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주해(主海) |
본관 | 경주 정씨[1] |
출생 | 1892년 10월 20일[2] |
충청도 괴산군 북상면 아성리 (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 |
사망 | 1942년 12월 12일 |
만주국 빈강성 하얼빈시 안평가 (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리구 안핑제) | |
종교 | 대종교 |
묘소 |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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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2년 10월 20일 충청도 괴산군 북상면 아성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에서 아버지 정행두(鄭行斗, 1849. 8. 24 ~ ?. 12. 1)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3]그는 1919년 3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지청천 부대에 참가하여 연해주 이만(Iman)[4]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부터 1930년 5월 초까지는 중화민국 길림성 빈강도(濱江道) 빈강현(濱江縣)[5][6]에서 동성호(東省號)라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연락처로서 활용하였으며, 같은 해 5월 1일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대종교에 입교한 그는 1942년 11월 빈강성(濱江省)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7]에서 서무사원(庶務司員)으로 일하던 중, 당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대종교 탄압, 즉 '임오교변'으로 대종교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 뒤 옥중에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여 가석방된지 5일만인 12월 12일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에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주해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양경공파-첨지공파 66세 해(海) 항렬. 족보명은 정주해(鄭珠海).[2] 경주정씨양경공파대동세보 권10 511쪽에는 2월 2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어머니 광산 김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첫째 부인 안동 권씨는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1858년 12월 13일 요절했다.[4] 현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달네레첸스크.[5]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와이구(道外區).[6] 1927년에는 빈강시(濱江市)가 신설되었고, 빈강현은 기존의 관할 지역 중 농촌 지역만을 관할하게 되었다.[7]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리구(道里區) 안핑제(安平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