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차돌 CHA DOL | |
출생 | 1984년 03월 16일 | |
죽음 | 2015년 7월 2일(31세)[1] | |
마번 | 1224320 | |
성별 | 거세(수입이전 거세) | |
털색 | 밤색 | |
아비 | MR. REDOY | |
어미 | HONEST'N DO RIGHT | |
성적 | 71전 26승 | |
총상금 | 108,359,170원 | |
주요 우승 | 일간스포츠배(1987) 무궁화배(1989) 한국마사회장배(1989) 그랑프리(1989) | |
상세 정보 | | HORSEP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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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경주마.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뚝섬 경마장 시절과 과천 경마장 개장 초기까지 활약한 경주마이며 연안부두에 이어 두번째로 한 해의 대상경주 3관왕을 달성했으며, 한국 최초의 대상경주 4승을 이루었다. 더불어 '홍대유' 조교사가 자가용 처럼 타고 경주에 임했던 말이면서 동시에 그가 가장 아끼던 말이기도 하다.2. 혈통
3. 생애
마국산 마필인 차돌은 1984년 03월 16일에 태어나 1986년 12월 4일 수입되어 차돌이란 마명을 부여받았다. 520㎏ 거구를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그 당시 몸집이 큰 말들은 성적을 못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조교사나 기수들은 대체로 차돌을 얕잡아 보았다.3.1. 뚝섬 경마장 시절
그리고 첫 경기인 1987년 2월 28일 데뷔전, 차돌은 최하위 말들로 편성된 1000m 경주에 첫 출전하여 행운의 1착은 했지만, 기록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리 3승을 함으로써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 15년 일간스포츠배 대상경주 대회까지 12전 8승을 올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때 차돌이 3살 정도였고 차돌의 기수였던 홍대유 기수는 당시 경력 2년의 신인이었다. 이 대회 우승 이후 차돌은 갈수록 막강해졌다.그러나 이후 경주 중 어깨에 운동기 질환이 생겨 달리기가 힘들었는지 경기장 펜스 쪽으로 파고 드려는 나쁜 습관으로 경기들에서 슬럼프를 겪었다. 여러 경기에서 아쉽게 순위권에 들지 못하는 게 컸고 1988년 그랑프리도 이런 슬럼프로 인해 중요한 경기에서 아쉬운 성적들을 낸 것이다.
1989년 경주마로서는 최고 전성기인 다섯 살이 되었다. 1월부터 출전하여 1착을 하고 2월, 3월, 4월, 내리 4승을 했다. 언론에선 차돌의 연승 행진을 크게 보도하며 5월 무궁화배 대상경주의 우승마로 점치고 있었다. 출발 신호와 함께 게이트가 열리고 차돌은 추입마였기에 다른 말들에 비해 조금 스타트가 느렸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4코너를 돌아 직선 주로에 접어들었을 때 홍대유는 외쳤다. "추격이다. 차돌, 달려! 달려라!" 차돌은 기수인 홍대유의 말을 알아들었다. 차돌은 놀라운 뒷심을 보여 주며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무궁화배 대상경주에서 우승한 후 차돌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3.2. 과천 경마장 시절
