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8 11:14:18

함태홍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강릉 함씨[2]
출생 1893년[3] 9월 9일
함경도 함흥부 주지사
(현 함경남도 함주군)[4]
사망 1929년 1월 14일[5]
함경남도 함흥부
묘소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풍동리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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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893년 9월 9일 함경도 함흥부 주지사(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아버지 함인택(咸璘澤)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오리(현 함주군 풍성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으며,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이현재(李鉉在)의 집에서 기거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26~27일, 그는 급우 나창헌으로부터 조만간 어느 곳에서 조선독립선언을 한다는 풍문을 들었고, 이튿날에는 동급생 장예세(張禮世)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고 조선독립선언을 한다면 우리 학생들도 함께 참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함태홍은 이러한 취지의 이야기를 당시 경성부 훈정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대묘앞골에 살던 동급생 이익종(李翼鍾)에게 전달했는데, 2월 28일 밤 한위건으로부터 내일(3월 1일) 오후에 독립선언을 한다며 정확한 장소와 시간, 선언의 주동자 등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하여튼 일단 내일 오후에 외출해보면 어차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3월 1일 오후 3시경 외출했는데, 마침 종로2정목 탑골공원에서 3.1 운동이 일어났고, 독립선언식이 끝난 뒤 여기에 참여했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창덕궁에서 종로로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이에 가담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 십자로[6]까지 행진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던 길에 종로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습득해 마침내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2일 경성부 운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나창헌의 집에 묵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미결수로서 8개월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여 1922년 3월 본과 특별의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23년 1월 8일 의사 면허[7]발급받았으며, 1924년 함흥자혜의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다가, 이후 사임하고 1924년 7월 함혜의원(咸惠醫院)을 개업했다. 1925년 6월 함혜의원장으로 있으면서 노동동무회 소속 무산자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찰해주고 약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한편, 그해 8월 13일 함흥 지역에 대홍수가 일어나자 3일간 수재민 50여명을 수용해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제공하고 무료로 진찰해주기도 하는 등 여러 미담을 남겼다.

그러나 1929년 1월 14일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별세했다. 1993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개벽 제54호(1924년 12월 1일)에는 咸台鴻으로 기재되어 있다.[2] 칠봉공파 52세 태(泰) 항렬.[3] 함씨대동보 권6 1231쪽에는 189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1919년 4월 30일 예심 신문조서에는 함흥군 주지면이 출생지, 함흥군 주서면 오리는 본적지로 되어 있다.[5] 함씨대동보 권6 1231쪽에는 1월 13일,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2월 2일에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29년 2월 14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함태홍이 쇼와 4년(1929) 1월 14일 사망으로 의사면허증이 반납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따른다.[6] 현재 보신각이 있는 종각역 부근, 종로1가 사거리를 말한다.[7] 면허번호 5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