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윈덤 Thomas Wyndham | |
생몰년도 | 1510년경 ~ 1554년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펠브리그 | |
사망지 | 베냉 앞바다 | |
아버지 | 토머스 윈덤 | |
어머니 | 엘리자베스 웬트워스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헨리, 성명 미상의 두 딸 | |
직위 | 잉글랜드 해군 제독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해군 제독. 거친 구혼 시기 잉글랜드 해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군과 맞섰다.2. 생애
1510년경 노퍽주 펠브리그에서 헨리 8세의 고문이자 기사단장이며, 잉글랜드 해군 중장을 역임한 토머스 윈덤과 제4대 디스펜서 남작 헨리 웬트워스의 딸이자 제인 시모어의 이모인 엘리자베스 웬트워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152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미성년자였던 그는 아버지의 유언 집행인인 서리 백작 토머스 하워드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루뱅 대하교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다.1536년부터 1540년까지 아일랜드 총독 토머스 크롬웰의 보좌관으로서 활동했다. 1539년에는 10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장으로 임명되어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에 반기를 든 현지 아일랜드인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540년 건강 악화로 잉글랜드로 돌아와 베드퍼드셔 칙샌드의 옛 수도원 영지를 받았다. 그의 해상 복무에 대한 최초의 알려진 사례는 1542년 북해에서 스코틀랜드와 교전하던 선박을 지휘했을 때였다. 1545년, 윈덤과 윌리엄 호킨스는 스페인 선박 산타 마리아 데 과들루프 호를 나포했다. 그러나 해적 행위로 기소되어 추밀원으로부터 스페인 측에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몇 년간 윈덤이 해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추가로 제기되었지만 재판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544년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잉글랜드군에 가담해 함대를 통솔하여 에든버러 방화에 관여했다. 1547년 12월 앤드류 더들리가 지휘하는 브로티 성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2척의 배를 던디로 항해했다. 그는 납탄을 제작하기 위해 교회 지붕을 털려고 페스 방향으로 타이 강변을 조사했다. 1547년 성탄절에 스코틀랜드 파이프주의 발메리노 수도원을 불태웠으며, 12월 29일에는 퍼스셔의 엘코 수도원을 불태웠다. 1548년 1월 앤드류 더들리와 앵거스 보인관 패트릭 그레이의 도움을 받아 던디의 세인트 메리 성당 첨탑에 대포와 총기를 든 수비대 20명을 배치했다. 한편, 그는 해딩턴에 "윈덤의 성채"로 불리는 포대를 건설했다. 1548년 6월 3일 제임스 윌스포드와 함께 달키스 궁전을 점령하고, 미래에 제임스 1세의 마지막 섭정이 될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를 생포하고 마을을 달키스 마을을 불태웠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퍼스 해협에서 외국 상선을 나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가 확보한 전리품에는 석탄 운반선, 밀가루, 피치, 목재를 실은 노르웨이 선박 7척, 프랑스 선박 4척, 그가 조카인 존 루트렐에게 준 작은 군함, 비누와 루비아 팅크토룸[1]을 실은 또 다른 선박 등이 포함되었다. 1550년 3월 29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평화 조약이 체결된 날, 윈덤은 브로티 공방전 이후 프랑스 측의 포로로 잡혀 있던 루트렐과 교환하기 위해 우편마 2마리와 스코틀랜드 인질 다섯 명과 함께 파견되었다.
1551년부터 모로코로 무역 항해를 ㅅ기작해 금, 강철,설탕, 과일, 그리고 노예를 싣고 돌아갔다. 1552년 카나리아 제도를 방문했다가 스페인 함선들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1553년 5월, 윈덤은 아프리카 서부 지역을 향한 해상 탐험에 착수했다. 그는 베냉에 도착한 뒤 그 나라 왕의 영접받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후추를 거래했다. 1554년 귀국길에 올랐다가 베냉 앞바다에서 동료들과 다투던 중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역시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두 딸과 그의 후계자가 된 아들 헨리 윈덤을 낳았다.
[1] Rubia tinctorum, 꼭두서니과에 속하는 초본 다년생 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