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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pad> | |
| 출생 | 1966년 1월 4일 |
| 오스트리아 빈 | |
| 재임기간 | 제24대 연방총리 |
| 2016년 5월 17일 ~ 2017년 12월 18일 | |
| 소속 정당 |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
| 국적 | |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전 총리.2. 생애
2.1. 연방총리 시절
2014년부터 이미 베르너 파이만 총리의 후임자로 꾸준히 거론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2015년 한 시사주간지에서는 케른을 국민들의 총리라 칭하며, 케른이 이끌던 오스트리아 연방 철도를 난민 위기 속에서도 흠잡을 데 없이 작동한 유일한 국가 기관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이미지 덕분에 2016년 5월 9일 파이만이 총리직을 포함한 공직 일체에서 사임했을 때, 즉각 차기 총리 후보군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당내에서는 워너미디어 경영진 출신으로 비정치인 인사였던 게르하르트 차일러, 지멘스 임원 출신의 브리기테 에데러와 함께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5월 12일 당은 이견없이 만장일치로 케른을 차기 총리 후보로 추대했다. 5월 17일 하인츠 피셔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에 임명되었고, 6월 25일 예정된 당 대회에서 당수로도 선출될 예정이었다.
취임 직후 케른은 연립정부의 협력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사민당과 인민당 모두 정치적 무대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계속되는 난민 위기와 관련해 여성과 아이들을 비에 세워두지 않은 결정은 옳았지만 동시에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영인 출신이라는 이력덕에 원래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처럼 중도 노선을 따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으나 당 좌파 인사들을 새 내각에 기용하며 사회민주당의 전통적 진보 색채를 오히려 강하게 부각시켰다. 특히 난민 문제에서 친 난민 성향이 강했던 소냐 베젤리를 장관 후보로 지명하자 보수 성향의 인민당과 갈등이 깊어졌고, 정치 분석가 토마스 호퍼는 이를 인민당에 대한 작은 전쟁 선포라고 평가했다. 다만 베젤리는 결국 여론의 공격과 이로 인한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입각을 고사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오스트리아 협회 회장이었던 무나 두즈다르를 총리실 정무차관으로 임명했는데, 오스트리아 최초의 무슬림 인사가 되었으나, 과거 이스라엘에 비판적 발언 전력이 있었기에 유대인 공동체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스라엘에서는 케른이 이스라엘의 친구로 알려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인사가 “개방성의 신호”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같은 해 8월 튀르키예의 유럽연합 가입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곧바로 얼굴을 가리는 무슬림 베일 금지법과 이민 규제 강화 같은 보수적 법질서 정책을 시행해 사회적 균형을 맞추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