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11 16:35:36

잦아진 훼방



1. 개요2. 서문3. 본론
3.1. I.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를 통해 논쟁이 시작된 경위3.2. Ⅱ. 우리의 답변 목적3.3. Ⅲ. 우리의 서품과 직분의 질료와 형태 논쟁3.4. IV. 교황 레오가 논쟁에서 잘 제외한 것들3.5. V. 로마 법정의 관례와 성공회 전례의 형식3.6. VI. 레지널드 폴 당시 시행된 관례에 대하여3.7. VII. 존 고든 재판에 관하여3.8. Ⅷ. 질료와 형상에 대하여 우리가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점과 성사의 의도에 대하여3.9. IX. 성사의 질료와 형상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과도한 강조의 불필요성3.10. X. 견진 성사가 잘 보여주는 점3.11. XI.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리와 우리 자신의 전례의 비교3.12. XII. 3세기와 6세기 로마 형식과 비교를 통한 답변3.13. XIII. 대제사장 명칭의 불가결하지 않음에 대해3.14. XIV. 두 가지 주장에 대한 답변3.15. XV. 사제 서품 형식에 대한 유사한 답변3.16. XVI. 우리 교부들이 삭제한 기도문과 예식에 대한 답변3.17. XVII. 우리 교회의 의도에 대한 답변3.18. XVIII. 주님과 사도들에게로 돌아가려는 우리 교부들의 결정3.19. XIX. 서품예식서와 교황칙서의 비교를 통해 입증되는 우리 양식의 가치3.20. XX. 교황의 교서는 우리 양식을 부정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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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 사도적 고려에 대한 반론으로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요크 대주교가 공동 명의로 1897년 발표한 교서. #

2. 서문

영국 대주교로부터 전 보편 교회의 주교들에게 인사드린다.

3. 본론

3.1. I. 교황 레오 13세의 교서를 통해 논쟁이 시작된 경위

공통의 구원에 대해 글을 쓸 때, 다른 시기로 미룰 수 없는 논쟁의 여지가 종종 생기는 것은 우리 직무의 행운이다.

최근 9월달에 로마에서 갑자기 편지가 도착했는데, 이미 인쇄되어 출판된 것으로, 교회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뒤집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모든 잉글랜드와 수도의 총대주교였던 친애하는 형제 에드워드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우리에게서 거두어졌을 당시 요구했던 관심을 받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글에서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가장 위대한 학문과 신학적 은혜로 다루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대주교인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진실을 로마에서 온 서한이 발행한 우리의 존경스러운 형제 교황 레오 13세와 전 세계에 정착된 다른 모든 주교들에게 알려지기 위해 쓰는 것이 좋은 일로 보인다.

3.2. Ⅱ. 우리의 답변 목적

그 의무는 특정한 깊고 강한 감정 없이는 이행될 수 없는 정말로 심각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목자장께로부터 보편 교회에서 그의 중대한 직책의 일부를 맡도록 진정으로 안수받았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편지에 표현된 의견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에 접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매 교회에 대한 논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거룩한 명령과 그들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교리를 항상 분명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반대편에서 제기되는 주장의 힘에 우리가 움츠러들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토론을 위해 우리의 답변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3.3. Ⅲ. 우리의 서품과 직분의 질료와 형태 논쟁

본 성사의 본질에서 파생되는 거룩한 직제의 질료와 형상에 대해서는, 손을 얹고 기도하는 잘 알려진 예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주님과 사도들로부터 전해지는 어떤 전통도 찾을 수 없고, 지역 공의회의 법령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며, 보편 세계 공의회의 법령에서는 확실하거나 결정적인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래된 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이 격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참여하지 않은 트렌트 공의회는 그 주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 공의회에서 나온 안수에 대한 부차적 언급과, "성령을 받으시오"라는 말의 힘에 대한 보다 확고한 발언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우리의 감정에 결코 반하지 않는다.

성공회 서품의 유효성에 대해 보다 최근에 더욱 격렬한 논쟁이 있어 왔다. 로마 쪽의 신학자들은 열성적으로 그 문제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다양한 불법성과 흠결을 전가했으며, 반면 더 고상한 감정으로 우리의 변호를 맡았던 다른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나온가최상의 것이 아닌 변론들이 있었다.

우리가 사제를 어떤 결함의 근건로 재서품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재안수하는 관행(이 관행이 예외가 없었던 것이 아니나)이 분명히 널리 퍼져 있음을 알고 있으며, 포르모수스에 대한 가차없는 투쟁과 이단적이고 분열적이며 성직매매의 안수에 대한 오랜 동요에 대해 알고 있으나 로마 교황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토론은 이전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도유의 필요성에 대한 인노첸시오의 서신과 에우제니오 4세의 칙령을 확인하였고, 상당수가 오늘날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16세기의 역사적 문서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후대 교황인 클레멘스 11세베네딕토 14세의 다양한 결정을 확인하였으나, 클레멘스의 결정은 원론을 언급한 것이므로 불확실하였다.

로마 서품서 또한 현재 존재하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때때로 개정되었고, 묻는 이들의 마음을 밝히기 보다는 혼란스럽게 배열되어 있었다. 주교 서품 의식을 숙고하는 사람은, 적절한 안수란 정형화된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는 또한 "서품된 이"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정말로 안수를 받았는지, 또는 서품 끝에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함께 대사제의 손을 얹어 주는 권능이 사제직의 필수적인 부분인지(트렌트 공의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알 수 없다.

누구든지 선출자를 주교로 서임하는 예문을 읽으면, 그는 기도나 축성에서 그를 '주교'라고 부르거나, 그에 대해 '에피스코파테'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서들에서 기도에 관한 한, "에피스코파테"라는 용어는 미사중에 봉헌되는 동안 처음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명백히 부조화와 불명확성으로 인해,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로마 교황이 신성한 직제에 필수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확실히 도출할 수 없다.

3.4. IV. 교황 레오가 논쟁에서 잘 제외한 것들

이같이 우리의 가장 존경스러운 형제가 9월 13일 자로 된 서한 '사도적 고려'에서 촉발한 주장은 충분히 오래되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입증되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 또한 우리는 이 논쟁을 시작하면서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베네딕토 14세까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스콜라 신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진 “도구”의 전달 필요성에 대한 매우 헛된 의견을 내던짐으로써 교회와 진리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다른 오류와 결함을 무시한 것을 잘 해냈는데, 우리 또한 이 회답에서 이것들을 무시할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로마 쪽의 신학자들이 그의 전례를 따라 미래를 위해 그것들을 무시하기를 바란다.

3.5. V. 로마 법정의 관례와 성공회 전례의 형식

그러므로 그의 모든 판단은 로마 법정의 관례와 성공회 전례의 형식, 두 가지 점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우리 교회의 의도에 관한 두 번째 문제와 분리하기 쉽지 않은 세 번째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전자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전자에 대해 먼저 대답할 것이다.

