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45년 3월 21일 덴마크 보호령 코펜하겐에서 일어난 오폭사건.2. 게슈타포와 레지스탕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시기, 덴마크 보호령 내에서는 나치 독일에 맞서기 위해 레지스탕스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덴마크 국왕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아 자국 내 유대인들을 인근의 스웨덴으로 대피시키는 일을 했다. 하지만 게슈타포들이 이를 눈치 채기 시작, 레지스탕스와 전쟁이 심해졌고, 결국 1943년 8월 29일엔 나치 독일이 덴마크 전 영토를 접수하는데 이른다. 모든 지역에 게슈타포 본부가 세워지고 레지스탕스들이 체포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지스탕스는 뜻을 굽히지 않고, 게슈타포와 싸워나갔다.1944년 10월 7일, 레지스탕스 측은 영국군에게 게슈타포 본부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 이 중에는 민간인 거주지에 둘러싸여 있던 곳도 있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런 게슈타포 본부들을 공격해달라 영국군에게 요구했다. 영국군 측은 처음엔 민간인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들은 계속해서 부탁했고, 영국군은 이를 들어주기로 결정, 정찰 비행대로 사진과 정보를 입수해 이를 바탕으로 정밀 폭격을 연습하게 된다.
3. 폭격, 그리고 오폭
1944년 10월 31일, 4개 그룹으로 나뉜 영국 공군이 오르후스로 이동해 정밀폭격을 준비했다.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전투기를 P-51 머스탱이 지휘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게 저공비행을 하면서 나아가 목표지점에 도달, 첫 그룹이 폭격을 했다. 폭격엔 성공했다. 그리고 첫 폭격이 남긴 연기는 지표가 되어 계속해서 폭격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레지스탕스 일원들이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게슈타포 측의 피해가 더 컸고, 게슈타포가 크게 위축됨과 동시에 레지스탕스가 더 크게 성장하게 됐다.레지스탕스는 이에 힘입어 코펜하겐 쪽의 게슈타포 본부도 폭격해달라 요청했다. 영국군은 '이곳은 인구가 너무 많다.'며 거절했으나, 레지스탕스는 '게슈타포에게 살해당하느니 영국 공군의 폭격에 죽는 것이 더 낫다.'며 영국군을 설득했다. 설득에 못 이긴 영국군은 다시 폭격을 계획하게 된다. 위험성이 이전보다 더 컸기에 연습을 더 해야 했다.
1945년 3월 21일, 영국 공군이 이스턴 잉글랜드의 공군기지에서 3그룹으로 나뉘어 출발했다. 첫 그룹은 영국 공군 21 비행중대의 모스키토기 7대, 두번째 그룹은 464 비행중대의 호주 공군 모스키토 6대, 그리고 마지막 중대는 487 비행중대의 뉴질랜드 공군 모스키토기 7대와 영화 제작소 카메라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64 비행중대와 126 비행중대에서 머스탱 30대를 지원했다. 작전 명은 카르타고 작전이었다. 도중 몇몇 머스탱기는 기체에 이상을 보여 회항했다. 하지만 나머지 비행기들은 나아갔다. 게슈타포는 폭격을 피하려 레지스탕스 포로 26명을 건물 최상층에 감금한 상태였으나, 이들은 나치 독일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영국군 측에서 예상 못한 문제가 일어났다. 안개가 낮게 깔린 가운데, 첫번 째 그룹의 모스키토 비행기가 너무 낮게 나는 바람에 건물과 충돌하고 코펜하겐에서 다시 한번 충돌이 일어나면서, 어린이들이 대피해있던 잔다르크 학교에 추락했다. 사고로 모스키토 파일럿 2명이 사망했고, 추락에 휘말린 지상에서도 사망자가 나왔다.
문제는 여기서 더 커진다. 추락하면서 일어난 연기를 영국 공군 측에서 다른 비행기가 폭격하면서 남긴 연기로 착각했다. 두번째 그룹은 추락현장 위를 날아가며 학교에 폭격을 가했다. 세번 째 그룹이 오고, 이들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폭격을 중단했다. 하지만 폭격으로 이미 수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봤다.
오폭으로 인해 잔다르크 학교에서만 어린이 86명, 성인 19명이 사망했다. 그 외 지역에서 사망한 민간인 사망자 까지 전부 11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게슈타포 본부에 감금되어 있던 레지스탕스 일원 26명 중 8명도 사망했다. 18명은 폭격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간신히 탈출했다. 게슈타포 측에선 175명이 폭격에 당해 사망했다.
게슈타포 측에선 이를 눈치 채고 대공포로 응사하고 전투기를 출격 후 추격시켜 모스키토기 4대와 머스탱 2대를 추락시켰다. 파일럿 9명이 사망했고, 이 들 중 5명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4. 사건 이후
사건은 이후 안타깝게도 묻혀졌으나, 1953년이 되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코펜하겐 측에선 오폭에 휘말린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학교는 전쟁이 끝나고 철거됐다. 현재 학교가 있던 자리엔 6층 높이의 아파트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