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 상세사항, 현황 등에 관해서는 공국진의 블로그를 참조할 것.2. 역도산과 일본 프로레슬링 (1950년대 - 1972년)
1800년대 후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에도 일본인 프로레슬러들이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활동했으며[1], 1920년에는 일본 최초의 프로레슬링 단체[2]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 프로레슬링은 크게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북미에서는 "프로레스(Puroresu)"로 불리기도 하는 일본 특유의 프로레슬링[3]의 기초를 만든 것은 상투를 자르고 폐업한 전직 스모 역사인 모모타 미츠히로, 익히 알려진 재일교포 출신 역도산이다. 전설에 따르면 역도산은 우연히 만난 일본계 미국인 프로레슬러 해롤드 사카다와 술집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모모타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 해롤드 사카다에 의해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게 된다. 하와이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얻은 인맥을 이용해 미국의 프로레슬링 연합인 NWA 프로모터 자격을 얻은 역도산은 일본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단체인 일본 프로레슬링(Japan Pro Wrestling Alliance; JWA)을 설립하며, 마찬가지로 인맥을 통해 섭외한 서양의 레슬러들을 초청해 격파하는 다분히 국뽕기 가득한(...) 경기를 보여주며 대히트를 치게 된다.[4]결과적으로 역도산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었는데, 영화에서처럼 일본 황족이 그의 스파링을 구경하러 올 정도였으니 가히 국민적인 영웅이라고 할 만한 대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역도산 개인의 폭력적이고 충동적이며, 다른 이를 믿지 못해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려 하던 성격 때문에 일본 프로레슬링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역도산이
3. 신일본과 전일본 : 프로레슬링의 황금기 (1972년-1990년대)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이후 때론 협력하고 때론 경쟁하면서 일본 프로레슬링의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신일본은 이노키라는 대스타를 앞세워 괴물 외인들을 물리치는 동시에 무규칙 경기를 벌여 프로레슬링의 강함을 전달하면서 다양한 로스터와 섭외력을 발휘해 대진의 다양성 등으로 팬들을 불러모았고,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더욱 극적이고 흥미로운 정통 프로레슬링 경기를 팬들에게 선사하며 나란히 개가를 올린다. 양자의 노선 차이는 후대의 팬들에게 스트롱 스타일과 왕도 스타일로 불리게 된다.[10]신일본은 일본의 메이저 단체 중 처음으로 경량급[11]의 가치에 눈을 뜬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제2대 IWGP 헤비급 챔피언인 후지나미 타츠미는 경량급에서 활동하다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중량급으로 올라간 선수이며, 전설적인 초대 타이거 마스크 사야마 사토루가 다이너마이트 키드와 경이로운 명경기를 뽑아낸 것도 신일본이다. 경량급의 리빙 레전드인
더불어 단체들의 색 또한 점차 넓어지기 시작해 신일본에서는 일련의 선수들이 탈퇴하여 UWF를 설립함으로써 일본 종합격투기의 원류를 형성하였고, 1990년대부터는 전일본 출신의 오니타 아츠시 등이 기존의 메이저 단체와는 방향성을 달리하는 인디 프로레슬링을 이끔으로써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울러 북미권에서는 이른바 "Joshi Puroresu"라고 불리는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 또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흔히 '전녀'라고 부르는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이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킨 덕분에 많을 경우엔 연간 300회가 넘는 흥행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를 통틀어 연간 최다 흥행 기록이다. 90년대 초반 WWF에서 전녀의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 전녀의 흥행 시기를 카피하려 시도했었을 정도..
