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09:29:14

헤센 보석 도난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의 발단3. 보석 강도들의 재판4. 이후5. 기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이 독일에서 저지른 강도사건. 미군들이 훔친 보석은 그저 평범한 컬렉션이 아니라 당시 많은 왕실들과 인척 관계였던 헤센-카셀 공가의 컬렉션이었다. 이 보석 컬렉션은 헤센-카셀을 포함한 여러 왕가의 가보들뿐만 아니라 당시 헤센-카셀의 수장이었던 필리프, 그의 동생들인 리처드 공자, 볼프강 공자, 크리스토프 공자와 그들의 어머니인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1], 헤센 형제들의 아내인 사보이아의 마팔다 공주[2],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3], 바덴의 마리-알렉산드라 공녀[4] 등의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빌헬름 2세의 아들인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것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 보석은 250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고 오늘날의 가치는 3천만 달러를 훌쩍 넘는다. 실제로 세월이 흐르면서 보석의 가치도 증가함에 따라 당시 도난당한 보석 컬렉션의 가격은 현재 훨씬 더 올랐을 것이다.


위 영상은 1분 25초부터 도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2. 사건의 발단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헤센의 볼프강 공자[5]가 이끌던 헤센 일가는 원래 프랑크푸르트의 여러 은행에 귀중품을 보관해 두었다. 하지만 1944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연합군의 공습으로 갈수록 폭격이 심해지자 헤센 일가는 프리드리히쇼프에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보석들과 개인 재산을 숨기기로 결정했다.[6] 가족들은 모든 귀중품을 모아 볼프강과 재산 관리인인 하인리히 랭에게 주었는데 그들은 물품들을 깔끔하게 포장하고 소포로 싸서 아연 상자(zinc-lined wooden box) 안에 보관했다. 고용인들은 프리드리히쇼프의 지하실에 땅을 파 귀중품이 든 상자들을 묻고 그 위를 시멘트로 덮은 뒤 귀중품들의 위치를 확실하게 숨기기 위해 가벽을 설치했다.

1945년 4월, 패튼의 3군이 프리드리히쇼프[7]에 도착했다. 당시 프리드리히쇼프에는 크리스토프 공자의 아내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그녀의 시어머니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크리스토프와 소피아의 2남 2녀, 그리고 필리프[8]와 마팔다[9]의 3남 1녀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미군은 소피아의 가족들에게 4시간 내에 오직 음식과 옷만 챙기고 프리드리히쇼프 성과 모든 주변 건물들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10] 가족들은 귀중품들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프리드리히쇼프를 떠났다.

파일:USarchery.jpg

프리드리히쇼프(크론베르크 성)에서의 미군 장교들.

헤센 가족들이 떠나자 프리드리히쇼프는 미국 장교들의 클럽으로 사용됐다.[11] 6월 프리드리히쇼프는 WAC(여성군단) 장교인 캐슬린 내쉬 대위 담당으로 바뀌었다. 1945년 7월 15일부터 내쉬는 필요에 따라 가정 용품을 사용할 권한이 주어졌고 성의 내용물을 보관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미 수십 개의 책상, 의자 및 기타 가구가 이미 육군 요원이 다른 곳에서 사용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제거되었으며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부터 시작해서 점차 많은 물품들이 사라졌다. 결국 내쉬가 당국에 이를 전해 육군의 CID(범죄 수사 부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도난에 대응하기 위해 체크인 데스크가 설치되었고 집의 원래 하인 중 한명은 항상 도난을 감시하기 위해 문 옆에 있었다. 하지만 장교들은 멈추지 않았고 모두가 일종의 기념품을 가져가기 원했기 때문에 작은 물건들은 계속 사라졌다.

1945년 11월까지 내쉬는 성공적으로 장교 클럽을 운영했다. 내쉬는 묻힌 보물들에 대한 소문을 듣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조수는 독일인이 귀중품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호기심에 내쉬는 조수가 성을 수색하도록 허락했는데 결국 그들은 가벽을 발견했고 보석들이 담긴 상자들이 발견되었다. 내쉬는 그녀의 방에서 헤센의 가장 귀중한 보석이 깔끔하게 포장된 소포들을 열었다. 그녀는 즉시 친구인 잭 듀란트 대령을 불렀다. 잭 듀란트는 그의 조수인 데이비드 왓슨 소령을 데려왔다. 상상할 수 없는 보물들을 손에 들고 트리오는 보석들을 집으로 가져갈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왓슨은 보석과 금속을 파기 위해 여러번 북아일랜드로 여행했고 내쉬와 듀란트도 스위스에서 보석을 팔았다. 그들은 상당한 양을 팔았지만 모든 보석이 유럽에서 팔리지는 않았다. 눈에 덜 띄는 보석들은 육군 포스트를 이용해 미국으로 보내졌다. 왓슨은 어머니에게, 내쉬는 여동생에게, 듀란트는 형에게 보냈으며 약 30개의 상자를 미국으로 보냈다. 1946년 세 명은 모두 군대를 떠나면서 더 많은 보석들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 트리오에게 알려지지 않은, 보석의 실종에 대한 조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보석이 발견된 다음날 원래 고용인 중 한 명이 헤센가의 재산 관리인 하인리히 랭에게 이 소식을 보도했고 랭은 즉시 마가레테 공주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마가레테는 랭에게 내쉬로부터 상자가 발견되었다는 진술과 물품이 가족에게 반환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내쉬는 보석이 여전히 안전하다며 더 많은 정보를 주기 거부했다.