3.6. VI. 레지널드 폴[1] 당시 시행된 관례에 대하여

16세기 로마 궁정과 특사의 관례에 관하여 교황이 다소 길게 썼지만, 우리는 그가 우리만큼이나 불확실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가 이미 잘 알려진 문서에 추가한 것이 없으며 바오로 4세의 Praeclara carissimi의 불완전한 사본을 인용하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553년 8월 5일 이후와 1554년 3월 8일 이전에 레지널드 폴에 부여된 권한은 율리우스가 이후의 편지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늘 사용된 잘못되었거나 변조된 경문을 통해 서품된 직무자에게 "자유롭게 사용" 되었으나, 이는 명확하지도 상세하지도 않지 않은가? 이 기능들외에는 폴이 준수해야할 "행동 규칙"은 불완전하게 알려져 있다.

이 편지들에 서 교황이 언급한 '승진'과 '승진하지 않은' 두 날짜의 구별은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채 은총을 베풀었던 사람들의 경우는 종종 그러했기 때문에 에드워드의 성직자들의 입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누가 이 문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어떤 근거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고, 부분적으로 무지하다. 그러나 우리 측에서는 메리 여왕 (1553년 7월 6일 - 1558년 11월 17일) 치하의 화해의 작업이 폴이 도착하기 전에 왕실과 주교청의 권한 하에 매우 훌륭하게 끝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 불일치와 불균일이 있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그러나 많은 에드워드 시대의 사제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혼인 관계로 인해 자격을 박탈당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우리가 아는 한, 직제의 결함으로 그렇게 발견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재서품되었고. 일부는 이전 서품에 대한 보충으로 당시 우리 주교 중 일부가 매우 중요시했던 예식인 도유를 받았다.

일부, 아마도 대다수는 재서품 없이 그들의 이익에 머물렀지만, 여러 경우에는 새로운 재서품으로 승격되지 않았다. 폴은 1554년 11월까지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았고, 이후 15개월 동안 재일치는 마무리되었다.

그의 작업의 원칙은 그가 도착했을 때 그가 발견한 모든 것의 상태를 인식하고, 가능한 한 쉽게 교황의 패권을 회복하는 데 그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1554년과 1557년에 한 명씩, 혹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두 번째 사람이 폴 밑에서 새로운 명령을 받았으나, 각각 몇 년도에 재서품이 시작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어쨌든 극소수만이 폴이 도착한 후 재서품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경문에 대한 어떤 종류의 보충이나 다른 것을 받았을 것인데, 그 기록은 우리의 명부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교황 특사 폴 아래서 재서품되었다 해도 놀랍지 않은 것이, 그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에우제니오 4세의 칙령을 부록으로 추가하면서, "교회와 성사에 관한 교리에 관하여 여기(잉글랜드에서)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 대주교가 아니라 교황 특사로서 그렇게 했다. 이 칙령은 1556년 초에 공포되었으나 폴은 같은 해 3월 20일에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의 합법적인 대주교 크랜머가 산채로 화형된 날에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고 22일에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로마 교회의 판단이 얼마나 비약적이고 허약했는지를 보여주며, 나아가 교황 레오가 폴의 학식에 극찬을 아끼지 않고 특사에서 "성품성사의 수여에 필요한 조건에 관해" 지시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썼을 때 그는 에우제니오의 칙령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서신의 다른 부분을 슬그머니 내던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폴이 재발행한 에우제니우스 4세의 포고령을 인용한다.

“여섯 번째 성사는 직제의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의 질료는 그 직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수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제직은 성작으로 포도주를, 성반으로 빵을 영접함으로써 수여된다. 복음서를 받음으로써 부제가 되고, 빈 성판이 달린 빈 잔을 내어 줌으로써 하위 직제를 받고, 다른 직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직무에 관련된 것을 할당받음으로써 직무을 맡게 된다. 사제직의 형상은 다음과 같다 :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교회에서 희생을 바치는 권능을 받으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고 로마 교황청에 자세히 나와 있는 다른 직제의 형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성사의 일반적인 집전자는 주교입니다. 그 효과, 은총의 증대는 사람이 합당한 성직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수와 입회 후보자들에게 성령의 부르심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우제니오 1세는 다른 성사에 대한 설명으로 명백하게 알 수 있듯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보충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로마 쪽 저자들이 가끔 말하기를 좋아하듯이, 아퀴나스를 신중히 고수하며 마치 그가 주인인 것처럼, 성사의 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또한 칙령 앞부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성찬에는 세 가지 요건이 있는데, "질료"로서의 사물들, "형상"으로서의 단어들, , 그리고 교회가 베풀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사을 행하는 직무자로서의 사람이다. 이중 어느것이라도 없으면 성사는 행해지지 않는다."

1550년 3월에서 1552년 11월 1일까지 우리 교회에서는 도구의 전달이 어느 정도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즉, 주교의 경우 빵이 든 성반, 주교의 경우 목장, 양쪽 모두에게), 그것들에 따르는 형상 이미 거의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1552년 성배와 목장의 전달을 중단하고 성경의 전달만을 남겨두었다. 에드워드 1세는 1553년 7월 6일에 사망했다.

그런데 이 법령에 따르면, 이 모든 장로들은 재서품되어야 한다. 그러나 폴의 의견은 그가 실행한 것과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또한 바오로 4세 자신도 그의 지침서 "Regimini Universalis"에서 "올바르고 적절하게 서품된" 주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기는 하지만 장로들이 서품되는 형식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3.7. VII. 존 고든 재판에 관하여

그의 법정에서의 관례에 대한 교향의 견해의 두번째이지만 더 강력하지는 않은 기초는 1704년 4월 17일 목요일, 일반적으로 성무성성으로 불리는 이단심문관 총회에 회부된 전 갤러웨이의 주교였던 존 고든의 재판에 대한 클레멘트 11세의 판결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교황 레오의 서한에 의해 충분히 해소되지 않은, 성무성성을 감싸고 있는 어둠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명확하게 다룰 수 없는 만큼 짧은 답변을 하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에 내려 실었다.

다만 이번 사건을 그의 판단의 근거가 약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보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애초 고든이 직접 로마 의례에 따라 서품을 받기를 탄원하였으므로 이 사건은 반대측에서 들을수 없았다.

둘째로, 그의 탄원서는 "선술집 우화"가 기본이 되었고, 우리의 의례에 대한 거짓말로 인해 무효화되었다.

셋째, 교황이 인용한 '불가사의한 진실성'에 대한 새로운 문서들은 여전히 불명확하며, 그는 그 문서들에 대해 마치 교황이 그 어조와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논하고 있다.

넷째, 교황 레오 2세의 결정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성무성성 칙령은 그보다 약 1주일 전에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고, 1893년까지 로마 신학자들이 왕왕 권위 있는 것으로 공표한 아비시니아 사제 서품에 관한 성무성 자문단의 답변과 거의 일치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공정한 판단을 위해 그 문제가 제기되려면 그러한 모든 문서들이 공개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은 고든이 로마 교회의 소품직 이상의 것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즉, 그는 특정 성직으로 봉사한 것에 대한 성직록을 받을 만큼의 것만을 했다.

