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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농구 감독 허재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2. 전주 KCC 이지스 감독
2005년 5월 18일, 서초구 KCC 본사에서 진행된 허재 감독 취임식에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과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 |
2005년 5월 16일, 연봉 2억 3000만원 계약으로 전주 KCC 이지스의 감독 취임이 결정되었다는 보도 자료가 나왔다. 당시 나이는 40세.
2003-2004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받으러 갔었지만 신선우 감독이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에 취임하면서 공석이 되자 곧바로 KCC는 허재에게 감독직을 제안했고, 허재가 이를 수락하면서 1년도 안 되어 연수를 중단하고 돌아왔다.[1]
당시 나이도 40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은퇴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코치도 안 거치고 곧바로 감독으로 취임한 것, 그리고 허재가 현역 시절 뛰던 전성기를 보냈던 팀인 기아자동차 농구단이 KCC의 전신인 현대전자 시절 라이벌 구단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KCC의 허재 감독 선임은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감독 취임 직후부터 KCC 팬들의 평가와 논란 등으로 갑론을박이 생기기도 했다.
2.1. 감독으로 데뷔를 맞이한 첫 시즌
기존의 이상민-조성원-추승균 트리오를 비롯해 외국인 용병 찰스 민렌드와 쉐런 라이트를 주전으로 기용했지만 표명일, 손준영, 변청운, 김진호 등 백업 선수들을 들여보내면서 눈에 띄게 두드러났다. 초보 감독으로서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고비마다 잘해준 선수들이 위기를 넘겼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 겪은 걸 하나씩 채워나갔다.시즌 도중 기량 부족으로 퇴출된 라이트의 대체 선수로 아써 롱이 들어오면서 다혈질의 성격으로 퇴장을 당하는 등 말썽도 많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으로 취임한지 1년만에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4위 부산 KTF 매직윙스[2]를 꺾고 4강에 올랐다가 정규리그 1위인 모비스를 상대로 패해 감독 데뷔 후 첫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했다.
2.2. 리빌딩
조성원이 은퇴하고 찰스 민렌드가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한 2006-2007 시즌에는 자신감 있는 플레이와 선수들끼리의 믿음을 추구하고 조화로운 팀워크를 통해 강한 농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팀 전력 때문에 허재의 지도력은 그다지 좋지 못할 수 있다는 일부 팬들의 예상도 있었다.
결국 이상민과 추승균의 부상, 외국인 용병 부진이 내내 이어졌고 1월 9일 표명일, 변청운, 백주익을 내주고 정훈, 김영만, 배길태를 받는 3:3 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킨 뒤에도 팀 창단 이후 15승 39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내년 시즌에는 올해보다 악재가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FA 영입에 대한 질문에 구단 간의 예의가 있다면서 조심스럽게 입장을 말했다.
2.3. 서장훈과 임재현의 입단
2007-2008 시즌에는 용산중고 시절 선배인 최형길 원주 동부 프로미 단장이 KCC 이지스 단장에 새로 임명되었고, 서장훈과 임재현이 FA 계약으로 입단하면서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상민-추승균과 함께 우승 전력 후보 팀을 구성해 나갈 수 있도록 다짐했다.그러나 영입 과정에서 이상민이 보호선수에서 제외되고 보상 선수로 서울 삼성에 이적시켜 엄청난 충격을 받자 팬들은 회원 탈퇴는 물론 허재 감독과 최형길 단장을 향한 퇴진과 비난 댓글로 한동안 비판을 받았고, 팬들이 개최한 항의 규탄 집회에서 사과 요구와 유니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보이콧 운동까지 벌이기도 했다.
이상민이 팀을 떠난 상황에도 정규 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서울 삼성과 맞붙었으나 한경기도 이기지 못하고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하면서 아쉬움만 더 커졌다.
