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1년 5월 12일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 |
사망 | 1973년 6월 25일 |
충청남도 예산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종호는 1911년 5월 12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1928년 충남 예산공립농업학교(現 국립공주대학교)에 입학한 뒤 일본인의 한인학생 차별정책에 분노를 느끼던 그는 학우인 강봉주·한정희 등과 함께 빌밀결사 독서회(讀書會)를 결성했다.이후 항일반제투쟁에 관한 서적 등을 윤독·토론하는 등 민족정신 배양과 항일의식 고취를 위한 독서회 활동을 적극 전개하는 한편, 당시 유행하던 문맹퇴치운동과 문자보급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항일학생운동의 세력 확대에 앞장섰다. 또한 그해 4월에 윤봉길 등 36인과 함께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아 농촌개혁운동 및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단행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그는 동년 5월 초순 박정순·박희남(朴熙南)·오일규 등 동교 하급생들이 조직·활동하던 독서회와 회합을 갖고 본격적인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두 조직을 통합할 것을 제의하여 좌익협의회(左翼協議會)를 조직하였다.
연구부·조직선전부·에스페란토어부 등 3개 부서가 설치된 좌익협의회에서 조직선전부를 담당한 그는 동년 5월 14일 과 22일경 두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김용재(金用在) 등 선배 졸업생들과 동교 학생 8명을 동지로 규합하여 조직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32년 6월 학교측이 학생들에게 무리한 동원령(動員令)을 내린 것을 계기로 박희남·박정순·강봉주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결행하여 항일투쟁의 목표를 명백히 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행사 강행을 위한 노력동원의 부당성, 일본어 과목을 국어로 표기하는 반민족적 처사의 시정, 일인 학생과 한인 학생의 차별정책 개선, 한인 교사의 확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동년 7월 학교 당국으로부터 좌익협의회의 회원들이 다수 학사처분을 받게 됨과 동시에 일제의 감시 강화로 동회의 활동이 위축되자, 동년 9월 18일 강봉주·한정희·박희남 등과 함께 조직 재건에 합의하여 '예산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조직하고 조직선전부를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지역별 항일학생 운동조직과 연계를 목적으로 동교 내에 김형래(金炯來) 등 5학년생과 이종규(李鍾圭) 등 3학년생들을 각각 대표로 임명하고 그들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밖으로는 이강오(李康午) 등 지방의 청년동지와 서울 YMCA를 비롯한 외지의 학생조직과 연계를 강화하는 등 학생운동의 기획과 기밀조직의 관리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 경찰이 감시를 강화하여 조직이 노출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조직관리를 맡았던 그는 동년 11월경 조직관리의 위장방법으로 비밀결사 명칭을 회합일인 토요회(土曜會)로 개칭하는 한편, 지방의 민족청년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반일투쟁방법을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11월 중순경 일제의 관제연극단체인 극단 만경좌(萬鏡座)가 예산군 예산면 시장터에서 일제가 만주의 마적으로부터 재만(在滿) 한인을 보호한다는 내용이 담긴 '동방의 빛'이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그는 회원들과 함께 이 연극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공연관람 거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극단에 공연 중단을 요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극단원들과 충돌한 사건으로 1932년 12월 27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예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3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정종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