3.8. Ⅷ. 질료와 형상에 대하여 우리가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점과 성사의 의도에 대하여

비록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 외견상 행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교황은 그러한 약한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그것을 새롭게 다루기로 결정한 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다. 그가 그 사건을 성무성성에 제출한 한, 그들은 그들의 전통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고든의 사례에서 아무리 근거가 나쁘더라도 통과된 판결에 대해 이의를 표명할 수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더 나아가 그가 문제 자체를 다루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각 단계를 따를 때 우리의 의견은 그의 판단의 주요 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손을 얹는 것을 서품의 “질료”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형상"에 대한 그의 판단은 그렇게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가 그 형상이 우리의 의견이기도 한, 수여할 직무에 적합한 기도 또는 축도라고 말하려는 것으로 추측한다. 다만 우리는 교황이 “외부적으로 표명되는 한” 성품을 수여하는 교회의 의도를 조사하는 것이 옳다고 제안했을 때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제사장의 내면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찬의 타당성을 이것에 의해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교회의 의지는 더 쉽게 확인될 수 있으며, 또한 양편 모두 진실하고 충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서품을 받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교리, 성례전, 장정을 올바로 수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요구함으로써 일반적으로 이러한 의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약속에 불성실한 사람은 정당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의 전례에서 우리는 정기적으로 “모든 주교와 사제보들이 그들의 생활과 교리로 (하느님의) 참되고 생생한 말씀을 제시하고 (그분의) 거룩한 성례전을 올바르고 합당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그러나 교회의 의도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한" 즉, —하나님의 말씀 또는 보편 교회의 알려진 확실한 규정에서 지시된 생략된 것이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은 — 기회가 발생할 때 모든 속주와 국가에 속한 자유로 인해 만들어진 누락과 개정이 아닌, 문제의 핵심에 직접적으로 맞닿는 공적 형식 및 분명한 선언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중세와 보다 근래 세기의 관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형제들이여, 그가 얼마나 분명히 복음의 자유와 그리스도교국의 참된 성격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성사의 유효성을 판단하는 이 방법을 따른다면, 우리는 보편 교회의 판단에 따라 주님께서 정하신 질료와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례만 제외하고는 모든 성사를 의심해야 한다.

3.9. IX. 성사의 질료와 형상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과도한 강조의 불필요성

IX. 그러므로 우리는 안수는 서품의 질료임을 교황과 함께 인정한다. 우리는 그 형상이 부여될 사역에 적합한 기도 또는 축복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교회의 의도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한, 그것이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마음과 보편 교회의 규약과 일치하는지 발견할 수 있도록 확인하여야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세르의 빌럼 (서기 1215년) 시대 이래로 학자들이 자주 강론한 교회의 각 성사는 정확히 정의된 단일한 형상과 질료를 가져야 한다는 교의에 그렇게 큰 무게를 두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것이 로마와의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교황이나 또는 박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이나 가톨릭 교부 또는 공의회에서 정의하지 않은 이런 형상이나 질료를 필요에 따라 인정하도록 설득해야 했다고 가정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과오로 인도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했듯이 세례는 그 형상과 질료 모두가 매우 확실한 하나의 성사로서 홀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례의 성격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세례가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의 입구이고 긴급한 필요가 있는 경우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사역을 베풀 수 있는 한, 유효한 세례의 조건을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찬례(덜 중요하게는 무교병, 소금, 물, 기타에 관한 질문)에 관해서는 충분히 확실한 질료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것의 완전하고 본질적인 형상에 관해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견진의 문제는 그렇게 완전히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서로 비난받아야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견진의 형상는 불확실하고 매우 일반적이며, 우리 각각의 교회들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이 다소 적절하지 않게 말해지는 기도, 즉 축도이다. 그리고 다른 성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3.10. X. 견진 성사가 잘 보여주는 점

그러나 견진이라는 이 주제는 교황이 제안한 문제에 많은 빛을 던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좀 더 다루어져야 한다. 그는 손을 얹는 것이 "견진을 위해 똑같이 사용되는 질료"라고 진정으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견진 문제는, 그의 판단으로는, 우리도 사도적 전통에 따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손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로마 교회는 부패한 관습에 의해,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손을 뻗지 못하게 하거나, 단순히 "견진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손을 뻗는 것으로 개인에게 시행하는 것을 대신했다.

오리엔탈에서는 (에우제니오 4세와 함께)그 질료가 성유라고 가르치고, 이 의례에서는 안수를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성사에서 고정된 질료와 형상에 관한 교의를 시인한다면 로마에서는 과거 수세기간 견진을 불완전하게 행하였고, 그리스에서는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자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실제로 그들의 교부들에 의해 도입된 부패를 고백하고, 우리가 배웠듯이, 많은 곳에서, 이 점에 대한 법전이 일부 교황칙령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로마 성체성사에서 개종한 동양인들에게 재견진이 필요한지 또는 로마인들은 그 문제를 바꾼 자신들도 그것을 타락시킨 자신들 만큼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공평하다.

세례를 제외하고 교회의 모든 성사가 그 점에 있어 불명확한 만큼 교황이 뭐라고 대답하든, 어느 경우에나 고정된 형상과 질료에 대한 교리가 확고히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명백하다.

3.11. XI.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리와 우리 자신의 전례의 비교

그러므로 우리가 묻건데 교황이 성품 수여에서 명확한 형상을 발견하는 데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서품양식을 구성한 후에 공표된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문 중 두 구절을 제외하고 그가 만든 증거를 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그는 기독교 사제직의 주된 은혜와 권능은 주님의 몸과 피의 봉헌과 축성이라고 유추한다. 그 공의회의 권위는 분명히 우리나라에서 인정된 적이 없으며, 우리는 많은 진실이 거짓과 확실한 것이 불확실한 것과 혼합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교황이 인용한 구절들에 대해 답한다. 우리는 성체 봉헌에 대한 가장 큰 경외심을 가지고 그것을 교회의 다른 직무자가 아닌오직 올바르게 서품된 사제들에게만 허용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찬례 희생의 교리를 진정으로 가르치고 그것이 "단순한 십자가 희생의 기념"이라는 공의회에서 인용한 것으로 간주되는 견해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할 때 -우리의 마음을 주께 올리는 동안, 이미 드린 예물을 거룩하게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할 때에,- 사용하는 예전에서 그 시간에 바쳐지는 희생을 다음과 같은 용어로 나타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변인이시며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죽음을 그의 교훈에 따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영원히 기억한다. 우리가 먼저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그런 다음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간청하고 대표하며, 이로써 온 교회를 위한 주님의 수난의 죄 사함과 다른 모든 유익을 자신 있게 간청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물의 창조주께 그분의 피조물의 의무로 이미 정해진 대로 우리 자신을 희생으로 바친다.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사제와 함께 참여해야 하는 이 모든 행위를 우리는 성찬 희생 제사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게다가 교황이 우리에게 "믿음과 예배, 믿음의 법과 기도의 법 사이의 필요한 연관성"을 다소 심각하게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로마 전례에 대해 그편과 우리의 편 모두에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는 것은 정당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미사 전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생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성체 공식과 충분히 일치하지만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의회에서는 희생을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는데, 하나는 전례학과 기독교의 지혜에 동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체성사의 속죄를 주제로 한 위험한 대중신학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제 미사 전범에는 바쳐지는 희생 제사가 네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첫째, 그것은 "찬양의 희생"이며, 전체 행동을 관통하며 말하자면 그것을 지지하고 모든 부분이 되는 관념이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과 그분의 온 가족이 드리는 예물로서, 그분의 아들 우리 주님의 “우리에게로의 몸과 피”를 간구하는 예물이다. 셋째로 그것은 영생의 거룩한 빵이자 영원한 구원의 성배라고 불리는 (즉,-비록 주님의 말씀이 사제에 의해 이미 그들에 대해 말씀되었지만- 들판과 나무의 열매에 관해 Innocent 3rd가 올바르게 설명했듯이,) "그분의 선물이요 은혜"이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Supra quae propitio 기도문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그리고 로마인의 의견에 따르면 완전히 축성된 이미 바쳐진 제물은 족장 아벨과 아브라함의 제물, 그리고 멜키세덱이 바친 제물과 비교된다.

