언십 라운드 우승을 따냈다. 이듬해 상위 클래스인 포뮬러 슈퍼 V 유럽 챔피언십 우승, 1977년 포뮬러 V 핀란드 챔피언에 오르며 F1을 바라보는 유망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서킷 레이싱의 위험성을 걱정한 가족들의 만류로 인해 결국 풀타임 랠리 드라이버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핀란드 법상 신규 면허 소지자는 시속 80km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19세가 되어서야 공식 랠리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1975년, 1000 레이크 랠리(현 핀란드 랠리)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며 WRC에 데뷔했다. 심카 랠리 2를 몰고 출전했으나 차량 트러블로 리타이어했다. 이후 1977년 같은 대회에 크라이슬러 어벤저를 타고 5위를 차지하며 잠재력을 입증했다.

1978년, 시트로엥, 포르쉐, 크라이슬러 등 여러 팀의 차를 타고 WRC와 유럽 챔피언십을 오가며 경험을 쌓았고, 특히 1980년 시즌을 앞두고 팩토리 팀인 탈보(Talbot)와 계약하며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2. 탈보 (1980~1981)

메이저 팩토리 팀에서의 첫 시즌은 그에게 시험대였다. 탈보 선빔 로터스를 몰고 공격적인 주행을 선보였으나, 잦은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11월, 롬바르드 RAC 랠리에서 대이변을 일으킨다. 우승 후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베테랑 하누 미콜라를 4분 차이로 따돌리며 우승을 차지한 것.

당시 그의 나이 24세 86일. 이는 2008년 야리마티 라트발라가 갱신하기 전까지 무려 28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WRC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다. [1]

이 우승으로 1981년에도 시트를 확보한 그는, 후륜구동(FR) 기반의 선빔 로터스로 당시 랠리 판을 뒤흔들던 4륜구동 괴물 아우디 콰트로를 상대로 분전했다. 포르투갈과 산레모에서 2위, 몬테카를로 5위를 기록하며 드라이버 종합 7위에 올랐고, 탈보 팀에게 제조사 챔피언 타이틀을 안겼다.

2.3. 오펠 (1982~1983)

1982년, 로스만스(Rothmans)의 후원을 받는 오펠 팀으로 이적하여 아리 바타넨, 발터 뢰를 등 전설적인 드라이버들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오펠 아스코나 400과 만타 400 등을 몰았으나, 차량 성능이 경쟁 팀인 아우디나 란치아에 비해 열세였고 기계적 결함도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로폴리스 랠리와 RAC 랠리에서 포디움에 오르며 고군분투했다. 특히 1983년 만타 400(그룹 B)을 몰고 브리티시 오픈, 유럽 챔피언십 등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실력을 과시했다.

2.4. 포르쉐 (1984)

1984년, 데이비드 리차드(현 Prodrive 회장)가 이끄는 로스만스 포르쉐 팀과 계약하여 유럽 랠리 챔피언십(ERC)에 집중했다. 포르쉐 911 SC RS를 몰고 5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허리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완주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시기 란치아 팀의 러브콜을 받아 WRC 일부 경기에 란치아 037을 타고 출전하기도 했다. 결국 1985년부터는 본격적인 란치아의 팩토리 드라이버로 활동하게 된다.

2.5. 란치아 (1985~1986)

전설의 시작이자 비극의 서막.

1985년 초반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코스타 스메랄다 랠리에서 사고로 척추 골절 부상을 입었고, 팀 동료이자 친구인 아틸리오 베테가가 투르 드 코르스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부상 복귀 후 1000 레이크 랠리 4위, 산레모 3위를 기록했으나, 당시 그가 탔던 란치아 037은 후륜구동의 한계가 뚜렷했다. 경쟁자인 푸조 205 T16(약 440마력)이나 아우디 콰트로(약 500마력)에 비해 출력(325마력)과 구동 방식 모두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1985시즌 마지막 대회인 RAC 랠리에서, 란치아가 야심 차게 내놓은 괴물 머신 란치아 델타 S4가 투입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토이보넨은 이 차를 타자마자 우승을 차지했고, 1986년 개막전인 몬테카를로 랠리에서도 2등과 4분 차이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제 토이보넨의 이름이 깨끗해졌다."
-- 아버지 파울리 토이보넨 [2]

1986년 초반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비록 스웨덴 랠리는 엔진 고장으로 리타이어했지만, 란치아 델타 S4에 적응한 토이보넨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우승 후보 0순위였다.

