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長興庫銘 粉靑沙器 印花 菊文 大楪. 조선 세종 20년인 1438년에 둘째아들 세조의 태와 태지를 안태소(安胎所)에 묻으며 함께 부장한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고려 말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한국의 분청사기는 세종연간인 1418~1450년경에 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세조 연간을 주축으로 한 1450~1470년경에 최전성기를 맞았다.15세기의 도자기, 분청사기와 백자 특히 세조 재위 시기에 세조의 명으로 완성된 인화(印花) 분청사기는 당시의 불교중흥과 맞물려 극한의 세련됨을 자랑하였고 이로 인해 분청사기계의 백미로 통하고 있다.분청사기인화문귀대접, 15세기 조선의 얼굴 분청사기이 장흥고명 분청사기 국화무늬 대접은 이러한 분청사기의 최전성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세종대왕이 당시 둘째아들이었던 세조의 태를 태실에 묻으며 함께 부장하기 위해 만든 왕실용 분청사기이다. 1438년에 어린 세조의 몸에서 나온 태반과 태, 그리고 태실을 만든 연월일시와 사주, 이름을 적은 태지와 함께 묻었다.
이후 1934년에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위치한 세종대왕자 태실에서 세조의 태봉(胎封)을 옮길때 이 분청사기가 세조의 태, 태지(胎誌)와 함께 출토되었다. 커다란 원 안에는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조달·관리하던 관청인 장흥고(長興庫)의 이름이 상감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고려 상감청자의 양식이 많이 계승되어 있어 학계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 왕자의 태실 및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 중 그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1] 당시 함께 발견된 세조의 태반과 태지도 국립중앙박물관에 함께 소장되어 있다.
3. 외부 링크
4. 같이보기
[1]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은 중종 왕자 화수 태지이다.