이 마지막은 “거룩한 희생, 흠 없는 희생제물”이라고 불리며,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 대해서만 아니라 바쳐지는 것들에 관해서도 알려 준다. 그런 다음 교회는 그들이 거룩한 천사의 손에 의해 높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옮겨지기를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일련의 성인들의 이름 뒤에는 성찬 희생 제사보다는 땅의 열매에 대한 축도에 더 적합한 것처럼 보이는 기도(Per quem haec omnia)가 나온다.

그러므로 트렌트 공의회가 제시한 신앙의 법이 기도의 법의 경계를 다소 벗어났다는 것은 이미 말해온 것으로부터 분명하다. 이 문제는 참으로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높고 깊은 정신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강한 감정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존경심을 가지고 다루어져야 하고, 미묘한 논쟁, 희생의 방식에 대한 과도하게 정확한 정의, 또는 어떤 면에서 영원한 제사장의 희생과 교회의 희생을 통합하는 관계에 대한 어떤 것들은 눈에 띄게 하기보다 피해야 하며 기독교인 사랑의 유대감으로 여겨져야 한다.

3.12. XII. 3세기와 6세기 로마 형식과 비교를 통한 답변

따라서 장로과 주교 서품을 위한 우리의 형식과 의도를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황은 만약 우리가 덜 중요한 것들을 생략한다면, "사제직이나 그 은혜와 권능, 특히 십자가에 바쳐진 희생의 단순한 기념이 아닌 그 희생 속에서 주님의 진짜 몸과 피를 봉헌하고 바치는 힘"이 장로의 직제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썼다. 그가 주교 서품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견해로는 어떤 식으로든 "대제사장직"이 귀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 모두 이상하다. 3세기 초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된 로마의 형식에서, (이름을 제외하고 정확히 같은 형태가 주교와 장로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볼 때), "대제사장"이나 "사제"에 대한 언급이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희생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가 낮과 밤에 (하나님께) 바칠 기도와 의무"가 단독으로 언급되며, 죄를 면해주는 능력이 언급된다.

아마도 6세기의 것으로 비정되는 고대 로마의 성사문에서도 장로의 서품을 위해 오직 세 번의 기도문만이 사용된다. 오레무스 델렉티시미와 엑소우디 노스는 짧은 모음집이다. 세 번째는 성찬례 서문처럼 진정한 축도로 그 전에 손을 얹는 것이 이루어지며, Domine sancte pater omnipotens aeterne Deus, honorum omnium 으로 시작된다.

6세기부터 9세기까지 그리고 아마도 그 이후의 이 기도들은 다른 예식 없이 로마 교회에서 장로 서품을 위한 전체 예식을 구성했다. 거의 변경되지 않은 이 기도는 로마 교황청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장로의 서품을 위한 예배의 핵심이 되었지만 더 긴 양식에 첨부되었던 안수는 시작 부분으로 넘어가고 미사 마지막에 다시 주어진다. 그러나 축도에서 “사제직”은 장로들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그 일련의 기도들 중 어느 것도 희생의 권능이나 죄 사함의 권능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 대부분의 Pontificals 두 번째 모음집에서 기도하는 "사제의 은혜" 또한 영어와 외국어로 단순히 "영적 은혜"이다. 그러나 이 형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유효하다.

주교 서품 형식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이 나올 수 있다. Collect와 축복은 오늘날 Pontificals에 약간만 바뀐 채 남아 있다. 그들은 Exaudi Domine supplicum preces (now Adesto) Propitiare Domine, and Deus honorum omnium을 시작한다. 이 중 두 번째는 '사제 은혜의 뿔', 세 번째는 '대제사장'을 언급하고 있지만 교황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ontificals의 나머지 내용은 모두 후기 시대와 특히 갈리아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특정한 성별과 봉헌의 권능”과 동등하게 강조하여 언급한 죄 사함의 권능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장로의 안수에서는 11 세기까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주교의 축성을 위한 고대 로마 양식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교의 축도로 긴 갈리카 보간법 Sint speciosi munere tuo pedes eius up to ut fructum de profectu omnium consequatur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에 호소하는 교황은 그에 따라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로마 형식은 희생과 죄 사함의 문제에서 결함 때문에 무가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공의회의 권한은 직제에 필수적인 형식에 대한 질문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11세기 동안 영국과 다른 곳에서 사용되었으며 동일한 단순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고대의 주교 축성 형식을 인용할 수 있다. 그것은 'Pater sancte omnipotens Deus, qui per Dominum'으로 시작되며, 봉헌되려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옛적에 제정된 성사의 신비를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부름을 받은 대제사장직에 성별되게 하소서.” 라 하지만 희생이나 죄를 사하는 권능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다.

3.13. XIII. 대제사장 명칭의 불가결하지 않음에 대해

주교라는 칭호에 대해 우리의 간단하고 즉각적인 대답은 축성의 형태로써 이 직분을 형성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명칭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교회는 그녀의 총대주교에게도 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때때로 성사에 나오는 '교황의 영광'이라는 단어는 교회의 계급이 아니라 세속 또는 유대교와의 구별을 나타낸다.
우리는 사도들이 떠난 후에 교회의 수석 목자가 되어 서품과 견진의 권한를 행사하고, 현재는 단일 "지역" 또는 교구라고 불리는 곳을 장로들의 모임과 함께 규율하는 사람들의 직분을 주교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는 데 만족한다.