그러던 중 1989년 9월 1일 이전까지 쓰이던 뚝섬 경마장에서 과천 경마장으로 이전하며 경기의 진로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고 운동기 질환이 생기면 경주마로서의 수명이 짧아지는데 '차돌'에게는 행운의 기회가 찾아들었다. 그 동안 앓던 질환으로 인한 펜스쪽으로 파고드는 버릇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해 10월에 개최된 한국마사회장배 대상경주에서도 차돌은 폭발적인 힘으로 우승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차돌이 뛰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고 시원시원했던지 차돌이 뛰는 레이스만을 보러 온다는 팬도 늘어났다. 차돌은 정말 행복했다. 차돌은 한 해를 마감하는 그랑프리 대회를 대비해 맹훈련을 했다. 그러나 4관왕을 노리는 차돌에게는 너무나 큰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그랑프리 대회 개최 일자가 앞당겨지는 바람에 차돌은 일반경주에 출주한지 2주만에 바로 출주 할 수 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2] 게다가 잦은 우승으로 핸디캡이 적용되어 차돌의 부담 중량이 67kg으로 급증했고 홍대유 기수도 대회 전날 일반경주에 출전하여 다른 기수의 반칙으로 시속 60km로 달리던 낙마하여 최악의 컨디션에 처해 있었다. 낙마로 인해 기절했던 홍대유는 병원으로 실려 가던 중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기수 대기실로 되돌아왔다. 당시 박원선 조교사와 동료 기수들은 그랑프리 대회의 출전을 말릴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1989년 12월 11일 그랑프리 대상 경기가 시작되고 12필의 말들이 게이트가 열리자 무섭게 달려나갔다. 4코너를 돌아 관람대 앞 결승 직선 주로에 들어갈 때까지도 차돌 앞에는 서너 필의 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스타트는 느려도 결승 고지에 가까워질수록 가속도가 붙어 선입마들을 제치는 말이었다. 기수인 홍대유는 결승선으로 돌진하기 위해 최후의 채찍을 휘둘렀다. 차돌은 하나 둘, 앞서 가던 말들을 따돌리더니 2착마를 머리차(25~50cm)로 이기며 우승했다. 2착마는 '경주로의 여우'로 불리는 '김종온' 기수가 기승한 우승 예상마 '수평선'이었다.
홍대유 기수가 차돌을 타고 거둔 23승은 한 동안 깨지지 않다가 이후 차돌과 함께 과천 경마장 시대의 시작과 함께하였고 29승을 한 대견이 등장하기 전 까진 깨지지 않았으며 이 기록은 한 말이 한 기수를 태우고 달성했다는 점에서, 또 우승마에 대해 핸디캡을 적용하는 우리의 경마장 현실에서 대단한 업적이다. 차돌은 1989년 그랑프리 대상을 제패하면서 대상경주 4관왕에 등극했다. 홍대유 기수는 "지금도 차돌과의 이별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져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다"면서 속앓이를 한다.
그 해 그랑프리를 비롯해 대상경주를 3개나 휩쓸었다. 지금은 20개 이상되는 대상경주들이 있지만 당시는 연 7회밖에 없었던 시절로 대단한 기록이다.
3.3. 이후
서울경마장의 천하무적으로 불리기도 했던 차돌은 좋은 성적을 낼수록 68kg로 부담 중량이 늘어나 몸을 혹사당하고 있었다. 뚝섬경마장 시절의 명마 포경선도 12kg의 추가 부담중량을 짊어지고 뛰다가[3] 이후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기에 1승을 더 했다간 부담중량이 13kg로 늘어나기에 차돌을 다치게 할 것 같아서 홍대유 기수는 차돌에 대한 사랑 때문에 1990년 3월 25일 경주에서 무리하지 않으면서 2착으로 들어왔다. 다만 이후 조교사는 몹시 화를 냈다. 얼마 동안 조교사를 슬슬 피해 다녔던 일도 있었다.1990년 4월, 기수들에 대한 인사이동이 단행되어[4] 차돌은 홍 기수와 떨어지게 되어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와 헤어진 차돌은 전성기가 지나면서 먹구름이 다가왔다. 차돌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출전할 만큼 예전보다 활력을 잃었다. 마방에 서서 멍청하게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런 차돌의 신세가 안쓰러워 홍 기수는 가끔 차돌의 마구간으로 찾아갔다. 그때마다 차돌은 혀로 손을 핥거나 눈을 껌벅거리며 반가워했다.
