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2-06 00:40:08

지영희

지영희
池瑛熙
파일:00518854501_20141125.jpg
본명 지천만(池千萬)
출생 1909년 8월 14일
경기도 평택시
사망 1979년 2월 2일 (향년 71세)
미국 하와이
본관 충주
배우자 정경순(?년-?년): 2녀
성금연(1923년 5월 7일 -1986년 7월 29일): 3남 5녀

1. 개요2. 생애3. 집안 내력4. 인간관계5. 지영희류 해금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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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해금, 피리 연주자. '지영희류 해금산조'를 창시한 전설적인 원로 국악인.

2. 생애

경기도 평택 세습무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의 국악 명인들에게 조기교육을 받았다.[1] 나중에는 스스로 가야금과 아쟁을 터득했다고 한다.

1937년 조선음악연구소에 입소하여 악사가 되었고, 1938년에는 한성준무용단의 반주악사로 활약하였으며, 1946년에는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국악사가 되었다.

특히나 태평소를 잘 불었는데, 심지어 10대 때부터 태평소 명수로 이름이 나 평택의 이웃 마을에 불려다닐 정도. 당시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두레패들이 지영희를 농악대 호적수로 내세우려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하며 호적수로 영입하는 데 성공한 농악대에서는 지영희의 집 농사 일까지 거들어주는 선심을 썼다 한다.

14세 때 정경순과 혼인했고, 49세 때인 1958년 가야금의 명인인 성금연[2]과 재혼하게 된다.

다음은 국악FM방송 노재명 진행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에 방송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판소리·가야금 명인 지수복 증언 내용
대담·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선략)
노재명: 모친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지수복: 저희 생모는 정경순이라고 따루 계시고 그러구 성금연 그 선생님은 서모세요. 국악 가야금이며 판소리는 성금연 선생님한테 인제 처음으로 시작을 했어요.
노재명: 친모 정경순 선생님께서는 어디에서 시집을 오셨나요?
지수복: 그 이웃에 계셨나 봐요.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꼭 그 어머니 아니면 장가 안간다구 떼를 써서 인제 그래 결혼을 했는데 굉장히 빨리 하셨어요. 열 네 살에 시집을 와서 열 다섯 살에 우리 언니, 그러니까 지수남 언니를 낳았어요.
노재명: 형제간은 아까 제가 잠깐 소개를 했습니다만 10남매가 맞으시구요.
지수복: 예, 딸이 일곱이에요. 어머니한테 둘, 성금연 그 어머니한테 다섯. 그래서 일곱이고 아들이 하나, 그러니까 둘 낳았었는데 다섯 살 때 막내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8남매가 남은 거지요. 근데 그 중에 인제 또 지수남, 그 언니하고 지미자하고 또 별세를 했지요.
노재명: 그 중에서 국악 활동하신 분들이 지수남 씨.
지수복: 다에요. 다했어요.
노재명: 그렇게 장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거의 다 하셨고요.
지수복: 예.
노재명: 그래서 부친 되시는 지영희 선생님은 피리·태평소 그런 관악기, 또 해금 명인이셨고 성금연 명인은 가야금산조·병창, 또 판소리도 잘하셨었구요.
지수복: 예.
노재명: 그렇게 인제 국악을 부모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입문을 하셨는데 그 입문하실 때 가족 여러분이 모두 찬성을 하셨나요?
지수복: 아, 우리 생모님이 반대하셨죠. 그니까 왜정 시대 때죠. 제가 나이 일곱 살 아마 그, 그 무렵인 거 같애요. 근데 내가 기억하기루는 그 한성준 씨라구 계세요. 그 분인 거 같애요. 그 거기를 데리구 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는 안시킨다구. 막 며칠 굶구 막 그래 가지구는 안가리켰어요. 그래 6.25 후에 배우기 시작한 거에요 제가.