그리고 교황은 고대의 건전한 관습에 따라 편지의 서두에서 이 직제에 자신이 속해 있다고 간주한다. 장로가 사제인 것처럼 주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제이며, 초기에 그들은 장로보다 이 칭호를 더 많이 누렸다. 어쨌든 라틴 교회에서 장로들이 스스로 사제라고 불리게 된 것은 4세기나 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교들은 축성의 형태로 대제사장으로 불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교의 사제직에 대한 문제는 초기에는 아마도 달랐을 것이다. 9세기까지는 확실히 그리고 11세기까지는 아마도 그저 부제인 이가 종종 사제직을 거치지 않고 주교로 임명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실제로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예를 들어, 교황청에서 여전히 사용되는 “사제 은총의 뿔”에 관해 언급하는 기도에서 사용되듯이 주교에게 사제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이 적절했다. 그러나 이러한 Per Saltum[2] 관습은 (법률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지된 적은 없지만) 오래전에 사라졌고 모든 주교는 이미 사제 재직 기간 동안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제직을 새롭게 부여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솔직한 의견을 말한다면, 그것은 특별히 훌륭하거나 정규적인 절차가 아니고 로마인들이 요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교의 주요 의무"라고 부른 만큼, 고위 사제직이나 다른 어떤 새로운 사제직도 주교에게 귀속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서품에서는 대제사장이나 최고 사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도 다른 공문서에서는 이 용어들을 피하지 않는다. 라틴어판 공동기도서 1560년, 12명의 주교가 1580년 그라인달 대주교를 대신하여 작성한 서신, 휘트기프트 대주교가 도버 주교에게 보낸 서신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3.14. XIV. 두 가지 주장에 대한 답변

우리의 양식에 반대하며 교황에게 자신을 특별히 추천하는 두 가지 진전된 주장은 좀 더 많은 답변을 받을 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서품예식서가 발표된 지 약 100년 후인 1662년에 우리가 "성령을 받으시오"라는 구절에 주교의 직무와 과업을 정의하기 위한 다른 단어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이후의 추가 사항이 없는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자체로는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며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는 서임하는 주교와 보조 주교의 안수로서 주교를 서임할 때 유일한 형식은 "성령을 받으시오"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후의 교황청에서는 로마 양식을 추가한 Exerter Book을 제외하고 성령께서 성가 '오소서, 성령이시여'에 의해 모셔진다.

그리고 나서 "사제의 은혜의 뿔"에 대한 기도가 이어졌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주교나 감독이라는 단어는 교황청 기도문에도 성찬전례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교황의 제안에 따라 1550년 이후의 우리 교부들이 주교라는 이름을 생략하는 형태의 잘못을 하였다면, 현대 로마 교회도 함께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서품 예식서에서는 그 때에 디모테오를 에페소의 주교로 서임하는 것을 언급한 것으로 믿어졌고 명백히 이런 의미로 사용된 바우로 사도의 말이 즉시 뒤따랐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대를 깨우쳐줍니다. 내가 그대에게 안수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그 은총의 선물을 생생하게 간직하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은 우리에게 비겁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를 주십니다."(디모테오 2 1,6-7)

형제들이여, 이것들은 직분이 은총을 부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인용한 유일한 단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형식은 로마 교회에서처럼 한 문장으로 포함되어 있든 우리 교회에서처럼 두 문장으로 포함되어 있든 충분한 것이다. 진정한 의도가 공개적으로 선언되고 다른 기도문과 선출(주교의 직분, 사역, 직제를 분명히 언급하는), 시험 및 기타 유사한 방법을 행한다면, 우리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충분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로마나 영국를 막론하고 더 고대의 교황칙령에서나 어느 시대의 동방교회 문헌에서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3.15. XV. 사제 서품 형식에 대한 유사한 답변

1550년 이후 우리 사이에서 장로를 임명하는 형식도 똑같이 적절하다. 주님의 제도를 우리의 마음에 일깨우는 '성체' 기도가 끝난 후, 주교가 보조사제와 함께 안수를 하는데, 이는 교황교서에서 가져온 '필수적' 형태이지만 동시에 더 완전하고 엄숙한 형태이다. "성신을 받으시오"라는 말 뒤에는 현대 로마 교황청에서처럼(교황이 이상하게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너희가 누구의 죄를 사하여 주든지 그들은 사함을 받을것이요, 뉘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가 따르며, 그리고 나서 우리 조상들이 매우 적절하게 추가한 복음서(S. Luke xii 42)와 S. Paul(고린도전서 4장 1절)의 말씀 및 "당신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의 충실한 제공자이라.”가 따른다.

이 형식은 교회의 다른 어떤 직무도 아닌, 이른바 열쇠의 권세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신비를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하는 사제에게, 그가 사제로 남아있든 주교로서 더 높은 의무로 나아가든 적합하다. 그 다음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기에, 거룩한 사역의 주요 기구이며, 그 자체에 안수받는 사람의 특별한 직분에 따른 다른 모든 권능이 포함되는 성서의 전달과 함께 한 사람이 그 직무에 임명된 영역에서 설교하고 성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의식이 행해진다.

그리고 고든의 경우를 볼 때, 이러한 형식들이 말로만 다를 뿐 아니라 정말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마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전자의 '성령을 받으시오'는 그 뒤에 나오는 안수와 함께 사제로서의 전반적인 권한과 능력을 부여하며,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그 인물에게 인호를 새긴다. 두 번째로 성경의 전달과 함께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공적인 봉사를 드리고 자신의 교구나 치유사역에서 그의 책임에 맡길 기독교인들에게 권위를 행사할 권리를 준다. 이 두 위임은 함께 기독교 사제직에 필수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의 의견으로는 성사집과 교황칙서에서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에 1560년에 출판된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사 및 공동기도서"의 라틴어 판이나 라틴어로 쓰여진 다른 공공 문서에서도 사케르도스라는 용어와 그 관련을 피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XVI세기에 출판된 우리의 성경 번역판에서 다른 곳에서 presbuteros는 Elder로 번역될때 iereus라는 단어가 Priest(성공회 서품식 등에서 항상 사용되는 단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1662년 '주교나 사제의 직책과 업무를 위하여'가 추가되었을 때, 이는 로마와의 논쟁이라는 관점보다, 우리의 기도서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위한 근거를 찾으려는 장로교인들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은 왕이 살해되고, 그의 아들이 유배되고, 교회 정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영국 국교회가 장로교인이나 여타 혁신가들과 벌인 논쟁은 로마인들과의 그것보다 훨씬 더 치열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단어들은 형식에 전례적 완성을 주기 위해 추가되지 않았다. 언급된 변화는 우리를 교황으로 더 가까이 데려가는 대신 멀어지게 했다. 따라서 개정의 목적은 직제들의 차이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교황의 인지 밖에 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국적과 교회의 분리로부터 생겨난 우리의 기도서를 해석의 어려움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16세기 형식은 그 자체로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제사장 직위에"라고 불리는 자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선한 것들을 주는 것은 그 당시 형태의 일부였으며, 시행 직전에 주교가 말하곤 했다. 하지만, 새로운 단어들이 분명히 같은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 시대의 것을 대신한다.