안토니오 이노키의 실각[12] 이후에도 신일본은 이노키의 바로 다음 세대인 후지나미 타츠미와 초슈 리키를 앞세워 안정적으로 흥행을 이끌어나갔으며, 바로 그 이후의 세대인 투혼삼총사의 등장으로 1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간 다음 새로운 세대 교체가 필요해질 무렵 이노키를 등에 업은 오가와 나오야[13]와 투혼삼총사의 하시모토 신야가 극도로 투기화된, 프로레슬링 팬이 쉽게 납득하기 힘든 거친 경기를 벌이며 심지어 정통 레슬러인 하시모토가 압도적인 열세로 패배하고 만다. 신일본 내부에서는 정통 프로레슬링 세력과 이노키즘[14][15]종합하긴 했지만 격투기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세력의 내부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점보 츠루타와 텐류 겐이치로, 그리고 화려하고 강력한 외인 용병들을 기용해 경기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왕도 프로레슬링을 피력하며 순항해 간다.[16] 세대교체 또한 마스크를 벗어 던진 미사와 미츠하루가 점보 츠루타와 스탠 핸슨을 격파하며 초세대군의 기수로 나서면서 연착륙에 성공한다. 미사와 미츠하루, 코바시 켄타, 카와다 토시아키, 타우에 아키라의 이른바 전일본 사천왕은 시대를 대표하는 명 레슬러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 네 명과 뒤늦게 합류한 무서운 후배 아키야마 준이 포함된 오강(五强)이 군림하던 시기 전일본은 정신 나간 듯한 명경기를 정말 밥 먹듯이 뽑아내며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시기 데이브 멜처는 정말 일뽕이라도 맞은 듯이(...) 오강들에게 별점을 퍼주면서 최고의 레슬러들로 추켜세워줬는데, 이 시기 전일본의 경기력은 북미 단체와 비교하자면 한 차원이 아니라 몇 차원은 다른 수준이었기 때문에...[17] 그러나 이 시기에 경기의 품질과는 별개로 전일본의 흥행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는 오강에게 너무 의존한 나머지 대진이 경직되고 경기가 점차 매니악해졌기 때문이다.
4. 프로레슬링 NOAH 탄생, 그리고 프로레슬링의 위기 (2000년대)
그러나 바바 사후, 전일본의 명성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만다. 새로이 사장이 된 미사와는 진정한 실세였던 바바 모토코[18]와의 갈등 끝에 전일본을 이탈하고 말았고, 그 미사와의 두터운 인망을 따라 전일본 오강 중 네 명이 따라나오면서[19][20] 그 외에 준 메인, 미드카더들이 모조리 따라나오는 바람에 그야말로 기둥 뿌리가 뽑히고 만다(...). 이에 대해서는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의 1차 이탈사건을 참고할 것.[21]이후 미사와는 새로운 단체 프로레슬링 NOAH를 개양하며 위풍당당하게 새출발을 시작했고, 전일본 시절의 왕도 레슬링을 그대로 계승하여 단체 개양 4년만에 도쿄돔 흥행을 성공시키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다.[22]
한편 신일본이 지나치게 실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단체의 에이스이자 투혼 삼총사 무토 케이지는 위기감을 느낀다. 화려하고 과장되면서 에너지가 넘치는, 전형적인 프로레슬링이 특기였던 무토에게[23] 단체의 투기화는 굉장히 불편한 것이었고, 이노키를 등에 업은 후지타 카즈유키 등의 격투가들이 차츰 이기는 부킹을 받으며 단체를 잠식해나가자 불만을 품고 신일본을 탈단하게 된다. 탈단한 무토는 미사와가 이탈하여 공석이 된 전일본의 사장이 되어 팬들을 충격에 빠트렸으며, 기존 전일본의 색과는 다른 본인의 화려하고 즐거운 프로레슬링을 전일본에 도입하여 팬들의 비난에도 직면하곤 했지만, 꿋꿋하게 기둥 뿌리부터 들려버린 전일본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스와마나 타이요 케아 등을 본궤도에 올리면서 단체를 어느 정도 살려내는 데 성공했으니 무토의 능력을 의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오가와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한 하시모토 또한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 또한 끝끝내 신일본을 탈단하고 자신의 단체 "Zero-1"을 설립하는데, 타 단체와의 활발한 교류,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오가와와의 태그팀인 "OH포" 등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려는 찰나 하시모토 신야 본인이 요절하면서 단체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격투기와의 연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시기 하시모토의 요절, 무토의 이탈로 인해 얼굴을 잃어버린 신일본은 실전에서도 강하다고 ‘’’알려진’’’ 나가타 유지를 단체의 원톱으로 내세워 IWGP 10회 연속 방어[24]라는 무지막지한 위업을 챙겨주었으며, 그 나가타에게 타이틀을 뺏어 온 것은 마찬가지로 격투기를 병행하던 타카야마 요시히로였다. 