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23:33:06

포경선(말)

파일:krawci.png 다시 뛰는 명마 100투더 트랙 {{{#!wiki style="margin:0 -11px -5px;color:#ff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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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2022년 한국마사회가 국내 경마 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와 추천 위원회의 추천을 바탕으로 10대 명마를 선정 관련 영상 목록
1위
미스터파크
2위
가속도
3위
동반의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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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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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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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렛츠런파크 서울 1800m에서 10대 명마들 간의 가상경주를 실시. VISION127로 시청가능 관련 영상
1위
미스터파크
(기수: 유현명)
2위
트리플나인
(기수: 임성실)
3위
포경선
(기수: 김귀배)
4위
돌콩
(기수: 빅투아르)
5위
동반의강자
(기수: 최범현)
6위
새강자
(기수: 문세영)
7위
가속도
(기수: 김옥성)
8위
대견
(기수: 박태종)
9위
당대불패
(기수: 서승운)
10위
경부대로
(기수: 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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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포경선(말).jpg
이름 포경선
PO GYEONG SEON
출생 1980년 11월 23일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죽음 1991년 5월 28일 (11세)
마번 0001525
성별 거세(수입이전 거세)
털색 밤색
아비 DANSEUR ETOILE
어미 LEONOTIS
외조부 LIONHEARTED
성적 공식 : 25전 20승
비공식[1] : 43전 31승
총상금 공식 : 30,472,000원
비공식 : 41,000,000원[2]
주요 우승 그랑프리(1985, 1986)
상세 정보 파일:한국마사회 로고.svg | HORSEPIA

1. 개요2. 혈통3. 생애
3.1. 1983년~1984년3.2. 1985년3.3. 1986년 ~ 1987년3.4. 은퇴 이후
4. 여담5. 경주 성적

[clearfix]

1. 개요


[ 포경선 사진. 펼치기·접기 ]
||파일:포경선(말) 2.jpg||

한국의 경주마. 80년대 초중반 뚝섬 경마장 시절에는 포경선을 상대할 마필이 없을 정도 무적이라는 칭호에 버금가는 호칭과 15연승의 경이적인 기록을 기록한 한국 경마역사상 최고의 루키 경주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활약에 현역당시 에이원-연안부두에 이은 한국경마 3번째 명마라는 칭호를 받았다. 더불어 가속도 이전까진 그 해와 다음해 그랑프리를 연승한 최초의 경주마이다.

1985년 이전의 경주기록은 상세한 착순등을 알기가 어려워 현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25전 20승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대 80년대에서 90년대의 신문에서는 포경선의 성적을 43전 31승 2위 5회를 기록한 말로 소개하고 있다.

2. 혈통

1대 2대 3대
<colbgcolor=#fff3e4,#331c00>Danseur Etoile
1974 파일:프랑스 국기.svg
<colbgcolor=#ffffe4,#323300>Lyphard
1969 파일:미국 국기.svg
Northern Dancer
Goofed
Beaufront
1961 파일:영국 국기.svg
Mossborough
Sylvan
Leonotis
1968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Lionhearted
1961 파일:영국 국기.svg
Never Say Die
Thunder
Posy
1961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Talismano
Sweet Spray
* -

3. 생애

3.1. 1983년~1984년


1980년 11월 23일에 태어나 1983년 8월 12일에 마명을 부여받고 그 해 10월에 데뷔하였다. 데뷔전에서 9마리중 8위를 기록했으며 4전만인 12월 1000m 경주에서 처음으로 김종온 기수와 함께 첫 승리를 기록했다. 그리고 1984년에 1등급으로 승격되었고,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4년 6월 17일에 치러진 제3회 무궁화배에서는 80년대를 대표하던 명마들이 총 집결했었다. 복민호와 정암봉 그리고 다승왕이었던 두만강, 십팔계와 1983년 제2회 농수산장관배 우승마였던 마의산을 꺽은 진격이 출전했다. 이러한 라인업 속에서 포경선은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선두에서 달아나는 진격을 추월하지 못하며 우승하지 못하였다.