1946년 1월, 내쉬, 듀란트, 왓슨이 보석과 귀금속을 계속 팔고 있을 때 소피아는 하노버의 게오르크 빌헬름과의 두 번째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쉬는 소피의 보석을 만나고 돌려달라는 모든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헤센 가족들은 독일의 문화적, 역사적 유물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미 육군 사무소에 연락하여 조사를 요청했다. 그들이 행동이 느리자 소피아는 4월에 곧장 범죄 수사 부서로 가서 조사를 요청했다. 소피아는 이 시점에서 보석이 도난당했다고 확신했다.

3. 보석 강도들의 재판

1946년 초, 크리스토프 공자의 미망인인 소피아는 재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인 마가레테 공주는 이미 미 육군 직원으로부터 가정의 지하실에 숨겨진 보석 상자를 회수하려고 시도했다. 그녀의 시도는 WAC 대위 캐슬린 내쉬에 의해 거절되었고 4월 소피아는 마침내 미 육군 CID(범죄 수사국)에 조사를 시작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보석이 도난당했다고 확신했다.

소피아는 옳았다. 내쉬 대위, 잭 듀란트 대령, 데이비드 왓슨 소령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사람은 보석을 훔쳤고, 많은 것을 부수고, 팔기 시작했고, 잘 가지고 도망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4월 소피가 CID에 갔을 때 내쉬와 듀란트는 이미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왓슨은 여전히 프랑크푸르트에 있었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그를 쉽게 추적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듀란트는 훔쳐 온 모든 보석을 팔려고 했지만 서류 없이는 팔기 어려웠다. 하지만 때때로 가짜 이름을 사용하여 몇 개의 큰 것을 팔수 있었고 심지어 차를 사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 말년 휴가 중이던 내쉬는 캘리포니아에 있었지만, 듀란트를 만나기 위해 3월에 시카고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더 많은 보석을 팔려고 했지만 보석에 필요한 세관 서류가 없었기 때문에 보석상은 거절했다. 보석상은 경찰을 불러 수사관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듀란트는 상황이 나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그와 내쉬는 때때로 그들의 전리품을 과시했다. 시카고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한 내쉬는 마팔다에 속한 606개의 다이아몬드가 있는 플래티넘 시계를 착용했다. 당시 그것은 7,500달러로 평가되었고 오늘날 그 금액은 110,000달러가 될 것이다. 보석을 파는 것 외에도 듀란트는 그의 형제가 버지니아의 수많은 지역의 항아리에 보석들을 묻는 것을 도왔다. 1946년 5월 28일, 서로 재판에서 증언을 하지 않기 위해 내쉬와 듀란트는 결혼했다.[12]

재판결과 범인들은 1951년 8월에 투옥되었다. 왓슨 소령은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일찍 가석방되었다. 내쉬 대위는 5년형을, 듀란트 대령은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도난당한 물건의 가치의 10퍼센트만이 헤센 가문에게 돌아갔다.

4. 이후

파일:보석소피아.jpg
되찾은 보석을 확인하려 기다리는 소피아 공주
결국 헤센 가의 보석을 모두 회수하지 못하자 독일 정부는 헤센 가에게 재정적 보상을 제공했지만 이 피해보상금도 강도를 저지른 미국 측에서 배상한 것이 아니라 독일에서 준 것이다. 헤센 가는 이 자금을 50에이커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5. 기타

  • '헤센 컨스피러시'라는 영화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1] 프리드리히 3세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막내딸. 헤센-카셀 백작부인으로 헤센-카셀의 필리프, 리처드, 볼프강, 크리스토프의 어머니.[2] 필리프의 아내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차녀[3] 크리스토프 공자의 아내. 필립 마운트배튼의 넷째 누나.[4] 볼프강 공자의 아내로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딸.[5] 당시 헤센-카셀 공가의 수장 필리프의 동생.[6] 이 보석들은 수백년 동안 물려받은 가문의 가보들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과 독일의 카이저들에게까지 물려받은 매우 귀중한 것들이었다.[7] 크론베르크 성이라고도 불린다.[8] 크리스토프 공자의 형이자 당시 헤센-카셀 공가의 수장. 하지만 아내 마팔다와 마찬가지로 나치에게 체포당해(전후 석방되었으나 전범 혐의로 2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가족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9] 본명은 사보이아의 마팔다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차녀다. 이탈리아가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전향한 후 보복으로 체포되어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던 터라 남편 필리프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을 돌볼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수감 중이던 1944년 8월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10]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가 떠나길 거부하자 미군은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저 늙은이를 쏘겠다.”( “If that old girl does not come down at once, I”ll go up and shoot her.”)고 위협했다고 한다.[11] 아름다운 성과 부지는 장교들이 약간의 R&R을 할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으며 야외 활동, 숙박 및 식사를 제공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성은 그들이 본 것 중 가장 호화로운 거주지였다. 방 100개짜리 성은 호화로운 가구, 카이저와 차르와 여왕에게 받은 선물,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큰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가 주고받은 편지 모음으로 가득했다.[12] 그들은 서로를 오랫동안 알지 못했고 듀란트는 다른 여성들을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듀란트는 미 육군 공군에 입대하기 전에 변호사였고 의심할 여지 없이 상황이 위험했으며 그들이 잡힐 것을 알았고 그들이 결혼한다면 상대방에게 증언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결혼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