탈락 이후 비시즌을 맞이해 KT&G를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정규리그 우승팀 원주 동부의 1차전 경기를 최형길 단장과 함께 관전하기도 했다.[3]
2.4. 우승-준우승-우승
2008-2009 시즌 개막 전 우승 후보로 평가받기 위해 작년 1월 28일에 개최된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한국인 처음으로 NBA에 뛴 적 있는 하승진을 지명했다. 하지만 하승진의 영입으로 서장훈의 포지션은 변동되기 어렵다는 예상이 많았으나 변화보다는 본연의 플레이를 더 강조하며 살리겠다고 밝혔다. 게다가 허재는 하승진의 부상에 대한 우려와 출전 시간을 놓고 얼마나 뛰어주느냐에 따라 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을 아끼며 그동안의 기대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초반에는 5연승을 포함해 6승 3패를 기록한 1라운드에서 단독 2위에 올랐으나 2라운드에서 약체로 꼽힌 팀들에게 잇따른 연패와 동시에 5할 승률 이하로 떨어지면서 6위까지 추락했고, 서장훈의 감기 몸살을 이유로 불화설까지 나오며 크게 흔들리자 12월 19일 트레이드[4]를 발표한 직후부터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승진의 발가락 골절상과 임재현의 어깨 부상으로 큰 위기를 맞았지만, 강병현을 지도하면서 팀의 컬러를 바꾸고 상대의 포스트업에 대한 수비를 내세우며 슈팅 능력과 빠른 몸놀림까지 더해진 스타로 성장시켰고, 추승균과 외국인 용병 마이카 브랜드, 칼 미첼로 일컫는 주전들을 중심으로 팀의 조직력을 다 잡으며 2009년 1월에는 9승 2패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고, 이후 중위권에서 밀리지 않고 앞서간 끝에 단독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부상과 슛 난사 등으로 힘들었지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며 전자랜드를 물리쳤고, 4강에서 중고등학교 시절 절친 사이였던 선배 전창진이 마지막 해에 감독을 맡았으며 하승진과 김주성의 최고 높이를 맞대결로 유명했던 친정팀 동부 프로미와 마지막까지 치열한 접전을 펼치며 감독으로 부임한지 처음으로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였다.
드디어 시작된 챔피언결정전 상대는 작년 4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게 만든 서울 삼성 썬더스와의 경기였다. 1차전에서 초반 패스 워크가 좋았으나 실책이 이어진데 이어 선수들의 체력적인 부담이 생겨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한 뒤 2차전에서 선수들이 총력을 기울이고 팀워크를 잘 맞춘 덕분에 승리하며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3차전에서 허벅지 부상으로 이탈했던 강병현을 기용해 내외곽 슛과 리바운드면보다 경기의 분위기를 빠르게 바꾸며 승리를 거두었고, 4차전에서 가장 많은 출전시간인 44분41초를 기록한 추승균과 칼 미첼이 KBL에 들어온 이후 가장 많은 39득점을 넣으며 연장전까지 간 끝에 알토란 같은 활약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5차전[5]에서 애런 헤인즈의 버저비터로 우승의 기회를 놓쳤고, 6차전은 하승진의 발목 부상으로 4쿼터에 기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점수차가 삼성으로 크게 벌어진 채 동점이 되면서 운명의 마지막 7차전을 대비했다.
그리고 타이틀을 놓고 건 7차전 마지막 경기에서 전반 종료 직전 강병현의 3점 버저비터 역전에 3쿼터에서 추승균, 마이카 브랜드 등의 연이은 3점포로 승부 흐름을 바꾸었고, 발목 부상을 입어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가 복귀한 하승진도 테렌스 레더와 골밑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활약한 덕분에 지난 시즌 4강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완패당했던 설욕을 딛고 챔피언에 등극하였다. 그와 동시에 KBL 출범 후 선수-감독으로 우승한 최초의 농구인[6]이 되었다.