차돌은 68kg이란 부담 중량을 짊어지고도 준우승하는 괴력을 과시했으나 말년엔 운동기 질환이 심해져 힘든 레이스를 계속하다가 차돌은 1994년 10월 1일 지난 94년10월 71전26승, 준우승 18회를 기록하고 은퇴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1993년 개인마주제가 시행되고 1994년 10월 6일 경 개인마주제 시행 이후 개인마주에게 분양되어 마방에서 방출되게 된다.
그 바람에 애마와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한 홍 기수는 전국 각지와 언론사에 차돌의 근황을 알기위해 찾아나섰고 그러던 1995년 3월 중순 어느 날, 차돌의 소재에 관한 제보 전화가 스포츠조선 '이규승' 기자에게 걸려 왔다. 경기도 용인군에 있는 승마장에서 차돌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찾아간 곳이 한국민속촌 뒤편의 '신갈승마장'이었다. 다만 아직 승마장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고 거기서 차돌을 발견하게 된다.
차돌도 그를 보곤 마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는 경마장에서 차돌에게 해주던 대로 손가락을 차돌의 입속에 넣어 주었고, 차돌도 손가락을 열심히 빨아 댔다. 차돌과의 재회는 스포츠조선 4월 2일자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 차돌의 새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건설업을 하는 '박상문' 사장이었다. 홍대유는 박 사장과 대화를 하였다.
차돌이 어떤 말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말이란 얘기를 듣고 샀는데, 신문을 보고서야 정말 훌륭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난 말을 너무 좋아해 승마를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차돌을 사고 나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차돌의 주인이 되셔서 정말 기쁩니다
허허, 차돌의 주인이라니요. 차돌의 진짜 주인은 바로 홍 기수입니다. 차돌을 드리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홍대유는 어리벙벙했다.
차돌을 구입하느라고 돈이 많이 들었을텐데요?
650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그동안 치료비 와 위탁관리비 등으로 모두 1000여만원이 들었지만, 차돌은 아무래도 홍 기수가 주인입니다.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차돌을 주셔도 저는 키울 수가 없습니다 . 단지 차돌을 곁에 두고 보살필 수 있도록 마사회의 승마훈련원에 맡겨 둘 수밖에 없어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차돌의 주인이 되셔서 정말 기쁩니다
허허, 차돌의 주인이라니요. 차돌의 진짜 주인은 바로 홍 기수입니다. 차돌을 드리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홍대유는 어리벙벙했다.
차돌을 구입하느라고 돈이 많이 들었을텐데요?
650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그동안 치료비 와 위탁관리비 등으로 모두 1000여만원이 들었지만, 차돌은 아무래도 홍 기수가 주인입니다.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차돌을 주셔도 저는 키울 수가 없습니다 . 단지 차돌을 곁에 두고 보살필 수 있도록 마사회의 승마훈련원에 맡겨 둘 수밖에 없어요.
스포츠조선에 이 사실이 보도돼 새 주인이 사연을 알고 홍대유에게 무상으로 기증함으로써 차돌은 4월 27일 과천경마장내 승마훈련원으로 되돌아왔다. 차돌은 승마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노후를 보냈다. 홍 기수 본인도 틈나는 대로 훈련원으로 찾아가 차돌과 우정을 나눴다. 차돌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차돌에 등에 타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지 몇 달 후 차돌은 사람을 태우고 가다가 넘어져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었기에 이후 쉬면서 지내다가 1998년 8월 20일 서울 경마장 내 기수 양성소에서 옮겨졌고 이후 그곳에서 여생을 지내다가 죽었다고 한다.[5]
4. 여담
- 홍대유 조교사가 기수였던 시절 말하는 차돌에 대한 이야기
- 차돌은 현역시절 역사상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말로써 유명했는데, 그가 활약한 당시인 91년 2월 2000m 경주에 출전할때는 무려 593kg을 기록했다. 이는 당시 체격이 작은 경주마들에 비하면 약 150kg 정도 많이 나가는 체중이었다고 한다.