무궁화배에서 패배했지만 이후에도 좋은 행보를 보였고, 10월 경주에서 5월에 있었던 무궁화배 우승마인 진격을 꺽으며 설혹을 하였다. 그러나 한달뒤에 포경선은 진격에게 다시 패배하게 되는데, 이 경주 이후 신문사에서 둘을 라이벌로 묘사하였다.

3.2. 1985년


포경선은 3개월간의 휴양을 거친이후 3월에 새해 첫 경주를 시작하였다. 지난해 최강의 말이었던 진격과 포경선은 이 시기 초반부터 연승을 달리고 있다가 5월 19일에 만나게 되었다. 이 경주에서 포경선이 진격을 코차이로 꺽으며 통산 2승 2패의 구도를 달성하였다. 덤으로 진격의 연승을 끊어내었다. 당시 이 둘이 만난 4전에서 2000m는 모두 진격이 우승하였고 1800m는 포경선이 모두 이겼기 때문에, 2000m는 진격이고 1800m는 포경선이란 말이 나왔다.

그러나 8월에 치러진 경주에서 진격이 이번엔 포경선을 상대로 4마신의 압승을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경주 이후 포경선이 15연승과 더불어 그랑프리 2연패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그의 마생에서는 중요한 경기였다. 그러나 진격은 포경선보다 1살이 많았기 때문에 서서히 기량이 저하되기 시작한 반면 포경선은 1985년부터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둘이 마지막으로 대등하게 펼친 경주는 그 다음에 펼쳐진 9월 1일에 경주로 이 경기에서 진격이 2위, 포경선이 1위를 기록했는데 약 2마신의 차이를 보였다. 이후 10월 19일에 포경선이 처음으로 진격에게 연승을 거두면서 왕좌가 교체되었음을 알렸으며 그 해의 그랑프리를 대차로 모든 라이벌들을 압도하며 자신의 시대를 알렸다.

포경선은 1985년 진격에게 1850m에서 겨루며 2승 1패를 기록했을 만큼 이거리에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당시 1850m에서 최고기록이 1분 54초 2로 당대 다른 말들에 비해 4~5초 정도 빨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록은 당시 최고기록으로 수립 되었다.

3.3. 1986년 ~ 1987년

1986년에는 진격이 노쇠화하고 이후 86년 그랑프리에서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마주친일이 없었다. 이 해의 포경선에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꼽혔던 말은 강타자였다. 강타자는 1986년부터 전성기를 맞이하여 9연승을 기록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5회 무궁화배 대상경주를 우승했다. 그러나 그랑프리에서 포경선은 부담중량 65kg을 지고도 강타자와 진격을 포함한 모든 라이벌들을 또 다시 대차로 꺽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포경선은 2년동안 자신과 마주친 모든 강자를 무너뜨리고 패배하지 않는 경주를 선보이면서 86년도에도 최고의 말로 칭송받았다. 이 경기는 당시 참여했던 김귀배 기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한다.

1987년 6월 28일 국내 첫 2500M 경주가 진행되었는데 포경선이 뛴 뚝섬 경마장의 더트 주로 상태는 당시 그렇게 좋지 않았고 포경선도 부담중량 68kg을 짊어졌지만 당시 최강거리 2500m를 무시무시한 괴력을 과시하며 질주, 51~54kg의 부담중량을 짊어진 말들을 가볐게 제치며 우승을 2500m 2분 52초8의 신기록도 수렴하였다.
당시 포경선이 출전한 2500M 경주

1987년 7월 26일엔 2000m 경주에서 우승하였지만 우측 다리 부상으로 휴양을 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15연승 기록을 달성한 참이었다. 이 기록은 훗날 새강자가 다시 15연승을 할때까지도 15연승이 깨지지 않다가 24년 후 미스터파크가 그 기록을 깨기 전 까지 깨지지 않던 기록이었다.[3] 15연승 이후 포경선을 담당하던 최연호 조교사는 포경선이 부상 후유증때문에 가을쯤에 제 컨디션을 찾고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인터뷰를 가졌는데 당시 포경선의 목표는 그랑프리 3연패와 에이원이 가지고 있던 연승 기록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한 시기에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포경선은 이 때 82년도에 큰 활약을 선보였던 연안부두와 70년대 전설적인 경주마인 에이원과 비교되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포경선은 막중한 부담중량 등으로 결국은 다음경주에서 왕방울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이 패배이후 그랑프리 3연패 도전도 하지 않았으며 몇 경주를 더 뛰다가 은퇴하였다.