2009-2010 시즌에는 작년 시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킨 추승균-하승진 중심을 앞세워 지난 시즌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 1순위로 전태풍을 지명하면서 행운을 얻었지만 낮선 한국 농구에 적응하지 못해 잘못했다가는 팀 전력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바로 바꾼 허재는 세밀한 작전과 수준 높은 경기 그리고 선수들에게 강한 승부욕을 카리스마 넘치게 보여주며 정규리그 3위로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하승진이 올스타전에서 부상을 당해 정규리그 막판에 약점까지 드러낸 차질까지 생기자 스몰 라인업을 구성해 속공을 가세하면서 삼성과 kt를 차례차례 꺾고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해 농구대잔치 시절 기아에서 함께 뛰었던 유재학 감독의 울산 모비스와 맞붙게 되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플레이오프에서 부상으로 거의 출전하지 못했던 하승진의 출전 여부를 신중히 판단한 끝에 5차전부터 투입시켰으나 모비스의 강한 전력 보강과 입단 3년차 함지훈의 포스트업에 고전을 면치 못한 채 2연패 달성은 실패했다. 만약 하승진이 부상 없이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뛰었더라면 다른 분위기로 흘러갔을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2010-2011 시즌에는 초반에 부상 악재 등으로 고전에 시달렸고 2라운드 때는 8위까지 내려가기도 했지만 3라운드로 들어간 이후 아시안게임 대표 차출로 체력과 경기 감각이 극도로 떨어져 거의 나서지 못한 하승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추승균, 전태풍, 임재현 등 주전 선수들과 백업 강은식과 제대한 신명호에게도 완벽한 수비 패턴을 제공시키는 등 뚝심의 힘으로 상승을 이끌어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서울 삼성을 상대로 6강에서 전경기 무패를 기록하였고, 인천 전자랜드와 4강은 1차전을 제외한 나머지 경기에서 체력전을 펼치면서 공격과 수비 농구로 앞세워 3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이끌었다.
챔피언결정전 상대는 기아자동차 시절 팀 메이트였던 강동희 감독의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다운 근성과 수비의 조직력을 강조하며 만만치 않은 경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3차전에서 추승균의 부상 악화와 강은식이 1쿼터 종료 직후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이탈 등의 악재까지 겹쳐진 바람에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절체졀명의 위기 속에서도 고비 때마다 터진 슛으로 상대의 방어를 무력화시켰고, 6차전에서 좀처럼 경기가 풀리지 않았다가 종료 35.6초를 남기고 강병현의 끝내기 3점슛으로 역전에 성공하면서 팀 통산 최다 5번째 우승 트로피를 올리는데 기여했다.[7]
2.5. 통한의 6강 플레이오프 탈락
2011-2012 시즌에는 국가대표 팀 감독을 맡느라 장시간 동안 팀을 가꾸지 못해서 크게 자신이 없었다. 지난 시즌 강병현의 군 입대와 이중원이 제대했고 김태홍, 정민수 등 드래프트로 입단하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중요한 관건을 세웠다.그러나 6강 플레이오프 모비스전에서 3전 전패로 탈락했고 내년 시즌 전태풍의 이적과 하승진의 군 입대 등으로 주축 선수들의 공백이 이어지게 되었다.
2.6. 다시 리빌딩 체제로
2012-2013 시즌을 앞두고 하승진의 상무 입대, 추승균의 은퇴, 전태풍의 이적 등으로 전력이 약해졌지만 모든 선수들이 좋은 기회와 젊은 패기를 앞세워 좋은 모습으로 팀이 재창단했다는 생각으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장민국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김태홍이 지난 시즌만큼의 활약상을 보이지 못하는 등 총체적 난국에 시달리자 2군 드래프트에서 뽑혀 출전시간을 꾸준히 주고 수비와 득점, 리바운드에 상관없이 제 몫의 이상을 활약하며 2군 신화를 써낸 최지훈에게 높은 가치를 평가했다.[8] 1월 말에는 강병현이 군에서 복귀해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줬지만 가드진의 무기력한 경기로 힘을 잃어 최하위의 수모를 겪었다.
