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FFF> 海豊 金氏 해풍 김씨 | }}} | |
관향 | <colbgcolor=#FFF>경기도 개풍군 | ||
시조 | 김숭선(金崇善) | ||
중시조 | 김숭선(金崇善) | ||
집성촌 | 강원도 화천군 경기도 화성시 경상북도 김천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
황해북도 사리원시 | |||
인구 | 12,569명(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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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시조 김숭선(金崇善)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고려 때 예부상서[1]를 지내고 해풍부원군에 봉작돼서, 후손들이 본관을 해풍으로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아들 김천일(金天一) 역시 고려 때 지후(祗侯)벼슬을 지냈고, 손자 김휘는 고려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최종 관직은 평장사(平章事) 시랑(侍郞:정2품).
3. 덕수 김씨, 정주 김씨
해풍 김씨 중 8세손 김수연(金壽延)계 후손 덕수 김씨(德水 金氏), 10세손 휘 김수(金守)계 후손은 정주 김씨(貞州 金氏)라고 구분한다. 이인임을 위시로 친원파 권문세족이 정권을 잡자 친명파였던 해풍 김씨는 숙청을 피하려 대거 고향을 떠났고, 그 상태로 여러 세월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나중엔 원래 본관인 해풍의 다른 이름인 정주, 덕수로 관향위주(貫鄕爲主)라는 것을 이용해 본관을 정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렇게 400년이 지나고, 정조 15년인 1791년 17세손인 김광악(金光岳)이 신해보(辛亥譜)를 편찬하면서 본관을 달리해도 시조가 같으니 동원종문(同源宗門)이라고 못박았다. 다시 준 백년이 지나고, 1865년 을축보(乙丑譜) 편찬 때는 풍덕수운 김평(金枰)계, 남양쌍부 장(金樟)계, 덕수 김씨 시조 김수연(金壽延)계, 정주 김씨 김수(金守)계, 황간김산 김효신(金孝信)계, 김체경(金逮慶)계, 김재(金載)계 등 전국에 퍼졌던 해풍 김씨계 후손들이 등재되었다.
4. 인구
6세손 김이(金泥)계 풍덕수운파(豐德水雲派), 김항(金沆)은 정주파(貞州派), 김체경(金逮慶)은 평양파(平壤派), 김재(金載)는 안변파(安邊派), 7세손에서 남양쌍부파(南陽雙阜派)와 덕수파(德水派)가 분파되었다. 또한, 정주파에서 황간김산파(黃澗金山派) 역시 분파되었고, 8세손에서 14세(世)까지 계속 분파되어 최종적으론 20개파이다.풍덕수운파, 산귀파, 이호파, 유현파, 관곡파, 덕수파는 경기도 개풍군, 장단군에 집성촌이 있다. 정주파는 경기도 장단군, 개풍군, 황해도 신계, 그리고 일부는 제주도에서 세거하고 있다. 해풍 김씨가 김씨 본관들 중 유난히 실향민 출신이 많은 것은 이 때문.
1986년 조사에 따르면 해풍 8,141명, 덕수 4,385명, 정주 2,499명으로 총 인구가 15,025명이었다. 2015년 기준으론 해풍 10,934명, 덕수 3,438명, 정주 2,376명으로 변화하였고, 총 인구는 16,748명으로 소폭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