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월 1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태민성(太民性), 최치운(崔致云), 최경실(崔景實) |
본관 | 남원 태씨 |
출생 | 1905년 12월 5일 |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중향리[1] (現 함경북도 명천군 독포노동자구) | |
사망 | 1933년 8월 2일 (향년 27세) |
경기도 경성부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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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태극은 1905년 12월 5일,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중향리(현 명천군 독포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북간도로 이주했고, 1927년 11월 20일에 북간도 용정현 용정노동학원 내에서 열린 간도유학생회(間島留學生會) 임시대회에서 위원으로 선임되어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29년 11월 재(在)돈화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 당원이 되었고, 간부 강문수(姜文秀)로부터 국내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11월 하순에 국내로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임태호(林泰虎)를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종사할 것을 전했다.
이후 함경남도 원산부 관교동(현 강원도 원산시 평화동)에 주소지를 두고 최치운(崔致云)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원산노동연맹에 출입해 동지를 모집했다. 1930년 6월, 국내로 들어온 재돈화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 간부 오혁세(吳赫世)에게 그간의 경과를 보고한 그는 오혁세로부터 본부가 돈화에서 함흥부로 이전했으며, 그가 원산부 조직책임자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하지만 원산부에서 독자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기에는 기반이 약했던 그는 원산노동연맹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박태선(朴泰善)과 친교를 맺었고, 이주하(李舟河), 전균(全均), 김현제(金顯濟) 등과 함께 노동조합원의 의식 교양과 지도를 목적으로 한 동호회를 조직했다.
1931년 11월 20일, 태극은 박태선으로부터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시킬 청년들에게 러시아 입국 경로를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고 여비를 전달받은 뒤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경기도 경찰부에서 취조를 받았다. 1933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지만, 다음 날인 1933년 8월 2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태극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