2013-2014 시즌에는 대학 시절 최고의 득점력으로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고, 아시아 선수권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베스트 5에 선출되어 제 2의 허재로 불리웠던 김민구[9]를 지명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 강병현이 상대 가드진을 막았다가 허리 부상과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출전과 휴식을 병행했다 시즌 후반에 들어서 괜찮았거나 통증도 있었지만 시즌 아웃되면서 이한권, 김효범, 박경상 등을 활용해 공백을 메우도록 하였다.
물론 경기에 대한 내용은 좋았을 때나 못했을 때를 떠나서 허재가 항상 선수들에게 안정감 있게 의존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소용이 없었고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허재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항의 장면인 이게 불낙이야? 역시 이 시즌에 나온 사건이다.
2.7. 사퇴
2014-2015 시즌을 앞두고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을 마친 하승진의 복귀한데 이어 FA 최대어로 불리웠던 국가대표 출신 김태술[10]을 영입했고,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슈팅 가드 김지후가 입단하면서 선수들의 명예회복을 되찾고 팀이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김민구가 개막 전 음주운전 사고로 전력에서 이탈되어 중심 선수들의 잦은 부상 때문에 조직력이 부실해졌고, 연패가 이어져 팀 운영에 큰 차질을 빚기도 했다. 이후에도 계속된 성적 부진에 정신적과 육체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2월 8일에 패한 창원 LG전을 끝으로 자진사퇴해 10년간의 KCC 감독 생활은 막을 내렸다.
3. 감독에 대한 평가
스타급 선수 출신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준수한 커리어를 가졌고, 평가도 좋았던 감독.우선 스타출신답게 선수단 장악 능력이 KBL 감독들 중에선 상급이었다. 여러 선수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선수단의 분위기를 적절히 조율하는데 상당한 감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선수의 약점을 고치기 보다는 강점을 잘 살렸던 편이다. 다른 감독 밑에선 죽어 있던 아이반 존슨이 허재 감독 밑에선 좋은 경기력을 보였고, 전자랜드에서 벤치 멤버였던 강병현을 데려와 에이스로 만들었고, SK에서 죽어있던 임재현을 데려와 들개로 만들었으며, 공격력이 약한 신명호를 수비 스페셜리스트로서 활약하게 만들었다. 하승진의 느린 움직임과 공수 전환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커버하기 위해 신명호, 강병현, 임재현 등 이른바 '들개 군단'으로 불린 가드진을 쉬지 않고 뛰어다니게 했고, 용병 또한 하승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수비 범위가 넓은 선수들로 데려오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로테이션을 칼같이 잘 돌렸던 것도 장점. 수비가 필요할 땐 신명호, 임재현을 뛰게 하고, 안정적인 득점이 필요할 땐 추승균을 투입하고, 그러면서도 신인들을 키우기 위해 주전들이 쉬는 타이밍엔 신인 선수들을 투입했었다. 신인 선수들을 잘 밀어줘서 신인 시절 허재 감독 밑에서 데뷔해서 커리어 하이를 찍은 선수들이 상당히 많다.
선수들을 혹사시키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하중을 많이 받는 하승진을 배려해 10개 구단 중 가장 체력 훈련을 적게 가졌고, 혹사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정규리그 승수를 포기했을 정도. 하승진은 그런 허재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만약 자기가 다른 감독 밑에 있었으면 선수 생명이 짧아졌을 거라고 말했다. 전태풍 또한 처음 한국에 와서 한국식 훈련법에 적응하지 못하였는데 허재는 그런 전태풍에게 억지로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골이 안 들어가는 걸로 혼내지 않지만 자신감이 없어서 슛을 쏘지 않는 것에는 화를 냈을 만큼 선수들에게 늘 자신감을 강조하였다.