혼돈은 계속되는 와중에 격투기 무대에서 얻어걸린 승리를 챙긴 평범하고 개성 없는 미드카더 야스다 타다오가 IWGP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가, 밥 샙이 챔피언이 되었다가, 후지타 카즈유키가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텐잔을 1분여만에 초살하고 벨트를 뺏어온다던가, 그야말로 점입가경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 시기 NOAH는 전일본에서 하던 것처럼(...) 별 4~5개 경기를 무슨 틀로 찍어내듯이 줄줄 뽑아내고 있었으니, 신일본의 인기가 막장까지 치달아가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
세대 교체를 위해 내세운 신(新) 투혼삼총사도 문제가 많았다. 타나하시 히로시는 무토 케이지의 빈자리를 채울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경험이 일천하여 눈이 썩는 경기만 줄줄이 뽑아내고 있었고(...) 그나마도 정통 프로레슬러라는 이유로 격투기 스타일의 나카무라 신스케의 후순위였기 때문에 성장이 정체되어 있었다. 나카무라는 지금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정통 노력파 청년 캐릭터에 나쎄 뺨치는 파워 푸시를 받는 주제에 경기는 눈썩(...) 설상가상 시바타 카츠요리는 아예 격투기하겠다고 탈단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프로레슬러들은 높아진 격투 무대의 수준에 연전연패하기 시작했고, 타이틀 10연속 방어에 빛나는 나가타 유지는 하이 레벨의 격투가들에게 그야말로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으며 위신을 구기고 말았다. 그야말로 개판. 이 시기 신일본은 그야말로 미래가 없는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NOAH 또한 불안한 상황. 전일본 오강 출신의 메인 이벤터들은 80년대 말부터 풀타임으로 몸을 혹사했는데, 그 반동으로 빠르게 오강들의 노쇠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가장 연장자였던 타우에는 무릎과 목이 너덜너덜했으며, 미사와 또한 전신이 성한 곳이 없었다. 코바시는 70대 노인의 무릎이라는 충격적인 판정을 받으면서 암까지 발병하고, 아키야마는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그 상황에서 후계주자로 밀었던 리키오와 모리시마는 선배들의 카리스마와 경기력에 범접할 수 없었기에 세대 교체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주니어급인 마루후지와 KENTA, 스기우라가 두각을 드러내는 상황. 아무리 중량급과 경량급의 경계가 옅어졌다고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철저하게 헤비급 위주로 돌아가는 업계이며, 이들을 억지로 중량급 무대에서 활동하게 한 NOAH는 아무래도 무게감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25]
그 와중에 예전의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레슬링을 찾던 팬들은 미국에 눈을 돌려 WWE가 일본 레슬링의 부진을 틈타 인기를 끌고, 프라이드에서 축출된 타카다 노부히코는 뜬금없이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내용을 담은 자서전을 내놓고 어그로를 끌더니, 그 어그로를 기믹으로 만든 악역 레슬러 타카다 총통(...)이 되어 극 엔터테인먼트 지향의 레슬링 단체 HUSTLE-1을 창립한다. 이 단체는 당시 인기를 끌던 개그맨 레이저라몬 HG를 영입해 프로레슬러로 써먹으며, 기존의 진지함으로 가득 찬 카리스마적인 레슬러들에게 약이라도 빤 듯한 괴상한 기믹을 부여해가며 나름 흥행에서 선전한다.[26][27]
그 와중에 미사와가 경기 중 사고로 목숨을 잃자, NOAH는 성장 동력을 잃고 정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타우에가 NOAH의 신임 사장으로 취임하였지만, 이후 내부의 부조리로 인한 갈등으로 인해 아키야마 준을 비롯한 몇몇 선수가 고향인 전일본으로 이적하는 탈단 사건이 다시 한 번 발생하게 된다.
