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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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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초대 황제
경종 | 景宗
파일:경종(서하).jpg
묘호 경종(景宗)
시호 무열황제(武烈皇帝)
존호 세조 시문본무흥법건예인효황제
(世祖始文本武興法建禮仁孝皇帝)[1]
성무황제(成武皇帝)[2]
연호 현도(顯道, 1032년 ~ 1034년 6월)
개운(開運, 1034년 7월)
대경(大慶, 1034년 8월~ 1036년)
광운(廣運, 1036년 12월~ 1038년 9월)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 1038년 10월 ~ 1048년)
성씨 <colbgcolor=#59412c> 탕구트어 외명(嵬名)[3]
중국어 이(李) → 조(趙) → 이(李)[4]
탕구트어 외매(嵬埋)[5] → 낭소(曩霄)[6]
중국어 원호(元昊)
신장 5척(158cm) 이상[7]
부황 태종(太宗) 이덕명(李德明)
생몰기간 1003년 6월 7일 ~ 1048년 1월 19일 (44세)
재위기간 1038년 11월 10일 ~ 1048년 1월 19일 (9년 3개월)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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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하의 초대 황제.

묘호는 경종(景宗)이었으며, 시호는 무열황제(武烈[8]皇帝)였다. 치세 중에는 '성무황제'(成武皇帝)로 자칭했으며, 송인종과 '경력의 화의'를 맺은 뒤에는 북송에 대해 칭신했지만, 북송에서는 평화 유지를 위해 의례적으로 성무황제로 불러주었다. 조부는 이계천이었다.

2. 생애

원래 티베트계 강족의 한 갈래였던 탕구트족의 인물로, 당나라에서 정난절도사와 하국공(夏國公) 및 이씨 성을 하사받은 이사공(李思恭)[9]의 후손이었다. 이원호의 외모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동그란 얼굴과 높은 코를 가지고 있었고, 키가 5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10]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덕명이 승하한 이후 그의 왕작[11]을 이어받아 하국왕이 되었으며, 이후 탕구트족을 통합하는 등 국력을 신장시켰다. 1038년에 칭제건원하여 국명을 대하(大夏)로 하고 수도를 흥경부로 정했다. 경종은 재위 초부터 북송과 전쟁을 벌여, 칭신을 조건으로 막대한 공물을 뜯어냈으며(1044년, 경력의 화의), 관영 무역장에서 자유로운 무역을 허가받아 신생 국가인 서하의 국부를 크게 증대시키는 위업을 이룩했다. 이에 멈추지 않고 난주와 오르도스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간쑤성 서부의 독립세력이었던 절도사들도 평정하여 서하에 복속시켰다. 또한 토번까지 영토를 넓혔다.

한편 경종은 한족 인재들을 많이 등용하여 서하의 정치적, 행정적 기틀을 마련했으며, 한자 서적들을 탕구트어로 번역하여 문화의 진흥에 힘쓰기도 했다. 또한, 고유의 서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하여 자주적인 민족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에 지나치게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여 탕구트족 고유의 유목적인 삶을 장려하고 북송의 사치품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무엇보다도 말년에는 후계문제와 관련하여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외척의 세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먼저 황태자 이명(李明)[12]을 처형했으며, 이어서 동생인 이가(李哥)를 태자로 책봉했다.[13] 그 동생으로 이석리(李锡狸)가 있었으나 요절했다. 이후 태자 이가의 모후인 헌성황후 야리씨(憲成皇后 野利氏)를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선목혜문황후 몰장씨(宣穆惠文皇后 沒藏氏)는 오빠인 국상 몰장와방(沒藏訛龐)과 모의하여 그녀의 소생인 막내 이양조(李諒祚)를 태자로 만들고자 헌성황후의 소생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경종은 태자비 몰이씨(没移氏)를 빼앗아 황후로 봉했고[14] 이에 분노한 태자 이가는 자신의 외가인 야리씨 및 그를 부추긴 몰장씨와 결탁하여 경종을 시해한 후 제위를 본인이 계승하고자 했다.[15] 1048년 태자 이가는 외가 친척인 야리낭렬(野利浪烈)과 함께 만취한 상태의 부황 경종을 습격했으나 야리낭렬은 시위들에게 살해되었고, 경종의 코를 베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음날 경종 역시 상처로 인해 붕어했고, 이에 태자 이가는 결탁한 내용에 따라 몰장씨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나, 몰장와방은 그를 배신하여 헌성황후 야리씨와 함께 처형했다.[16] 이에 결국 어린 나이의 막내아들인 이양조가 뒤를 이어 서하의 제2대 황제인 의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3. 둘러보기


