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3:03:20

조백양

파일:조(춘추) 전서체.png
조(曹) 국군
{{{#!wiki style="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margin: 0 -10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181818,#e5e5e5
초대

조숙 진탁
2대

태백
3대

중군
4대

궁백
5대

효백
6대

이백
7대

유백
8대

대백
9대

혜백
10대

조백 석보
11대

목공
12대

환공
13대

장공
14대

희공
15대

소공
16대

공공
17대

문공
18대

선공
19대

성공(成)
20대

무공
21대

평공
22대

도공
23대

성공(聲)
24대

은공
25대

정공
26대

조백 양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colbgcolor=#DB7093><colcolor=#ece5b6> 조(曹)나라 말대 국군
조백 양
曹伯 陽
희(姬)
조(曹)
양(陽)
아버지 조정공(曹靖公) 희로(姬露)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87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01년 ~ 기원전 487년

1. 개요2. 생애
2.1. 공손강(公孫強)을 만나기 전2.2. 공손강을 만난 뒤2.3. 뻘짓 후 멸망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조(曹)나라의 제26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 송(宋)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해 송경공의 손에 죽었다. 달리 조 폐공(曹廢公)이라고도 한다.

2. 생애

2.1. 공손강(公孫強)을 만나기 전

조백 양이 즉위한 뒤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1]

조백 양 4년(기원전 498년) 여름, 위(衛)나라의 공맹구가 조나라를 쳤다. 그리하여 조나라 군을 쳐부숴 교외에 이르러 철수했다.

조백 양 5년(기원전 497년), 공맹구가 다시 조나라를 쳤다.

2.2. 공손강을 만난 뒤

조백 양 6년(기원전 496년), 조나라의 공손 강(公孫 強)[2]이 조백 양과 사냥을 나가면서 국가 대사를 논하자 조백 양은 기뻐하면서 사성으로 임명해 국정을 돌보게 했다.

조백 양 10년(기원전 492년), 송나라의 악곤이 조나라를 쳤다.

조백 양 13년(기원전 489년), 송나라의 상소가 조나라를 쳤다. 조나라가 날로 국력이 기울자 공손 강이 조백 양에게 패자(霸者)가 될 계책을 냈다.

2.3. 뻘짓 후 멸망

조백 양 14년(기원전 488년), 조백 양이 진(晉)나라와의 국교를 끊었다.[3] 그리고 송나라를 쳤다. 이에 송나라의 군주 송 경공은 조나라를 포위했다. 조백 양이 진(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진(晉)나라가 조나라가 진(晉)나라를 배신한 일을 들어 구원병을 단 1명도 보내지 않았다. 오직 정나라 만이 진(晉)나라의 눈치를 보다가 구하러 왔을 뿐이다.

조백 양 15년(기원전 487년) 봄, 송나라 군이 조나라를 칠 때 송군이 철수하려 했다. 저사 자비가 달아나려 하자 조나라 사람들은 그를 모욕했다. 그러자 그것이 오히려 저사 자비를 달아나지 않게 만들었다. 송 경공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조나라를 쳐서 끝내 조나라를 멸하고, 조백 양과 공손 강을 잡아다가 송나라에서 참수해 최후를 마쳤다.

[1] 군주가 사냥을 하면 많은 물자 비용도 비용이지만, 집을 허는 등 온갖 뻘짓을 하고 보상이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어느 정도는 참작 가능한게, 춘추시대 까지만 해도 군사 훈련의 일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2] 삼국지에 나오는 요동군 태수 공손강(公孫康)과는 다른 사람이다.[3] 공손 강의 계책도 있었겠지만, 오나라가 뜨고, 실권자들이 뇌물이나 먹으면서 제대로 패업을 행사하지 않는 등의 원인도 있었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는데, 이유는 후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