3.4. 은퇴 이후

이와같이 80년대 한국 경마를 주름잡은 포경선은 말년엔 부담 중량으로 인해 무리를 하는 편이었고 1988년 12월 15일에 은퇴하였는데, 이때 한국 경마 역사상 이례없던 은퇴식을 사실 상 최초로 거행하였다. 비록 당시엔 경마 관계자들만이 지켜보는 은퇴식이였지만 이는 그의 은퇴를 얼마나 아쉬워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자 그만큼 무적이자 스타인 포경선이 이뤄낸 위업을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은퇴를 할때의 포경선은 43전 31승 2착 5회로 승률 72% 연대율 83%의 경이로은 기록을 보유하였다.
파일:포경선(말) 박물관 박제 당시.jpg
은퇴를 한 포경선은 경마기수양성소에서 기수후보생들의 교육용 마필로 활약하던 포경선은 1991년 5월 28일 평소 앓던 우측 다리 부상이 악화되어 인도적 차원으로 안락사 되었지만 당시 최초 15연승 위업과 같은 사후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전신 박제[4]되어 말박물관에 전시되었었다가 이후 박제 상태가 나빠져 보존을 위해 수장고 등으로 옮겨졌지만 상태가 더 심해져 최종적으론 폐기 되었다고 전해진다. 관련글

4. 여담

* '100투더트랙' 10대 명마 중 10위에 선정되었으며 '10대명마X가상경주' 1화에 소개되었다.
* 이 경주마의 이름에서 따온 돌아온포경선이란 경주마도 있는데 2015년에 데뷔해 2022년에 은퇴하였고 16년 클래식 세대를 대표하는 단거리 경주마다.
*1986년도에 경주마 마방에 외부인이 침입하여 포경선등 유명말들에 중추신경마취제인 콤비푸렌을 주사놓았으나[5] 포경선은 그걸 이겨내고 이후 경기에서 우승을 거머쥔 전설같은 일화 또한 만들어 냈다. 마취제를 주사했던 외부인은 일을 꾸민 일당들의 내부분열로 모두 구속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을 설명하는 홍대유 조교사의 이야기 영상(1분 55초 부터)[6]
* 현역시절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진격과는 9전 5승 3패 1무를 기록했다.
* 포경선과 강타자 그리고 진격이 모두 모여 경주를 한 적은 3번 있었다. 1985년 9월 1일, 1986년 그랑프리, 1988년 5월 15일이다. 이중 포경선은 2승 1패, 강타자는 1승 2패, 진격은 3번 모두 졌다.
* 홍대유 조교사에 말에 따르면 말들에게 홍당무를 처음에 주면 잘 안먹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사례로로 포경선을 언급했다. 포경선이 뚝섬시설에 은퇴를 했을때, 마사회 이건용 회장이 포경선을 위하여 홍당무를 한 박스를 가져와서, 식순에 따라 말에게 홍당무를 주는 순서때, 홍당무를 잘 닦아서 포경선에게 내밀었는데 포경선이 이를 안먹었다고 한다.
* 포경선은 85년-86년-87년동안 3년연속 그랑프리 경마에서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하였다.

