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루트렐 John Luttrell | |
생몰년도 | 1518년 또는 1519년 ~ 1551년 7월 10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던스터 성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던스터 성 | |
아버지 | 앤드류 루트렐 | |
어머니 | 마거릿 윈덤 | |
형제 | 존, 토머스 | |
배우자 | 메리 라이스 | |
자녀 | 캐서린, 도로시, 메리 | |
직위 | 던스터 남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남작, 군인. 거친 구혼 시기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가 프랑스군에 생포된 뒤,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을 때 풀려났다.2. 생애
서머셋주 던스터 성에서 앤드류 루트렐 경과 토머스 윈덤 경의 딸 마거릿 윈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남동생 존 루트렐과 삼촌 토머스 윈덤은 1527년 7월 프랑스 사절로 파견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집에서 소년 시종으로 일했다. 그는 그리피스 라이스 경과 캐서린 애지컴의 딸인 메리 라이스와 결혼해 세 딸 캐서린, 도로시, 메리를 낳았다.존은 거친 구혼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군사 원정의 초기 단계에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와 동행했으며, 에든버러와 리스 점령에도 참여했다. 그는 에든버러 방화 직후인 1544년 5월 11일 리스에서 하트퍼드 백작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1546년 전쟁이 장기화되자 하트퍼드 백작과 함께 프랑스로 간 뒤, 불로뉴 항구를 점령한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하트퍼드 백작 휘하에서 5개월간 1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습격전과 매복 공격 등 여러 작전을 수행했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서머셋 공작이자 새 국왕 에드워드 6세의 호국경으로 취임했다. 그 후 에드워드 시모어는 에드워드 6세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와 결혼시키려는 헨리 8세의 목표를 이루기로 마름 먹고, 이를 위해 원정을 재차 감행하기로 했다. 1547년 9월, 존은 서머셋 공작의 군대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진군하여 핑키 전투에서 선봉대 300명을 이끌고 스코틀랜드군과 격돌해 대승에 일조했다.
핑키 전투 이후, 존은 포스만에 있는 인치콤 수도원 섬에있는 잉글랜드 기지 사령관에 선임되었고,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선박들을 습격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47년 12월 28일 번티스랜드를 습격하고 부두에 있는 배와 건물을 불태웠으며, 로센드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1548년 3월, 인치콤을 비우고 테이 강과 던디 일대를 관리하는 브로티 성 수비대장에 선임되었다. 1548년 8월, 존은 자신이 왕실 자금을 잘못 관리했다는 소문에 곤혹스러워하며,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부유하지 않지만 국왕 폐하의 자금을 신민의 의무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549년 초, 존은 브로티에서 용병대 지휘관 페드로 데 네그로와 그의 수페인 군인 무리와 합세했다. 이후 1549년 3월 아가일 백작, 아솔 백작, 애롤 백작 등과 협상하여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고,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을 결혼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잉글랜드 위원 2명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무산되었다. 이후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서 브로티 공방전을 이끌었지만, 1550년 2월 12일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의 거센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 후 존은 브로티 공방전에 참여한 스코틀랜드 지주인 던로빈의 제임스 독의 집에 억류되었고, 그의 몸값은 1,000 파운드로 정해졌다. 1550년 3월 29일 불로뉴 조약이 체결되면서 거친 구혼이 종식되었을 때, 잉글랜드 측은 루트렐과 교환하기 위해 다섯 명의 스코틀랜드 인질을 보내기로 했다. 1550년 5월 16일, 루트렐의 몸값이 마련되어 일시적으로 풀려났다가 던디 상인 로버트 크레이그에게 빚을 졌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었지만, 아란 백작이 9월에 상인에게 돈을 대신 지불한 덕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스 이워스 작, <존 루트렐>
런던에 거주한 플랑드르 예술가 한스 이워스는 1550년 불로뉴 조약이 체결되면서 풀려난 것을 기념해 존 루트렐에 관한 우화적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은 존이 올리브 가지를 든 여성에서 주먹을 흔드는 모습을 묘사하며, 배경에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많은 학자들은 이 그림이 1550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평화 조약에 대한 존의 분노를 표현한 것으로 여긴다. 배경에 그려진 배는 그가 스코틀랜드 원정 중 한 번 지휘했던 '함부르크의 메리' 호일 것이다. 존의 오른쪽 팔찌에는 "Nec Fregit Lucrum 1550"이라고 적혀 있고 왼쪽 팔찌에는 "Nec Fingit Discrimen"이라고 적혀 있다. 첫 번째는 "이윤을 추구하지 마라"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차별하지 마라"라는 의미다. 두 문장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 명상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존은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서머셋 공작에게서 의회의 통제권을 탈취한 워릭 백작 존 더들리로부터 1550년 7월에 토지를 선물받았다. 1551년 7월 10일 삼촌 토머스 윈덤과 함께 모로코 원정을 준비하던 중 땀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세 딸은 그의 재산의 3분의 1을 공동 상속녀로 삼았고, 나머지 3분의 2는 두 명의 상속인과 존의 유언에 따라 그의 다음 동생 토머스 루트렐에게 상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