평택내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20대에는 한성준 무용 연주소와 최승희 무용단에 반주 악사로 있으며 무용곡을 편곡하고 승무등의 무용을 학습한다. 이때부터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조선음악협회, 국악건설본부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리게 된다.1945년에는 국립국악원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6.25 전쟁이 끝난 뒤 대한국악원 이사, 지영희고전무용연구소 등을 운영하다 1960년대에 박정희 정부에서 미신 타파 정책이 발표되자 굿이 소멸될 것을 염려하여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무속음악을 채보하였다. 국악인으로는 거의 최초로 민속악을 5선 악보로 채보하여 정리했으며, 창작 국악을 관현악으로 편곡하고 관현악단 지휘도 하였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은 바로 그가 만든 악단이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5년 해외이민으로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서 민속악을 악보로 정리하다가 1980년 2월 2일 작고하였다. 지영희가 생전에 민속악을 악보로 정리해 놓은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산더미 같이 많았다고 한다. 지영희가 작고한 후 그 악보들이 상당수 분실되었지만 다행히 지영희가 정리한 악보 중 일부를 그의 딸 지성자가 찾아내 1986년에 일본 도쿄에서 <지영희 민속음악 연구자료집>(성금연 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바 있다.

3. 집안 내력

가족들의 경력이 아주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자인 성금련은 '가야금계의 대모'로 불리며 그가 창시한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는 현재 김죽파류와 함께 가야금 산조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가락이다. 딸인 지수복, 지성자, 지미자, 지순자, 지윤자, 지명자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활동 중이다. 또한 손자인 강봉천도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지영희의 딸 지성자의 회고담이다.
아버지께서는 늘 방안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담배 연기 자욱한 방안에서 악기를 손질하시거나, 악보를 정리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게 늘 여러 음악을 알려주려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다. 아버지께서는 중요한 음악이라고 생각하시던 것은 녹음을 해서 내게 주셨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자상한 아버지인 동시에 천부적인 예술가요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자이셨다는 것이다.

1995.5.21.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지성자 가야금 연구소에서 인터뷰한 내용

4. 인간관계

박상근, 이병우, 신쾌동, 김광식, 이충선, 지갑성, 방태진, 한범수, 이정업, 김윤덕, 김득수와 가까웠다 하며, 특히 김광식, 이정업, 김득수와는 의형제까지 맺었다 한다.

지영희는 성금연과 함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지영희의 딸 지수복을 비롯해서 최경만, 김영재, 박범훈, 이종대, 최태현, 김광복, 김덕수, 김한국, 이생강, 정철호 등 무수히 많은 이들이 지영희에게 민속악을 배웠다.

5. 지영희류 해금산조

지영희는 지용구와 김덕진에게 짧고 단순하게 짜여진 해금산조를 배웠고 후에 지영희가 가락을 많이 보태서 20∼30분 가량 되는 긴 해금산조를 연주했다.

해금은 무속음악에서 커왔기 때문에 전통적인 해금 가락에는 무악이 많이 들어있으며 조의 변화가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지영희류 해금산조에는 경기 무악과 전라도 무악이 모두 들어있는데 대부분 경기 무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해금은 대금이나 가야금처럼 손가락으로 눌러서 음을 내지 않고, 손으로 두 줄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음의 높낮이를 손의 감각으로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음감이 뛰어나야 하고, 수많은 경험과 연습으로 닦인 공력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산조는 여러가지 복잡한 기교가 요구되어 기악 연주자들에게 가장 연주하기 난해한 곡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산조에 새로운 가락을 짜서 첨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타고난 음악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극히 짧고 단순했던 초창기의 해금산조에 다양한 음악들을 쏟아 부어 한 차원 높은 예술로 끌어올린 지영희의 음악성이 높히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1] 조항련에게 태평소, 정태신에게 양금, 지용구에게 해금, 최응래와 양경원에게 피리, 김계선에게 대금풍류, 방용현에게 대금산조와 풍류, 최군선에게 농악, 오덕환에게 무용 장고, 박춘재에게 경기소리와 서도소리, 신쾌동에게 거문고산조, 김상기에게 거문고풍류를 배웠다고 한다.[2]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