다만 심판 판정에 항의할 때마다 결례와 거리가 먼 거친 언행을 보여주었고, 엄청난 점수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팀이 작전 타임을 불렀다는 이유로 끝났을 때 무례하게 선배 감독들과 악수를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여담이지만 감독으로서 유재학 감독을 플레이오프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4. 감독 통산 기록
시즌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2005-06 | 전주 KCC 이지스 | 54 | 29 | 25 | 5위 | 4강 PO | |
2006-07 | 54 | 15 | 39 | 10위 | - | ||
2007-08 | 54 | 33 | 21 | 2위 | 4강 PO | ||
2008-09 | 54 | 31 | 23 | 3위 | 우승 | ||
2009-10 | 54 | 35 | 19 | 3위 | 준우승 | ||
2010-11 | 54 | 34 | 20 | 3위 | 우승 | ||
2011-12 | 54 | 31 | 23 | 4위 | 6강 PO | ||
2012-13 | 54 | 13 | 41 | 10위 | - | ||
2013-14 | 54 | 20 | 34 | 7위 | - | ||
2014-15 | 45[11] | 11 | 34 | 9위 | - | ||
<rowcolor=#0f236a> 통산 | 531 | 252 | 279 | 0.475 | V2 |
5. 100승 단위 달성 경기
소속팀 | 시즌 | 승리 | 상대팀 | 일자 | 경기장 |
전주 KCC 이지스 | 2008~2009 | 100승 | 창원 LG 세이커스 | 2009년 1월 28일 | 창원실내체육관 |
2011∼2012 | 200승 | 울산 모비스 피버스 | 2012년 1월 12일 | 전주실내체육관 |
6. 관련 문서
[1] 여기에 김재욱 당시 사무국장이 5월 7일에 로스앤젤레스의 한 식당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던 허재를 만나 차기 감독으로 KCC에 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당시 KCC 구단주 정상영 전 회장이 허재와 용산고등학교 동문인 것도 한 몫 했다.[2] 2차전에서 추승균이 외곽슛을 쏘다 김도수의 반칙으로 바스켓카운트와 동시에 추가 자유투까지 넣은 이후부터 일어난 사건은 3.2초를 남기고 KCC 이지스의 이환우 매니저와 KTF 매직윙스 강병수 코치가 더블 테크니컬 파울을 받으며 잠시 경기가 중단되자 허재가 본부석과 심판들을 향해 KCC에게만 테크니컬 파울을 주었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관중석으로부터 물병이 날아와 급기야 양 팀 선수들이 벤치로 물러나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장내 아나운서의 자제 요청에도 마이크를 잡은 허재가 홈 팬들에게 물병을 던지지 말라고 부탁하자 사태는 10분이 지나서야 경기가 재개되었다.[3] 원주를 찾은 이유는 원래 2차전 때 가려고 했었다가 최형길 단장과 점심 먹다가 날씨도 좋으니까 가면 어떨까 해서 가게 되었고, 감독이자 중고등학교 시절 선배였던 전창진이나 지인들도 볼 겸해서 왔다.[4] 전주 KCC get: 강병현, 조우현, 정선규 ↔ 인천 전자랜드 get: 서장훈, 김태환[5] 하승진을 2쿼터부터 투입시켰지만 지난 4차전에서 다친 가벼운 발목 때문에 통증이 더 심해졌다.[6] 허재는 2002-03 시즌에 선수 겸 플레잉코치로 우승한 적 있다.[7] 이 일을 계기로 2년만에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8] 최지훈의 경희대학교 1년 선배인 김우람도 작년 2군 드래프트로 입단한 후 윈터리그에서 발휘했다가 1군 계약까지 맺으며 2군 신화를 써냈다.[9] 다만 1순위를 놓친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었던 데다 김민구 외에 김종규나 두경민 중 1명만 선발했어도 만족할 수 있었다며 여러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게 기용 폭을 넓히겠다며 덧붙였다.[10] KGC와 5년 계약을 체결한 뒤 강병현, 장민국과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이적했다.[11] 중도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