2.5.1. 에스토릴 서킷의 전설

이 시기 토이보넨과 델타 S4의 성능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포르투갈 랠리를 앞두고 에스토릴 서킷(F1 경기장)에서 테스트 주행을 했는데, 당시 그가 기록한 랩 타임이 그 해 F1 그랑프리 예선 6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는 것.
비포장도로 세팅이 된 랠리카로 당대 최고의 F1 머신과 대등한 속도를 냈다는 이 이야기는, 당시 그룹 B 머신의 비상식적인 성능과 토이보넨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전설로 남아있다.

3. 사망

1986년 5월, 투르 드 코르스(Tour de Corse). 좁고 구불구불한 산악 도로 때문에 '1만 개의 코너를 가진 랠리'라 불리는 악명 높은 코스였다.

당시 토이보넨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심한 독감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전 경기에 참여하지 않은것에 대한 팀의 압박으로 약을 복용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란치아 델타 S4는 500마력이 넘는 출력을 뿜어내는 통제 불능의 야수 같았기에, 드라이버에게 극한의 피로도를 안겨주었다.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2위와의 격차를 크게 벌리며 압도적인 1위를 달리던 그는, 5월 2일 18번째 스테이지(코르테-타베르나)의 가드레일 없는 완만한 좌코너에서 코스를 이탈했다.

차량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며 나무와 충돌했고, 차체 하부의 알루미늄 연료 탱크가 나무에 직격하며 폭발했다. 마그네슘 합금과 케블라 등 인화성 높은 소재로 만들어진 델타 S4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가 너무 강력하여 프레임 일부를 제외하고는 차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소되었다.

헨리 토이보넨과 그의 코드라이버 세르지오 크레스토는 탈출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3.1. 사고의 여파와 의문

이 사고는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발생하여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다. 특이한 점은 코너 진입 전에 스키드 마크(제동 흔적)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가 고열로 인해 의식을 잃었거나(Blackout), 가속 페달이 고착되는 기계적 결함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이 참사가 발생하고 몇 시간 뒤, FISA(현 FIA) 회장 장 마리 발레스트르는 "1987년부터 그룹 B를 폐지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속도를 추구하던 광기의 시대는, 그 시대를 가장 잘 다루던 천재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4. 여담

  • 전설적인 여성 드라이버이자 아우디의 레전드인 미셸 무통은 토이보넨을 추모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드라이버들이 모여 겨루는 대회인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ROC)를 창설했다. 이 대회의 개인전 우승 트로피 이름은 여전히 '헨리 토이보넨 메모리얼 트로피'이다.
  • 데스 오델이 주관하는 푸조 랠리 챌린지에는 "젊은 핀란드인이 보여준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드라이버"에게 수여하는 '헨리 토이보넨 그랜드 어택 트로피'가 있다.
  • 그의 동생인 해리 토이보넨은 형의 사망 이후에도 레이스를 계속하다 2002년에 은퇴했다. 이로써 토이보넨 가문의 40년 레이싱 역사가 막을 내렸다.
  • 토이보넨이 어릴 때 탔던 카트는 훗날 F1 월드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한 '플라잉 핀' 미카 하키넨의 부모가 구입했다고 한다.

[1] 현재는 동향 후배인 칼레 로반페라가 20세 289일로 기록을 경신했다.[2] 20년 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아버지가 상대의 실격 덕분에 찜찜하게 우승했던 것을, 아들이 실력으로 완벽하게 우승하며 씻어냈다는 의미로 한 발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