교황도 이러한 변화를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여러분의 관심을 끌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가 1662년의 형식이 아마도 한 세기만 더 지났다면 충분하다고 간주되어야 한다고 제안할 때 그의 편지의 이 부분에서 약간의 주저를 나타냄을 주목한다.

또한 그가 같은 서품예식서의 다른 기도로부터 우리의 사례 중 (그가 믿기로는)"최근에" 구했던 도움에 대해 계속 주장하는 것을 볼때; 비록 이 호소는 최근의 것이 아니라, 로마 측의 추가적인 단어에 대한 논쟁이 처음 우리의 주목을 끌었던 18세기에 이루어졌음에도 그 형식이 그들이 부르는 대로 "바람직한" 것이든 "필수적인" 것이든 하나의 기도나 축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결합에 의해 함께 묶인 일련의 공식으로 구성된다고 믿는 신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또한 교황이 전체 서품식이 단일한 행동이며, 그 질료와 형상이 서로 분리되어 있어도 일어나는 일이 도덕적 전체를 구성한다면 (교황청의 예에서처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요한 드 루고 추기경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3.16. XVI. 우리 교부들이 삭제한 기도문과 예식에 대한 답변

그러나 교황이 최고의 중요성과 안정성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논쟁은 우리의 형식에 어떤 단어를 추가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머지 의례에서 특정한 행위와 기도를 제거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의 편지는 "성공회 의례에서 기도자들이 목적에 불충분함을 보여주는 다른 이유들을 제쳐두고, 가톨릭 의례에서 사제들의 존엄성과 관직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든 의도적으로 제거해버렸다. 따라서 그러한 형태는 성찬에 적합하거나 충분하다고 여겨질 수 없으며, 이는 성찬의 본질적인 의미를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니며 또 어떤 면에서는 독자를 오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우리 교부들과 우리 자신에게 불공평한 말을 덧붙인다.–"서품 전체에는 사제직의 희생, 봉헌, 제물을 바치는 능력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든 흔적들이 의도적으로 제거되고 제거되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사실들에 대해 무지한 채로) 이 예식서가 건전하고 올바른 의미로 이해 되고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린다고 생각하고 있는 "최근에 모인 그리 많지 않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우리가 성사를 부정하거나 부패시키며, 마침내 장로와 주교의 직분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실재를 가지지 않는 단순한 이름”으로 남을 때까지 봉헌과 희생에 대한 모든 생각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이 거칠고 사려 깊지 못한 말들에 대한 답은 우리가 그를 두고 그가 우리 교회의 행위를 단순한 추측으로 해석하고, 16세기 교회 정부에의 합법적인 주교들을 그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기준으로 비난하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새로운 칙령을 스스로 내리면서 미끄럽고 위험한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경고했을 때 이미 부분적으로 만들어졌다.

국가 교회들이 자신들의 전례를 개혁할 자유가 로마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나중에 부분적으로 보여주겠지만 분명 '가톨릭 전례'은 없지만, 로마교회가 승인한 형식도 서로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황은 그러나 서문에 명시된 우리 교회의 잘 알려진 의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우리 조상들이 항상 자신들 앞에 세운 원칙과 그들의 행동을 어떠한 불리한 해석 없이는 설명하지 않는다.

3.17. XVII. 우리 교회의 의도에 대한 답변

이제 우리 교회의 의도는 단순히 그 안에 새로 정형화된 일부분이 아니라 서품 예식서의 제목과 서문에 꽤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The title in 1552 ran “The fourme and maner of makynge and consecratynge Bishoppes, Priestes and Deacons.” The preface immediately following begins thus:—“It is euident unto all men, diligently readinge holye Scripture and auncient aucthours, that from the Apostles tyme there hathe bene these ordres of Ministers in Christ’s Church: Bishoppes, Priestes, and Deacons: which Offices were euermore had in suche reuerent estimacion, that no man by his own private aucthoritie might presume to execute any of them, except he were first called, tried, examined, and knowen to have such qualities as were requisite for the same; And also, by publique prayer, with imposicion of hands, approued, and admitted thereunto. And therfore, to the entent that these orders shoulde bee continued, and reuerentlye used and estemed, in this Church of England; it is requysite that no man (not beyng at thys presente Bisshope, Priest nor Deacon) shall execute anye of them, excepte he be called, tryed, examined and admitted, accordynge to the form hereafter folowinge."

또한 "모든 사람은 완전히 나이가 든 때에 주교로 서임되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의식 자체에서 주교에 대한 "축성"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과 원시 교회의 다른 목회자들을 통해 이러한 직책의 계승과 지속은 또한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 앞에 나오는 "성체적" 기도문에서도 분명하게 암시된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의 의도는 물론 사도들로부터 받고 그 때까지 사용되었던 이 직분을, 가장 이른 시대부터 내려오는 직분을 유지하고 계속하여, "경건하게 사용하고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황이 지나치게 침묵하고 있는 점이다.

3.18. XVIII. 주님과 사도들에게로 돌아가려는 우리 교부들의 결정

그러나 이 모든 것들과, 그것과 같은 종류에 속한 다른 것들은 교황 레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실재가 없는 이름들”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교부들의 근본 원리는 모든 것을 성경에 계시된 주님의 권위에 맡기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고대 로마 교회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대 라틴 교회와 동방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잘 알려진 손을 얹고 축복의 말을 하는 동안 서품되는 주교의 머리 위로 복음서를 들어올리는 것을 포함해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고 추가된 예식을 폐지했다.

그래서 우리 교부들은 인호를 새기는데 손을 얹는 한 가지 질료를 적용하고 위임된 양떼를 사목하고 권한을 행사하는데 성경 혹은 복음서를 전달하는 한 질료를 적용하였다. 이 마지막은 아마도 새로운 주교 취임식과 이와 유사한 예식에서 빌린 것 같다. 이와 같이 교황칙서에서는 반지가 주어진 후에도 여전히 복음서가 주교에게 전달된다.

장식과 도구의 전달, 손과 머리의 기도문을 동반하는 축복과 도유과 같은 외국의 많은 지역, 특히 갈리아에서 고대 로마 예식서로 들어온 후대의 다른 의식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 도구의 거양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소품직의 양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서면으로 언급된 가장 이른 시기인 11세기 이전에는 교황청에서 알려진 바가 없다. 손의 축복을 위한 기도는 16세기 이전에도 주교의 재량에 따라 말하거나 생략할 수 있었다. 그 기름부음은 로마인이 아닌 갈리카인과 영국인의 관습으로 'Leonine'과 'Gelasian' 성사집에 부재할 뿐만 아니라 Mabillon의 8번째 및 9번째 서품예식서와 분명히 8세기와 9세기의 관습을 나타내는 S. Amand의 성사집에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9세기에 교황 니콜라스 1세가 부르쥬의 루돌프에게 로마 교회에서 사제나 부제의 손에 성유를 도유하지 않는다고 쓴 것을 발견했다. 이런 종류의 것을 언급하는 첫 번째 저자는 영국인 길다스이다.