5. 경주 성적
||<tablewidth=100%><width=15%><tablebordercolor=#013e7d><rowbgcolor=#013e7d><tablebgcolor=#fff,#2d2f34><rowcolor=#ffffff> 경주일 || 경마장 || 경기명 || 그레이드 || 트랙 || 순위 || 기수 || 1착마
(2착마) ||
(2착마) ||
<rowcolor=#ffffff> 1987년 (3세) | |||||||
2.28 | 서울 | C10 | 1000m | 1위 | 홍대유 | (일엽편주) | |
3.21 | 서울 | C9 | 1000m | 1위 | (포천) | ||
4.20 | 서울 | C8 | 1100m | 1위 | (낙조대) | ||
5.3 | 서울 | C7 | 1200m | 5위 | 구관 | ||
5.31 | 서울 | C7 | 1200m | 2위 | 손오공 | ||
6.19 | 서울 | C6 | 1400m | 1위 | (독보) | ||
7.10 | 서울 | C5 | 1400m | 2위 | 대야망 | ||
8.8 | 서울 | C5 | 1400m | 1위 | (신석기) | ||
9.11 | 서울 | C3 | 1650m | 1위 | (고운정) | ||
10.2 | 서울 | C2 | 1800m | 1위 | (동백장) | ||
10.31 | 서울 | C2 | 1850m | 4위 | 중전[6] | ||
11.15 | 서울 | 일간스포츠배 | C2 | 1850m | 1위 | (만세호)[7] | |
<rowcolor=#ffffff> 1988년 (4세) | |||||||
1.10 | 서울 | C1 | 2000m | 1위 | 홍대유 | (일비)[8] | |
5.1 | 서울 | C2 | 1850m | 1위 | (한라장사) | ||
7.3 | 서울 | C1 | 2000m | 2위 | 기적 | ||
8.7 | 서울 | C1 | 2000m | 5위 | 일광[9] | ||
9.11 | 서울 | C1B | 2000m | 1위 | (산까치) | ||
10.23 | 서울 | C1B | 2000m | 1위 | (일광) | ||
11.20 | 서울 | C1B | 2000m | 2위 | 산수갑산[10] | ||
12.18 | 서울 | 그랑프리 | C1B | 1800m | 3위 | 왕방울[11] | |
<rowcolor=#ffffff> 1989년 (5세) | |||||||
1.8 | 서울 | C1B | 2000m | 1위 | 홍대유 | (수평선)[12] | |
2.5 | 서울 | C2A | 1850m | 1위 | (청하)[13] | ||
3.19 | 서울 | C1B | 2000m | 1위 | (금덩이) | ||
4.16 | 서울 | C1B | 2000m | 1위 | (왕방울) | ||
5.21 | 서울 | 무궁화배 | C1B | 2000m | 1위 | (만세호) | |
7.2 | 서울 | C1A | 1850m | 2위 | 신바람 | ||
8.6 | 서울 | C1A | 1850m | 2위 | 섭리호 | ||
9.17 | 서울 | C1B | 2000m | 1위 | (강타자)[14] | ||
10.22 | 서울 | 한국마사회장배 | C1A | 1900m | 1위 | (수평선) | |
11.26 | 서울 | C1A | 1900m | 1위 | (정상)[15] | ||
12.10 | 서울 | 그랑프리 | C1B | 2000m | 1위 | (수평선) | |
<rowcolor=#ffffff> 1990년 (6세) | |||||||
1.21 | 서울 | C1 | 1900m | 1위 | 홍대유 | (홍학)[16] | |
3.25 | 서울 | C1 | 1900m | 2위 | 카나리아 | ||
7.21 | 서울 | C1 | 1900m | 6위 | 김옥성 | 오성장군 | |
9.16 | 서울 | C1 | 2000m | 2위 | 홍대유 | 평도[17] | |
10.21 | 서울 | 한국마사회장배 | C1 | 1900m | 3위 | 정상 | |
11.18 | 서울 | C1 | 2000m | 1위 | (곰돌이)[18] | ||