5. 경주 성적

||<tablewidth=100%><width=15%><tablebordercolor=#013e7d><rowbgcolor=#013e7d><tablebgcolor=#fff,#2d2f34><rowcolor=#ffffff> 경주일 || 경마장 || 경기명 || 그레이드 || 트랙 || 순위 || 기수 || 1착마
(2착마) ||
<rowcolor=#ffffff> 1985년 (5세)
3.24 서울 C1 2000m 1위 지용철 (남대천)
4.21 서울 C1 1850m 1위 백원기 (대록산)
5.19 서울 C1 1800m 1위 백원기 (진격)
6.23 서울 C1 1850m 1위 최동승 (신태양)
8.4 서울 C1 1850m 3위 지용철 진격
9.1 서울 C1 1850m 1위 지용철 (진격)
10.19 서울 C1 1850m 1위 김명국 (모닥불)
11.17 서울 C1 2000m 1위 지용철 (반석)
12.15 서울 그랑프리 C1 2000m 1위 지용철 (광장)
<rowcolor=#ffffff> 1986년 (6세)
3.23 서울 C1 1850m 1위 지용철 (동백섬)
6.29 서울 C1 1850m 1위 김귀배 (일보전)
7.27 서울 C1 1850m 1위 김귀배 (애마교)
8.31 서울 C1 1850m 1위 김귀배 (예성강)
9.28 서울 C1 1850m 1위 김종권 (은빛)
11.2 서울 C1 1850m 1위 김귀배 (노들강변)
12.14 서울 그랑프리 C1 1850m 1위 김귀배 (총알)
<rowcolor=#ffffff> 1987년 (7세)
4.26 서울 C1 2000m 1위 윤치운 (장다리)
5.24 서울 C1 2000m 1위 김귀배 (산까치)
6.28 서울 특별 C1 2500m 1위 김명국 (산까치)
7.26 서울 C1 2000m 1위 윤치운 (강타자)
11.8 서울 C1 2000m 2위 김명국 왕방울
<rowcolor=#ffffff> 1988년 (8세)
5.15 서울 무궁화배 C1 2000m 3위 이광복 강타자
6.19 서울 C1 2000m 3위 김문갑 순정호
7.17 서울 C1 2000m 1위 이광복 (오성장군)
8.14 서울 C1 2000m 5위 이광복 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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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000000; word-break: keep-all"
<tablewidth=100%>
1982
연안부두
1983
금란초
1984
암말자격루
1985 · 1986
포경선
1987
청하
1988
왕방울
1989
차돌
1990 · 1991
암말가속도
1992
암말춘풍
1993
기쁜소식
1994
지구력
1995
대견
1996
암말훌라밍고
1997
풀그림
1998
신세대
1999
새강자
2000
암말즐거운파티
2001
다함께
2002
보헤미안버틀러
2003
템피스트웨스트
그레이드제 도입후, GI 지정
2004
밸류플레이
2300m로 거리변경
2005
섭서디
2006
플라잉캣
2007
밸리브리
2008 · 2009
동반의강자
2010
부산경남미스터파크
2011
터프윈
2012
부산경남(암말)감동의바다
2013
부산경남인디밴드
2014
부산경남경부대로
2015
부산경남볼드킹즈
2016
클린업조이
2017
부산경남파워블레이드
2018
부산경남트리플나인
2019
문학치프
~~
2020
취소~~
2021
행복왕자
2022 · 2023
부산경남위너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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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 8월 굽소리에 근거함[2] 1999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포경선이 한국에서 벌어들인 총 상금은 4100만원이라고 언급되어있다.[3] 현재는 에이원의 연승기록이 당대 자료가 소실되면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90년대 신문기사에서는 당시 최다연승을 에이원으로 선정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1760년에 태어나 62년을 살다가 1822년에 죽은 '늙은 빌리(Old Billy)'가 머리만 박제되어 맨체스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례와 1926년에 태어나 1932년 독살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한 호주의 경주마 '파랩'(Phar Lap)이 박제돼 멜버른 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골격은 뉴질랜드 테파파 통가레와 박물관(Te Papa Tongarewa)에, 심장은 호주 국립박물관 보관소에 박제되어 보관된 사례가 있다.[5] 당시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따르면 새벽에 복면을 한 일당이 마사회 마방에 들어가 우승후보였던 복민호와 서포리 등에게 약물을 주사했다고 한다. 그 범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직 기수들이 경마전날 한밤중에 들어가 3~4명은 말의 머리를 긁어 소리를 내지 않게 하고, 2~3명은 주변을 감시, 구속된 박씨가 약물을 투입하였다고 한다.[6] 본 글에서는 1986년도로 기록했지만 실제 당시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는 1985년 12월 7일의 동아일보에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때 일을 벌인 일당들이 출소한후 다시 한번 약물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했지만, 당시 주사한 것은 중추신경마비제인 에루엔 10cc가량을 주사한 것이었고, 이 내용은 1987년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