하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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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위 중 자칭.[2] 경종이 재위 중 자칭했다. 북송 인종경력의 화의를 맺어 칭신한 뒤에도 북송에서는 의례적으로 경종을 성무황제로 불러주었다. 이를 반영해 중국에서 제작한 <신탐포청천>에서 송인종이 경종을 보고, 서하의 성무황제 아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3] 북송으로부터 국성인 조(趙)씨를 하사받기도 했으나 버리고, 탕구트식인 외명씨를 칭했다. 조상이 선비족 탁발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탁발씨로 취급되어 이름이 탁발원호(拓跋元昊)로 기재되기도 했다.[4] 상기했다시피 북송으로부터 국성인 조씨를 하사받아 이름이 조원호(趙元昊)로 불리기도 했으나, 곧이어 성씨와 이름을 모두 탕구트식으로 바꾼 걸로 봐선 본인은 그렇게 중국 문화를 선호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치세 이후 서하는 급격히 한화되었으며, 황실에서도 한자식 성씨인 이씨와 한자식 이름이 굳어지게 되었다.[5] 처음 태어났을 때의 이름. 탕구트어로 귀하고 부유하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6] 다른 표기로는 낭녕(曩甯), 낭저(曩宁)가 있다.[7] 출처 역사서에 따르면 키(身高)가 5척(五尺)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 주로 창업군주에게 쓰이던 시호였다. 손견의 경우, 동오의 창업자 자격으로 저 시호를 받고, 천자로 추존되었으며, 김춘추의 경우도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는 이유 때문에 저 시호를 받은 국왕이 되었다.[9] 초명: 탁발사공(拓跋思恭).[10] 당시 북송의 척 단위인 31.68cm로 계산하면 158cm를 넘는 키가 된다.[11] 이덕명은 부친인 이계천과 마찬가지로 북송과 요나라로부터 각각 '서평왕'과 '하국왕'에 봉해진 바 있었다.[12] 영명(寧明)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영'(寧)은 서하에서 제후왕에 해당하는 작위였고, 따라서 본명은 (明)이었다.[13] 영령가(寧令哥) 혹은 영림격(寧林格)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영령'(寧令)은 서하에서 제후왕에 해당하는 작위였고, 따라서 본명은 (哥)였다. 또한 '영령'이 '영'보다 더 높은 작위에 해당했다.[14] 몰이씨는 아직 태자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관계가 아니었는데, 이때 몰장와방이 몰이씨를 빨리 빼앗도록 경종을 부추겼다는 설이 있다.[15] 참고로 선목혜문황후 몰장씨는 원래 대신이었던 야리우걸(野利遇乞)의 아내로 경종이 야리우걸을 죽인 뒤 야리우걸의 조카였던 헌성황후 야리씨의 요청으로 황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선목혜문황후 몰장씨는 경종과 사통하게 되었고, 이에 헌성황후 야리씨는 그녀를 강제로 계단사(戒壇寺)에 출가시켰는데 거기서 그녀는 '몰장대사'(沒藏大師)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경종은 절에 찾아가 여전히 몰장씨와의 밀회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이양조가 태어나게 되었다.[16] 중국에서 제작한 <신탐포청천>에서는 이를 반영해서인지 제위를 노리고 양양왕과 모의하여, 부황인 경종을 죽이려고 했으나 포증에 의해 무산되고 처형된다. 실제 역사와는 반대로 경종은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