12.16 | 서울 | 그랑프리 | C1 | 2000m | 2위 | 가속도[19] | |
<rowcolor=#ffffff> 1991년 (7세) | |||||||
2.24 | 서울 | C1 | 2000m | 1위 | 홍대유 | (최대한)[20] | |
3.31 | 서울 | C1 | 2000m | 2위 | 가속도 | ||
4.28 | 서울 | C1 | 2000m | 2위 | 윤기정 | 대탄생 | |
5.26 | 서울 | 무궁화배 | C1 | 2000m | 6위 | 상위권 | |
6.30 | 서울 | C1 | 2000m | 5위 | 김옥성 | 경지[21] | |
9.8 | 서울 | C1 | 2000m | 5위 | 경지 | ||
10.13 | 서울 | C1 | 2000m | 1위 | 윤기정 | (요산요수) | |
11.17 | 서울 | C1 | 2000m | 2위 | 홍대유 | 영웅호걸[22] | |
12.15 | 서울 | 그랑프리 | C1 | 2000m | 5위 | 가속도 | |
<rowcolor=#ffffff> 1992년 (8세) | |||||||
1.26 | 서울 | C1 | 2200m | 3위 | 김옥성 | 징검다리[23] | |
3.8 | 서울 | C1 | 2200m | 2위 | 홍대유 | 징검다리 | |
4.5 | 서울 | C1 | 2200m | 2위 | 김옥성 | 고대산[24] | |
5.10 | 서울 | C1 | 2200m | 2위 | 징검다리 | ||
6.7 | 서울 | C1 | 2200m | 4위 | 초립동 | ||
7.5 | 서울 | C1 | 2200m | 2위 | 상위권 | ||
8.23 | 서울 | C1 | 2200m | 6위 | 징검다리 | ||
10.11 | 서울 | C1 | 2200m | 4위 | 고대산 | ||
11.15 | 서울 | C1 | 2200m | 1위 | 홍대유 | 고대산 | |
12.13 | 서울 | 그랑프리 | C1 | 2200m | 3위 | 김옥성 | 춘풍[25] |
<rowcolor=#ffffff> 1993년 (9세) | |||||||
1.17 | 서울 | C1 | 2000m | 1위 | 한유영 | (호동왕자)[26] | |
2.21 | 서울 | C1 | 2000m | 2위 | 김옥성 | 대탄생 | |
3.28 | 서울 | C1 | 2200m | 5위 | 최대한 | ||
7.4 | 서울 | C1 | 2000m | 11위 | 대기록[27] | ||
8.14 | 서울 | C1 | 2200m | 6위 | 한유영 | 최대한 | |
10.10 | 서울 | 문화관광부장관배 | C1 | 2200m | 8위 | 고대산 | |
11.7 | 서울 | C1 | 2000m | 3위 | 호동왕자 | ||
12.5 | 서울 | C1 | 2200m | 9위 | 임무완수 | ||
<rowcolor=#ffffff> 1994년 (10세) | |||||||
1.16 | 서울 | C1 | 2200m | 3위 | 한유영 | 풍년가 | |
3.13 | 서울 | C1 | 2200m | 3위 | 군주[28] | ||
4.10 | 서울 | C1 | 2200m | 5위 | 보은[29] | ||
7.24 | 서울 | C1 | 2200m | 4위 | 지구력[30] | ||
9.4 | 서울 | C1 | 2000m | 8위 | 최고로 | ||
10.1 | 서울 | C1 | 2200m | 10위 | 돈내코 |
''' 그랑프리 {{{#!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wiki style="margin:0 -11px -5px;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000000; word-break: keep-all" | <tablewidth=100%> 1982 연안부두 | 1983 금란초 | 1984 암말자격루| 1985 · 1986 포경선 | 1987 청하 | 1988 왕방울 | 1989 차돌 | |