5. 일본 프로레슬링의 부활 (2010년대 ~)
여기서 일본 프로레슬링 업계의 구원자로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부시로드다.[28] 카드게임 만드는 회사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인수하자 여기저기서 불안감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으나, 놀랍게도 부시로드는 대단한 수완을 발휘해 신일본을 제대로 된 프로레슬링 단체로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이미 오래전에 격투기와의 관계를 끊고 타나하시에게 본격적인 나쎄 푸시를 주며 구색을 갖추어가는 상황이었지만, 부시로드의 마케팅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단체로 전락했을 신일본을 말 그대로 구원한 것.이러한 흐름은 역도산,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에서부터 내려온 선수 중심의 경영이 주가 된 일본 프로레슬링 계의 오랜 전통에 역행하는 것이었고, 또한 이런 현대화 과정에서 역도산 이래 내려온 일본 프로레스의 악습인 구타 및 각종 부조리 문제들이 상당부분 극복되었다고 전해진다.[29]
부시로드는 이어 NOAH과 협조하여 신일본의 스즈키군을 침공시키는 스토리를 진행해 망해가는 NOAH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었으며, 은퇴한 코바시를 동원해 "미사와가 살아서 이 광경을 봤으면 땅을 치고 울 것이다"라며 NOAH의 골수팬을 자극하는 스토리라인을 진행한 바 있다.[30]
2010년대의 신일본은 세계 전체를 둘러봤을 때 WWE에 이은 업계 2위로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으로[31][32], 쌓인 관록과 카리스마에 절정의 경기력을 과시하는 에이스 타나하시 히로시를 필두로,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나카무라 신스케, 카리스마적인 뉴 페이스 오카다 카즈치카, 그리고 북미 출신의 레슬러들의 팩션인 불릿 클럽[33]등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그야말로 명경기를 쏟아내며 연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소속 프로레슬러들의 적극적인 예능 출연 등으로 인지도를 올린 덕분에 흥행력 또한 불이 붙고 이젠 일본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상황. 2017년에는 오카다 카즈치카가 PWI 선정 그 해 최고의 레슬러로 뽑혔으며[34], 그 다음 해인 2018년에도 역시 신일본에서 주로 활동중인 케니 오메가가 그 해 최고의 레슬러로 뽑히기도 했다. ROH와의 협력을 통해 신일본 출신의 레슬러가 ROH에 게스트 출연하기도 했고, 올인 흥행에도 협력했다.
더불어 전일본 또한 바닥을 찍고 난뒤 아키야마 준 사장 체제 하에 점점 정비되어 에이스 미야하라 켄토를 중심으로 다시 조금씩 성장을 해나가고 있다.
다만 미국에서 AEW가 생기고 나서는 비 WWE계열의 역량을 빨아들이고 있어서 현재는 신일본도 어느 정도 정체하고 있는 상황이다.[35] 현재 신 투혼 삼총사 중 타나하시는 사장이 되면서 사실상 현장에서는 은퇴한 거나 다름없으며 나카무라 신스케는 진작에 WWE에 진출한 상황이고, 오카다는 상술한 대로 AEW로 건너갔다. 그에 비해 2020년대 신일본은 신인들이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 한 상황이다보니 부상병동인 나이토 테츠야에게 모든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중이다.[36]
[1] 최초로 확인된 미국 활동 프로레슬러로는 마츠다 소라키치라는 선수가 있다. #[2] 대일본 프로레슬링 보급회.[3] 그래서 프로레스(PURORESU)는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지만, 미국에서는 일본식 프로레슬링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따라서 위키백과 영문판에는 Professional Wrestling과 Puroresu가 별도의 문서로 있으며, 영어판 Puroresu 문서에서 다른 언어 보기(일본어)로 가면 プロレス(프로레스) 문서로 연결되고 プロレス 문서에서 다른 언어 보기(영어)로 가면 Professional Wrestling 문서로 연결되는 웃기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Puroresu 문서에 일본어판은 따로 없다. プロレス(Professional Wrestling) 항목에서 같이 설명하기에...[4] 국뽕이라는 장난스러운 표현을 사용했지만, 실제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인해 패배주의로 충만해있던 20세기 중반의 일본인들에게 역도산의 퍼포먼스는 각별한 것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못 살고 힘들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김일의 박치기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5] 단, 역도산의 사망과 김일의 전권 위임에는 적지 않은 시차가 있다. 