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련합사령부 | |
유형 | 단체 |
시대 | 현대 |
성격 | 군대조직, 비밀기구 |
설립일시 | 1950년 12월 |
해체일시 | 불명 |
설립자 |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
[clearfix]
1. 개요
조중련합사령부(朝中聯合司令部)[1] 또는 북중연합사령부(北中聯合司令部)[2]는 6.25 전쟁 중 중국군의 개입으로 북한과 중국 간의 작전 수행 시 지휘통수권을 일치시키기 위해 설립한 연합사령부이다.1950년 12월 상순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합의하에 대외적으로 비공개로 설립된 기구이다. 중국군이 6.25 전쟁에 개입하여 인민군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 작전의 통일성을 지향하기 위해 수립하였다.
2. 인민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인민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국군 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며 기습 공격을 개시하였다. 인민군은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에는 대전을 함락시켰으며 7월 말에는 경상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부터 공방전을 펼쳤다. 인민군은 8월 3일 낙동강을 도하해 안동을 점령했으며 포항과 당시 마산을 잇는 선까지 압박하였다.인민군은 낙동강을 건너면서 8월 공세(제5차 공세)를 전개하여 한반도의 95%를 장악했다. 인민군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5차 공세를 펼쳤으나 8월 18일 유엔군과 한국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것이 유엔군과 한국군의 대반전 시작이었다.
3. 인천 상륙작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
8월 초 한국군과 유엔군의 대반전이 시작되었다. 9월에 접어들면서 인민군은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9월 15일,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을 누르고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보급로가 끊기고 심리적 충격을 겪은 인민군은 목숨을 건 후퇴를 시작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은 김일성의 8월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을 좌절시켰다. 남한 곳곳에서 빨치산 부대가 활동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부대가 아니었다.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10월 2일 북진을 시작한 유엔군도 10월 7일에서 10월 14일엔 숙천•양양 공수작전을 펼쳤다. 인민군은 급기야 중국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이미 만주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한 상황이었다. 10월 26일, 압록강까지 진격한 한국군은 압록강 물을 마실 수 있었다. 11월 하순이 되자 전승 분위기가 만연해 졌다. 유엔군도 11월 23일까지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전쟁이 한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끝나고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