1990 · 1991 암말가속도 | 1992 암말춘풍 | 1993 기쁜소식 | 1994 지구력 | 1995 대견 | 1996 암말훌라밍고 | 1997 풀그림 | 1998 신세대 | 1999 새강자 | ||
2000 암말즐거운파티 | 2001 다함께 | 2002 보헤미안버틀러 | 2003 템피스트웨스트 | ||
그레이드제 도입후, GI 지정 | ||
2004 밸류플레이 | ||
2300m로 거리변경 | ||
2005 섭서디 | 2006 플라잉캣 | 2007 밸리브리 | 2008 · 2009 동반의강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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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스피아 기준 작성.[2] 경주마들은 한번 레이스를 펼치면 8~ 10kg의 체중이 빠질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해 경주마는 한 달 주기로 출주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3] 현재는 부담중량을 최대 60kg으로 제한하고 있다. 가장 레이팅 순위가 높은 문학치프에게 배정된 중량이 그 예시.[4] 당시 기수는 오늘날처럼 조교사와 기승계약을 맺는 선수가 아니라 마사회 직원의 신분이었다.[5] 호스피아 기준에선 2015년 7월 2일에 폐사 했다고 하는데 다만 이 해당 기사에선 마지막에 서울 경마장 내 기수 양성소에서 지내다가 이후 숨을 거뒀다고 하는데 기사가 써진 시점인 2011년 이전에 폐사 했을 거란 해석도 존재한다.[6] 암말이며 1987년 한국마사회장배 3착말[7] 1980년대 중반에 활약한 말로 총 10번의 대상경주에서 2번 2착을 했었는데 모두 차돌에게 패했다.[8] 1980년대 활약한 말로 1989년 스포츠 서울배를 우승하였다.[9] 1988년 스포츠서울배 3착말[10] 1989년 무궁화배3착, 한국마사회장배 4착, 그랑프리6착말이다.[11] 198O년대 중반에 활약한 말로 1987년에 그랑프리 2위, 1988년에서는 그랑프리 우승을 하였다[12] 1980년대 후반에 활약한 말로 1989년 한국마사회장배와 그랑프리에서 차돌에게 패해 2위를 하였고 이듬해에는 무궁화배와 그랑프리에서 3위를 하였다.[13] 1987년에 그랑프리에서 왕방울에게 승리하여 우승한 말이다.[14] 1986년 무궁화배 우승말이다[15] 1990년 일간스포츠배, 한국마사회장배 우승말이다.[16] 1988년 그랑프리2착, 1990년 무궁화배5착 말이다.[17] 1987년 한국마사회장배 우승말이다.[18] 1990년 무궁화배 우승말이다.[19] 암말 최초로 그랑프리를 2회 연속 우승한 말이다.[20] 1991년 무궁화배 2착말[21] 1991년 그랑프리 2착, 1992년 무궁화배 2착말[22] 1991년 한국마사회장배 2착말[23] 1991년 뚝섬배 우승말이다[24] 1990년대 초반에 활약한말로 1993년 무궁화배와 문화관광부장관배에서 우승하였다[25] 1991년 일간스포츠배 1992년 그랑프리 우승말[26] 1992년 그랑프리 2착, 1993년 무궁화배 3착말이다[27] 1993년에 활약하여 문화관광부장관배와 그랑프리에서 2위를 한 경력이 있다.[28] 1990년대 활약한 말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무궁화배 2위와 3위 그리고 문화관광부장관배에서 4위와 2위를 한 말이다.[29] 1990년대를 대표하는 말중에 하나로 1991년 한국마사회장배 우승과 1992년,1994년에 무궁화배를 우승하여 대상경주 3승을 하였다.[30] 1990년대 중반를 대표하는 말중에 하나로 1994년 그랑프리 우승과 1995년 한국마사회장배 우승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