원래 밀입국을 통해 일본땅을 밟아, 역도산의 신분보증으로 인해 일본에서 체류할 수 있었던 김일은 역도산의 사망과 동시에 "불법체류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입국을 금지당했으며, 당시 이미 한국에서 활약을 시작했기 때문에 몇 년간은 그 상태로 고향 단체가 쓸쓸하게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뒤늦게 제한이 풀리고 김일이 일본에 입국하여 단체를 계승한 시점은 이미 대세가 넘어간 이후였다.[6] 사실 역도산 사후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의 전권을 이어받은 후계자는 '토요노보리'라는 자였는데 이 자는 역도산의 수제자였긴 했지만 심각할 정도로 도박 중독자였기 때문에 단체의 재산을 멋대로 탕진하고 나서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서 쫒겨났고 이후에는 도쿄 프로레슬링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안토니오 이노키를 데려갔다.(이노키가 토요노보리의 제안에 응한 건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서의 대우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 김일이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에 복귀한 건 이 이후 이야기이다.[7] 최종적으로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는 신일본과의 합병을 통해 단체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승이 남긴 유산을 신일본에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줄 수는 없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김일이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결국 단체는 해산이라는 방식으로 사라지게 된다.[8] 바꾸어 말하면 현재 한국 프로레슬링 주류 계파는 역도산으로부터 내려온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의 진짜 성골 계파이며, WWA 등의 초라한 한국 프로레슬링 단체가 카네모토 코지나 마루후지 나오미치 같은 거물들을 국내 흥행에 초청할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김일부터 다른 이도 아닌 안토니오 이노키를 국내 흥행에 초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9] 그리고 당연히 김일은 자기 스승인 역도산을 벤치마킹하여 자기 인맥으로 일본인 레슬러들을 데려와 한일전 경기를 해서 승리하는 퍼포먼스로 큰 인기를 끌었다.[10] 엄밀히 말하자면 왕도 스타일은 어느 정도 정의가 되는 용어이지만, 스트롱 스타일은 워낙에 중구난방으로 정의되는 용어라 양자가 명확하게 대립되는 명칭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11] 일본에서는 주니어 헤비급이라고 칭한다.[12] 횡령 혐의. 그러나 표면상일 뿐 이후로도 이노키는 신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3] 올림픽 유도 은메달 리스트, 프라이드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격투가이기도 하다. 단, 프로레슬링 데뷔가 먼저.[14] 말 그대로 프로레슬링이 실전에서도 최강이라는 판타지 사상이다. 2010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정말 코웃음밖에 안 나올 주장이라 할 수 있다.[15] 다만 이노키즘은 이노키가 현역일 시절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이는 어디까지나 이종격투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즉, 가라테나 복싱, 스모, 쿵푸, 권법가들과 프로레슬러의 격투를 상정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노키가 내세웠던 실전 경기도 이노키 vs 알리의 경기에서 보듯이 복서와 프로레슬러 간의 이종격투 경기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기반으로 시작했던 종합격투기가 대세가 되면서 수준이 올라갔고 오히려 베이스인 프로레슬링이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물론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은 웬만한 무술을[16] 원래 자이언트 바바는 미국에서도 꽤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고 이로 인해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주류였던 NWA의 프로모터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신일본보다도 격이 높은 자격이어서 더 유명한 선수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17] 바로 이 시절의 레슬링을 오마주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 초기의 ROH다. 팬들이 지독한 강성인 것도 물 건너 일본의 레슬링을 찾아볼 정도의 레슬링 매니아들이 팬베이스이기 때문이다.[18] 자이언트 바바의 부인.[19] 오강 중 카와다를 제외한 전원이었다. 