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1년 1월 21일[1] |
경상북도 상주군 내남면 월평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인평동[2] 월평마을 358번지) | |
사망 | 1949년 12월 3일[3] (향년 48세) |
본관 | 풍양 조씨[4] |
이명 | 조일연(趙日然)[5] |
학력 |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
가족 | 배우자 정기남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봉안당 제1충혼당-320실-97호 |
상훈 | 1992년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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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01년 1월 21일 경상북도 상주군 내남면 월평리(현 상주시 인평동 월평마을 358번지)에서 아버지 월초(月樵) 조남진(趙南軫, 1873.9.3. ~ 1943.11.28.)[6]과 어머니 개성 고씨(開城 高氏) 고록리(高鹿里, 1870.4.2. ~ 1953.7.21.)[7] 사이에서 6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면 읍내 장날, 오후 5시부터 상주군 학생 대표로서 강용석·성필환·한암회·석성기·성해식 등 5명과 함께 상주군에서의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1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제국 육군 헌병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8] 복역하였다.
1949년 12월 3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당초 상주시 모동면 금천리 동쪽 산기슭에 안장되었다가, 낙동면 운평리 운곡마을에 이장되었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017년 11월 16일 국립서울현충원 봉안당 제1충혼당에 배우자 진주 정씨 정기남(鄭祈男, 1899.7.9. ~ 1945.7.3.)[9]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었다.
3. 여담
- 차남 조성석(趙誠鉐, Cho, Seong-seock, 1948.4.10. ~ )은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과 금속재료전공 명예교수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금속공학과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13년 8월 31일 정년퇴임하였다.[10]
[1] 풍양조씨세보 6중간 병술보 2권 권54 기편(己編) 1545쪽에는 1899년 음력 1월 22일(양력 3월 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조성돈은 인평동 도상마을 출신이다.[3] 풍양조씨세보 6중간 병술보 2권 권54 기편(己編) 1545쪽에는 1947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30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전직공계(殿直公系)-호군공파(護軍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27세 연(衍) 항렬.[5]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4권[6] 자는 성팔(星八).[7] 고문겸(高文謙)의 딸이다.[8]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수형인명부[9]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11대손으로, 남미(南渼) 정동순(鄭東珣, 1866.8.16. ~ ?.8.16.)의 차녀이다.[10] #[11] 이명 조의연(趙義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