Amalarius와 우리 자신의 교황칙서에서 수집 된 것처럼 로마 외부에서 IX 세기와 X 세기에 처음 등장한 머리의 기름 부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아론의 봉헌식을 본떠 만든 것이 분명하다.

3.19. XIX. 서품예식서와 교황칙서의 비교를 통해 입증되는 우리 양식의 가치

그렇다면 복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우리의 교부들이 현대 언어로 공개적으로 읽어야 할 전례에서 이 기도문들을 삭제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로마인들이 추구했던 것과 확실히 반대되는 길을 따랐다. 로마인들은 거의 복음적인 단순함에서 출발하여 갈리아인의 장식으로 의식의 엄격함을 완화시켰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사람들과 사제들의 구분을 강조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차용한 의례들을 추가했다.

이러한 의식이 "경멸할 만하고 해롭다"거나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쓸모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불가결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우리 아버지들이 백성들과 성직자들의 사용을 위한 전례문을 단숨에 작성했을 때 그들은 거의 로마가 시작했던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의 거룩한 교부와 그들이 혁신자들이라 부르는 우리의 교부 양쪽 모두가 가장 확실한 지도자들인 주님과 사도들을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전적으로 제물을 바치는 현대 로마교회의 사례가 우리의 모방을 위한 유일한 모델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교황은 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주저하지 않고 "사제들의 존엄성과 직위를 높이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 서품주님의 기도에서 "의도적으로 제거"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이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의 서품예식서가 여러 방면에서 그리스도의 제정에 속하는 사제직의 본질과 세계교회에서 사용되는 가톨릭 의식의 효과에 속하는 것들을 더 명확하고 충실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로마 교황청의 그것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것은 교황칙서와 서품예식서를 비교함으로써 보여질 수 있다.

로마 양식은 대부제의 발표와 첫번째는 성직자와 사람들, 두 번째는 서품후보자들에게 행해지는 주교의 이중의 연설로 시작한다.—사제 서품식에는 공적인 examination 이 없기 때문에,

그러고 나서 주교와 보조하는 사제들이 아무 말 없이 손을 얹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의례에 대해 우리는 루고 추기경의 의견을 인용했다. 그리고 두 개의 짧은 봉헌과 이제 주교의 "그의 가슴 앞으로 손을 뻗으며" 하는 더 긴 축복의 세 개의 고대 기도문이 행해진다. 고대 서적에서 "봉헌"이라고 불리는 이 기도는 모리누스 시대부터 무게 있는 권위자들에 의해 로마 서품식의 진정한 "형상"로 간주되고 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옛날에는 이것은 손을 얹는 것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몸짓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동안에도 견진에서와 같이 손을 뻗는 것이 손을 얹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쨌든, 옛 로마의 서품식이 유효하다면, 오늘날까지도 그 교회에서 장로들의 서품이 완료되었다고 바로 이 기도문은 말해진다.

한 때 교회의 어떠한 성사에 적합했으며 여전히 변경되지 않고 완전하게 유지되는 모든 "형상"은 이전과 동일한 의도를 유지한다고 간주되어야 하며, 일종의 신성 모독 없이는 그 뒤에 다른 것들이 조용히 추가되었기 때문에 미덕을 잃었다고 주장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로마 양식의 더 최근 부분의 의도는 고유한 힘의 더 오래된 부분을 비우는 것이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다음과 같이 부적절하게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첫째, 이미 서품된 제사장들이 희생의 제사를 위한 다양한 예식과 의례로 준비되어야 한다.
둘째, 그들은 명시적 용어로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야 한다.
셋째, 그들은 미사 거행에서 사제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은 죄를 사하는 또 다른 제사장의 권능을 공개적으로 부여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Sarum Pontifical에서 우리는 "당신의 사제들의 이 손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읽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1662년에 더한 거처럼 고대 “형상” 뒤에 오는 모든 것은 그저 불가결하지 않은 것이다. 위에 명시된 권한은 고대의 방법과 같이 묵시적인 방법으로 전달되거나 명시적으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달 방법은 서품의 효능과 관련이 없다.

우리 교부들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점들을 인식하고,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성변화에 관한 스콜라적 교리와 미사에서 십자가 희생의 반복(으로 믿어지는)에 대한 보다 최근의 교리가 대중의 느낌으로 이어지는 특정한 의식과 기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고, 서품 의식 전체가 더 견고하고 순수할 뿐만 아니라 더 완벽하고 고귀해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첫 번째 기도의 고대성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었지만 학식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모든 효력을 "필수적인" 형상에 할당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관심을 전자보다는 후자로 돌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선 단순함을 목표로 하고, 제사장의 은총과 권능이 어느 순간에 주어졌는지를 의심하지 않도록 전체 의식의 한 부분에 집중하였다. 왜냐하면 단순성의 힘은 설령 좋은 뜻에서 결합된 것이라도 의식들이 이어진 경으보다 신성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직과 사도들의 사역의 승계를 선언하는 기도를 맨 앞에 놓고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함께 안수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기도 전에 손을 얹는 로마교회가 아니라 먼저 "기도에 굴복"하고 나서 손을 얹고 직분을 전하는 사도적 교회의 예를 따랐다. 둘째로 사제직의 여러 직무을 생각해 본 결과, 교황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사항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주교의 연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직책들이 언급되었다. — "사제의 의무는 제물을 드리고, 강복하고, 주재하고, 설교하고, 세례를 드리는 것이다." 등등이 있고, 장로에 대한 언급은 "그들에게 맡겨진 청지기 직분에 대해 그들이 알아야 할 것"에 대해 언급되었지만 다른 양식에서는 희생 제물을 바치고 죄를 사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권능을 전달하는 양식은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복음에서는 그것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만 사목의 의무가 교황칙서에서 거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특히 주교가 전달해야 하는 고귀한 연설과 다음과 같은 매우 엄숙한 시연에서 사도, 파수꾼, 주님의 청지기의 사목 직무를 우리 사제들 앞에 제시한다. - 이는 읽고 성경과 저울질하여 비교해야 하는 말로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예식서의 가치를 아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사와 관련하여, 그들은 단지 경외심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러한 말들이 필수적인 "형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필수적인" 형태의 개정에서 주님의 친히 하신 말씀에 첫 번째 자리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사제들에게 (옛 성사집의 말씀을 사용하도록) 모든 '옛적 제정된 성사의 신비'를 위임하였으며, 그것들 중 어느 한 면을 높이거나 다른 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인호를 새기는 형상와 관한권한을 부여하는 형상을 병치하였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자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와 유사한 문제에서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모범을 따랐다. 왜냐하면 주님은 성사의 합당한 봉사를 가르치기 위해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즉 가서 모든 민족에게 가르침과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고 선한 목자이신 그 분 자신과 그분의 모범을 통하여 배움을 얻은 그 제자들의 사목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한 8장 11절—18절 및 1장 3절,16절)