왜 카와다만 전일본에 잔류했는지는 의문인데 사실 당시 미사와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 카와다였다.[20] 다만 아주 이해못할 일은 아닌 게, 카와다도 야망은 있어서 만약 미사와를 따라나섰다가는 영원히 2인자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만큼 1인자인 미사와의 벽은 견고했던 것. 거기다 미사와와 카와다는 고작 한 살 차이지만 그 뒤를 이었던 코바시는 미사와보다 5세 연하였으니 차기 에이스로 누가 더 적합할 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21] 원래 미사와는 직전제자라고 할 수 있는 마루후지 나오미치와 KENTA 정도만 데려올 생각이었으나 그를 흠모하던 전일본 내 선수들이 죄 따라나왔다.[22] 예나 지금이나 일본 프로레슬링 1위 업체는 신일본이었지만(전일본은 그 명성에 비해 중소 흥행이 주였기 때문. 반면 신일본은 대형 흥행을 자주 벌였다.) 2000년대에는 4천왕을 앞세운 NOAH가 치고 올라오면서 한동안 1위 단체에 등극하게 된다.[23] 그야말로 순수한 프로레슬링적인 재미를 추구하던 인물로 그가 창조한 기믹만 해도 본인이자 선역인 무토 케이지와 무토 케이지 자신이 마계에서 데려왔다는 악역 그레이트 무타가 있었는데 특히 그레이트 가부키를 벤치마킹한 그레이트 무타는 서양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높아서 이후의 일본계 프로레슬러들은 알게 모르게 무타의 영향을 받았고(페이스페인팅, 독무, 광기 등) 미국의 레슬러들에게도 영감을 주기도 했다.[24] 벨트를 만든 이노키 본인도 4회 연속 방어밖에 못해본, 엄청난 위업이다. 이후 이 기록은 타나하시 히로시가 11회 경신으로 깨졌다가 2018년 오카다 카즈치카가 12회 방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또 깨졌다. 12회 방어전 상대는 타이 기록 보유자이던 타나하시 히로시.[25] 사실 원래부터 NOAH는 오강을 제외하면 헤비급보다 주니어 쪽이 더 재미있었던 단체였다.[26] 특히 전일본에 끝끝내 남은 하드한 킬러 이미지의 사천왕 "데인저러스 K" 카와다 토시아키에게 변태스러운 옷을 입히고 "파라다이스 K"라는 기믹을 부여한 게 유명하다.[27] 하지만 결국은 처음의 동력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오래 못 가서 침몰하게 되었다.[28] 부시로드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인수한 이유는 부시로드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키다니 타카아키가 프로레슬링/격투기 팬이기 때문이었다.[29] 타나하시 히로시에 따르면 최소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경우 마카베 토우기가 악폐습을 끊었다고 한다. 타나하시 자서전 일부.[30] 사실 이 각본은 분명히 NOAH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준 건 맞지만 대신 NOAH를 확실하게 신일본보다 한 수 아래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31] 다만 AEW가 탄셍하고 난 뒤인 2020년대에는 업계 3위로 밀려났다. 신일본의 역량이 후퇴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시장 크기가 몇 배나 큰 미국 프로레슬링을 넘기는 어려웠으니...[32] 일본에서 제일 큰 신일본이라고 해도 일반 흥행은 천여 명 정도의 관객이 드는데 비해 미국 AEW에는 3~4천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오며, PPV급이라고 해도 일본에서는 5~7천명 정도 들어오는데 AEW는 10,000명을 훌쩍 넘게 들어온다. 넘사벽 WWE는 아예 일반적인 TV쇼에서 관객이 10,000여명 이상 들어올 정도고 거대 PLE에서는 5만명 이상이 들어오는 경우도 자주 있다.[33] 불릿 클럽의 리더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경기력을 소유한 선수들로 유명하다. 1대인 프린스 데빗도 그렇고, 2대인 AJ 스타일스는 북미 시절부터 이미 유명했으며, 3대인 케니 오메가는 2018년 PWI 선정 최고의 프로레슬러로 뽑히기도 했다. 여기에 비WWE계열 태그팀 중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 영 벅스까지 있다. 4대 리더인 제이 화이트는 아직 경력이 부족할때 리더가 되고 경기 스타일이 힐스타일이라 호불호가 갈렸으나 좋은 연기력을 바탕으로 비열한 악역 캐릭터를 정립시키면서 신일본을 대표하는 선수중 하나로 거듭나게 된다.[34] 이는 일본에서 활동중인 프로 레슬러로서는 최초다.[35] 일본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수들인 제이 화이트, 케니 오메가, 윌 오스프레이같은 특급 선수들이 AEW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의 정상급 선수인 오카다 카즈치카도 신일본을 탈퇴하고 AEW에서 활동하는 중이다. 또, 오랫동안 신일본에서 활동해온 타마 통가는 WWE로 이적할 예정이다.[36] 물론 우미노 쇼타, YOH, SHO, 그레이트 -O- 칸, 우에무라 유야, 츠지 요타 등이 영 라이온에서 벗어나 현재 신일본 주력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명도 IWGP 챔피언십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