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04:41:03

프루시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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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 왕국 7대 군주
Προυσίας | 프루시아스 2세
파일:프루시아스 2세.jpg
제호 한국어 프루시아스 2세
그리스어 Προυσίας
영어 Prusias II
존호 바실레프스
별명 키네구스(Cynegus: 사냥꾼)
생몰 년도 기원전 220년 ~ 기원전 149년
재위 기간 기원전 182년 ~ 기원전 149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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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티니아 왕국 7대 군주.

2. 생애

기원전 220년경 비티니아 왕국 제6대 군주 프루시아스 1세안티고노스 왕조 4대 국왕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의 딸 아파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기원전 18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고,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1세의 위협에 맞서 페르가몬 왕국에우메네스 2세, 카파도키아 왕국아리아라테스 4세와 힘을 힘을 합쳐 전쟁을 벌인 끝에 기원전 179년 파르나케스 1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 배상금을 받아냈다. 기원전 177년 안티고노스 왕조 마지막 국왕 페르세우스의 누이 아파마와 결혼했다.

기원전 168년 페르세우스가 피드나 전투에서 참패한 뒤 로마군에 항복한 후, 그는 축하를 전하기 위해 로마를 공식 방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 원로원 뜰에 도착했을 때 머리를 자리고 흰 옷과 모자를 쓰고 해방노예가 입던 옷을 입고 있었으며, 문지방에 서서 의원들에게 절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그가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않고 로마에게 굴종하는 모습을 취했다며, 이로 인해 비티니아가 로마에 예속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아피아노스 역시 로마의 관용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굴욕적인 행보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기원전 164년, 그와 로도스, 아카이아 동맹의 사절들이 로마를 방문했다. 그들은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가 자기들의 영토 일부를 빼앗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로마는 과거에 자신들을 성심껏 도와 마그네시아 전투 승리에 크게 일조했던 에우메네스 2세를 당장은 비난하지 않았지만, 배신 가능성을 고려했다. 이에 에우메네스 2세의 동생 아탈로스 2세가 형을 위해 변호했고, 원로원은 에우메네스 2세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기원전 159년에도 그와 갈라티아가 로마에 에우메네스 2세를 고발했지만, 아탈로스 2세가 형을 재차 변호해서 무위로 돌아갔다.

기원전 156년, 그는 페르가몬 왕국을 전격 침공하여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탈로스 2세를 물리친 뒤 니케포리움으로 진격해 많은 성역을 파괴하고 아스클레피오스 동상을 비롯한 청동 및 대리석 조각상을 노획했다. 이후 엘라리아로 진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뒤이어 아르테미스 신전을 약탈한 뒤 두아테이라로 후퇴해 그곳에 있던 아폴론 신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비티니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이질에 시달려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폴리비오스는 신전을 모욕한 것에 분노한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탈로스는 동생 아테나이오스를 로마로 보내 원로원에 비티니아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로마는 비티니아에 사절을 보내 페르가몬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기원전 155년 페르가몬과 카파도키아를 침략했다. 이에 분노한 원로원은 10명의 사절을 재차 비티니아에 보내 전쟁을 끝내고 아탈로스에게 피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아탈로스는 비티니아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5세,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4세와 연합해 대규모 병력을 구축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10명의 사절들이 페르가몬 편만 든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로마는 비티니아와의 동맹을 파기하기로 했다.

원로원은 아탈로스 2세에게 일단 공격하지 말고 국경의 방어를 강화하고 있으라고 권한 뒤,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트릐 여러 지역에 전령을 위해 비티니아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권고했다. 이와 동시에, 아테네는 80척의 함대를 파견하여 비티니아 편에 있던 헬레스폰트 일대 도시들을 파괴했다. 이제 로마와의 전쟁이 임박하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협상을 제안했다. 원로원은 아탈로스와 그에게 평화 협약을 동시에 제의했다. 여기에는 그가 아탈로스에게 20척의 배를 헌납하고 20년간 500달란트를 지불하며,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그는 피해를 입힌 도시들에 100달란트를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양자는 이에 동의했고, 비티니아와 페르가몬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는 아들 니코메데스가 민중과 신하들로부터 인망을 사고 있는 걸 경계하여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자, 기원전 151년 로마에 메나스를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페르가몬에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을 줄여달라고 청원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니코메데스를 암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1차 목표인 배상금 삭감은 아탈로스 2세가 파견한 안드로니코스가 로마의 배상금이 그가 과거에 노획한 전리품보다 많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메나스는 니코메데스를 암살하려 했지만, 그가 현명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는 걸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차마 죽일 수 없었다. 니코메데스는 나중에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감지하고 안드로니코스와 논의한 끝에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니코메데스는 왕권을 상징하는 보라색 의복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쓴 채 병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메나스의 병사 2,000명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메나스는 부하들에게 폭정을 일삼는 왕을 폐위하고 로마와 페르가몬의 승인을 받은 니코메데스를 새 왕으로 추대하자고 설득했고, 2,000 장병 모두가 동의했다. 기원전 149년, 아탈로스 2세는 페르가몬에 찾아온 니코메데스를 환대해주고 프루시아스 2세에게 아들을 인정해주고 특정 도시와 땅을 주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분노하여 자기 땅을 줄 바에 아탈로스 2세의 왕국 전체를 아들에게 주겠다고 답했다. 아탈로스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니코메데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비티니아를 공격했다.

비티니아 주민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귀순했고, 그는 부하 500명만 이끌고 니케아 요새에 숨은 채 로마가 개입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로마는 아탈로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기에,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권고만 할 뿐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니코메디아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려 했다가 그곳 주민들이 성문을 열고 귀순하자 제우스 신전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니코메데스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아들 니코메데스가 니코메데스 2세를 칭하며 비티니아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