그분은 또한 말씀의 전파, 택하신 종들에게 맡겨진 청지기 직분, 그분을 대신한 사도들과 제자들의 사명, 교회에서 죄인들의 회개와 죄 사함, 서로에 대한 상호 봉사에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에 속한 다른 많은 것들관한 많은 일들을 복음을 통해 전하셨다. 이것은 신성한 지혜이신 분께서 특별히 당신의 사자, 파수꾼, 청지기들에게 당신이 떠난 후에 세상에 증거하고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거룩한 백성을 합당하게 준비시키도록 지시하시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도들도 그렇게 했으니, 성 베드로는 동료 장로로서 장로들, 즉 장로들과 주교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먹이라”고 권고하고 “목자장이 오실 때에 너희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1-4절)라고 하였을때 이에 대한 증인이었다. 성 바울은 자신의 입술로 에베소의 노인과 주교들을 훈계하고(행전 18장~35장) 그들에게 비상한 영적 능력을 가진 서신(엡. iv 11~13장)으로 가르친 증인이다.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영국인 전체가 그토록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교황 성 그레고리오 또한 증인이다. 그는그의 저서 “사목적 배려에 관하여”에서 이러한 문제와 사목자의 개인의 삶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으나 희생의 제사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완전히 침묵한니다. 그의 책 역시 매우 높이 평가되어 9세기에 주교들이 서품될 때 교회법전과 함께 주교들에게 전달되었는데, 그 때 주교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살라는 권고를 받았다.

장로들에게 사목직을 그토록 긴급하게 위임한 성 베드로 자신도 같은 서신의 앞부분에서 거룩한 사제직으로서 하느님께 영적 희생을 바치는 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성사 집전과 특히 성체 봉헌을 위임받은 사제는 항상 자기 곁에 있으며 성체를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제대 봉사를 해야 하므로, 이것은 전자의 직무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점을 나타내는 반면, 후자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 안에서 공유된다는 점에서 장로에게 더 독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시편 xxiii [xxii], 이사야서 10, 11, 렘 xxiii 1-4, 에스겔 xxxiv 11-31) 이리하여 말라기의 예언(i 11)이 이루어지며, 교회의 순수한 제물을 통해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사제 직분에 따라 말씀과 성례전의 청지기 직분과 직무, 죄를 사하고 유지하는 권능, 그리고 사목의 다른 기능을 정당하게 규정하고 제시한다고 대답한다. 이 직무 안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기능을 나타내고 반복한다.

실은, 회개하는 성 베드로에게의 그의 양무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세번의 위임에서부터 그의 영예로운 삼중관의 유래를 도출하는 교황 자신이 특히 이에 대한 증인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 자신의 경우에 그렇게 명예롭게 여기는 것이 성공회 사제에게는 사제들의 위엄과 직위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3.20. XX. 교황의 교서는 우리 양식을 부정하지 못함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경하는 형제들은 이 판결을 내림으로 우리뿐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동등하게 누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 자신의 전임자들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가 우리와 함께 동방인들을 약 1640년에 발표된 "정교회 신앙고백"에서 성사적 사제직의 두 가지 기능, 즉 죄를 용서하고 설교하는 기능만을 언급한 것이 결함있는 의향 때문이라고 정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Longer Russian atechism”(Moscow, 1839)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희생에 대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직분과 관련된 의무 중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양떼를 먹이는 직분만 언급한다.

나아가 그들은 삼성직에 대해 말하기를 “부제는 성례전에서 봉사하며, 사제는 주교에게 의존하여 성사를 거룩하게 한다. 주교는 성사 자체를 거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안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성사를 거룩하게 하는 은사와 은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다.” 동방 교회는 하나 이상의 신비로운 사역이 희생제사의 드림 한가지보다 제사장의 성격을 잘 묘사한다고 가르칠 때 확실히 우리와 하나이다.

이것은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 교회에서 쓰이는 '권능이 크신 하느님이시여'로 시작하는 기도양식에서 나타난다.—
“장로의 자리에 오르도록 택하신 이 사람을 성령의 은사로 채워주시어, 흠 없이 당신의 성소를 돕고, 당신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섬기기에 합당하게 하소서. 당신께 신령한 선물과 희생을 바치며, 중생의 물두멍으로 당신의 백성을 새롭게 하게 하소서.”

그러나 이제 로마인들은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교황이 250년 전 우리의 아버지들이 잘못 안수받았다고 선언한다면, 같은 법에 의해 비슷한 안수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직분을 받지 못했다는 피할 수 없는 선고를 방해할 것은 없는 바 그들의 조상들에게 어떤 판결을 내릴지 한두 번 고민하지 말자.

그리고 1550년과 1552년에 그가 말했듯이 무효인 형식을 사용했던 우리 교부들이 1662년에 그것들을 완전히 개혁할 수 없었다면, 그의 아버지들은 자기-동일한 법칙 아래 있게 된다. 그리고 히폴리투스와 빅토르, 레오, 겔라시우스, 그레고리우스가 그들의 의식에서 사제직과 대제사장직에 대해 너무 적게 말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바치는 권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로마 교회의 그 자신은 유효하지 않은 사제직을 갖고 있으며, 성례전의 개혁자들은 이름이 무엇이든 그녀의 의식을 고칠 수 없었다. 교황의 말을 빌리자면 "형식이 무의미하여 교계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 더 이상 서품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품예식서가 “명령을 수여하기에 완전히 불충분하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충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세기와 11세기부터 어떤 종류의 희생이나 제사장직(그리고 죄를 사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서품예식서에 약간을 추가했으나 허사이다.” 따라서 우리의 명령을 전복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모든 명령을 전복시키고 자신의 교회에 유죄선고를 내린다.

에우제니오 4세는 그가 직제의 새로운 질료와 새로운 형상을 가르치고, 말 한마디 없이 실체를 떠나면서 교회를 무효의 큰 위험에 빠뜨렸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손을 얹거나 적절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은 서품을 받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황 레오는 이전의 로마 주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형식을 요구하고 동방 교회의 교리문답에 결함있는 의도가 있다고 강요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이 평화와 통합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놓여졌으므로, 우리가 교회의 평화와 통합을 위해 최소한 동등한 정도로 헌신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 교황 레오 13세가 다른 편지에서 때때로 쓴 것들이 때로는 매우 참되고, 언제나 선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와 그의 차이와 논쟁은 우리 모두가 함께 믿고 기리는 하나의 복음 자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에게 사랑하고 존경할 만한 많은 것들이 있음을 기쁘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보이는 머리로 대체하는 로마 공동체에 내재되어 있는 그의 오류는 그의 선한 말에서 평화의 열매를 빼앗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형제 목자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직분을 세우실 때 의도하신 바를 인내심을 가지고 저울질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더 많은 것이 그분의 기쁜 시간에 따라 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논쟁으로부터도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진리에 대한 더 많은 지식, 더 큰 인내심, 그리고 평화에 대한 더 넓은 열망을 키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나이다!
[1] 제70대 캔터베리 대주교[2] 사제직을 거치지 않고 주교로 서품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